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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내 글의 한계 지점을 알고 있다. 최근에 <오마이뉴스>에 꾸준히 투고를 하면서 더 선명해졌다. 내 글은 지극히 '나'라는 주어에 갇혀 있는 편이다.

그렇지만 '좁다'라고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될 것이다. 모든 글은 어차피 '나'라는 주어를 통과해서 나오는 법이니 내 글이 나를 떠나서 어디로 가겠는가. 출발 지점은 다 비슷하기 마련이다.

다만 '확장'에 있어서는 분명 '좁다'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나에서 나로 끝날 때가 많고, 조금 더 나아가면 나에서 '너'까지 닿기도 하는데, 이게 어떤 이 사회적인 맥락을 관통하는 '우리'에까지 이르는 일은 흔치 않은 것처럼 보인다.
 
쓰는 사람
 쓰는 사람
ⓒ 픽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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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에서 매기는 등급이 모든 걸 말해주지는 않지만, 그래도 분명히 알려주는 것이 있다. 그런 것들을 몰라서 못 한다기 보다는 알아도 잘 안 된다. 그게 딱 지금 내 한계다.

이런 사실에 직면하는 것이 기분 좋을 리 없다. 앞서 맥락으로 '잘 쓰는' 이들의 글을 보면 아주 뜨끈한 질투와 분노가 일어나기도 하다. 그러나 나는 질투와 분노를 활용할 줄 아는 사람이니 괜찮다.

한계 지점이 명확하다. 그렇다면 나는 묻고 싶다. 어떻게 그 한계 지점을 돌파 해낼 것이냐고.

한동안 글을 전폐하고 은둔하여서 수련을 쌓고 마침내 깨달음을 얻은 후에야 쓸 것이란 말인가? 그럴리  없다. 하던 것은 그대로 하되 0.1cm씩 나아짐을 향해 달릴 뿐이다.

글은 마음으로 쓴다고들 하지만 몸이 하는 일이다. 쓰는 몸이 만들어지지 않은 사람이 갑자기 좋은 글을 쓸 가능성은 희박하다. 어쨌든 매일 쓰는 것을 통해서 잘 쓰고 못 쓰고를 떠나 '쓰는 것' 자체가 버겁지는 않은 상태, 그게 내가 말하고 싶은 '쓰는 몸'이 올라온 상태다.

그래서 최근에 나는 그 쓰는 몸을 만들고, 올리기 위해서 열심히 썼다. 더 많은 고민들을 덧붙이고, 앞서 말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엄청난 시간을 투자하지는 못했지만, 하루에 주어진 시간 속에서 짜내고 짜내서 거의 매일 써내기는 했다.

그런 시간을 3주 정도 보내니 확실히 탄력이 붙고 이제 쓰는 것 자체에 엄청난 각오와 에너지가 소비 되지는 않는다. 바로 이 지점에 와서야 하는 고민과 노력이어야 의미가 있다고 본다.

나아지면 쓰는 내가 아니라, 쓰면서 나아지는 내가 되길 바란다. 그래서 <오마이뉴스> 기사 등급과 상관없이 나는 내가 쓴 모든 글을 아끼고 사랑한다. 아니, 나는 그 모든 걸 떠나서 여전히 글을 쓰는 것 자체가 참 좋다. 딱 그 고요한 지점에 뿌리를 내리고 하루에 0.1cm 씩만 자라길 원한다. 그렇게 일 년, 아니 몇 년이 지나면 어쩌면 괄목에 도달해 있겠지 하며 미소 지어본다.

내 안에, 내 삶에, 끊임없이 흐르는 강물 같은 것들이 꼭 있었으면 좋겠다. 그런 것들이 나에게 살아갈 이유를, 살 수 있는 힘을, 살아내는 의미를 알게 하니까 말이다. 그 수많은 강물들 중에, 내가 가장 사랑하는 이름이 글쓰기 이길 바란다. 그 마음으로 오늘도 그저 이렇게 흐르듯 쓴다.

태그:#글쓰기, #쓰고뱉다,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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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 당연스럽게 '내'가 주체가 되어 글을 쓰지만, 어떤 순간에는 글이 '나'를 쓰는 것 같을 때가 있다. 마치 나도 '생명체'이지만, 글 역시 동족인 것 같아서, 꿈틀 거리며 살아있어 나를 통해서 이 세상에 나가고 싶다는 느낌적 느낌이 든다. 그렇게 쓰여지는 나를, 그렇게 써지는 글을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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