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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언론의 '도서관 인증샷' 보도. 모자이크 처리는 필자가 한 것.
 한 언론의 '도서관 인증샷' 보도. 모자이크 처리는 필자가 한 것.
ⓒ 홍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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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 매체들의 선정적 보도, 정말 이래도 되는 걸까?

지난 17일 인터넷 커뮤니티 사이트인 '디시인사이드'에 '딸기츔'이라는 닉네임의 누리꾼이 자신이 모 대학 도서관에서 여대생을 성추행을 했다며 자랑(?)하는 내용의 글과 인증 사진을 올렸다. 인증 사진이란 인터넷에서 자신이 한 말을 증명하기 위해 '증거물'로 올리는 사진으로, 이 누리꾼은 책상 밑에서 여대생의 다리를 몰래 찍은 사진을 글과 함께 올렸다.

이 사건은 순식간에 인터넷 전역으로 퍼져나갔고, 20일에는 사건의 심각성을 인지한 언론 매체들도 앞다퉈 보도를 하기 시작했다. 문제는, 언론이 사건을 보도하면서 인터넷에 올라와 있는 인증 사진을 수정하지 않고 그대로 사용했다는 점이다.

맨 다리가 그대로 다 드러나 보이는 선정적인 사진을 가져다 쓰면서도 모자이크 처리와 같은 기본적인 수정 작업을 거치지 않은 채 그대로 올린 매체들이 부지기수였다. 기사에 사진을 첨부해서 올린 매체 중에서는 그나마 <국민일보> '쿠키뉴스' 정도가 다리 전체를 모자이크 처리했을 뿐, 대다수의 매체는 모자이크를 아예 하지 않거나 하더라도 극히 일부분에만 해, 큰 차이를 못 느끼게 했다.

불법적이고 선정성 가득한 사진을 그대로 가져다 쓴 것 자체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따로 있다. 사진에는 성추행을 당한 피해 여성의 신체가 고스란히 찍혀 있다는 점이다. 피해 여성이 자신의 맨 다리가 찍힌 사진이 숱한 언론 매체들의 뉴스에 그대로 올려 졌다는 것을 안다면 그 수치심이 어떠할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성추행 보도하는 언론들 행태, 이게 더 성추행

SBS <강심장>에 출연해 성추행 당했던 경험을 이야기한 유인나.
 SBS <강심장>에 출연해 성추행 당했던 경험을 이야기한 유인나.
ⓒ S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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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추행에 관한 언론의 선정적 보도는 이뿐만이 아니다. 지난 한 주 연예계를 강타했던 '유인나 성추행 사건' 또한 언론 매체들이 누리꾼들과 합작하여 사건에 불을 지피고 기름을 붓는 역할을 담당했다.

지난 13일 SBS <강심장>에 출연해 12년 동안의 무명시절에 대해 털어놓은 탤런트 유인나는 과거 소속되어 있던 기획사의 가수 출신 이사에게 강제로 키스당할 뻔 했던 일화를 털어놓으면서 힘든 시절이었음을 토로했다.

방송이 나가고 누리꾼들은 유인나가 말한 내용을 바탕으로 성추행범이 누군지 찾기에 열을 올렸고, 언론 매체들은 선정적인 제목과 쓸데없이 자세하고 친절한 상황 설명으로 기사를 읽는 독자들을 불편하게 했다.

탤런트 유인나, "기획사 이사에게 성추행 뒤 500번 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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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인나, '전 소속사 이사에게 성추행 당한 곳 500번 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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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이 나가고 이튿날부터 인터넷에 올라오기 시작한 기사의 제목들이다. 하나같이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제목만으로 누리꾼들의 클릭을 유도했다.

언론 때문에 두 번 우는 피해자들을 생각해달라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보도로 언론 매체가 대중의 뭇매를 맞은 게 어디 한두 번인가. 그러나 그럴 때마다 언론은 앵무새처럼 '국민들의 알권리'를 반복해 이야기했다. 자신들의 보도가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이유는 결코 상업적 목적에서가 아니라 국민들의 알권리를 충족시켜주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알권리의 다른 말이 인권침해라는 것을 언론은 모르고 있을까? 예컨대 지난 2007년 소위 신정아 파문으로 온 나라가 떠들썩할 때, '알권리'를 빙자해 얼마나 많은 인권침해가 이뤄졌던가? <문화일보>는 신정아의 누드사진을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싣고도 알권리를 위해서였다고 했다.

그러나 법원은 <문화일보>의 이 같은 보도가 알권리가 아니라고 따끔하게 일침을 놓았다. 지난 2008년 법원은 신정아씨가 자신의 누드사진을 게재한 <문화일보>와 당시 편집국장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등 청구소송에서 "피고들은 신정아씨에게 1억5천만 원을 배상하라"며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내렸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사적으로 찍은 알몸 사진까지 공개한 <문화일보>의 보도로 인해 신정아씨가 회복하기 어려운 정신적 피해를 입었음을 고려했다"면서 "사진에 대한 호기심과 국민의 알권리를 동일시하기 어렵고, 따라서 공익을 위한 보도였다는 문화일보의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밝혔다.

대부분의 언론사들이 문제의 '인증샷'을 여과없이 실었다.
 대부분의 언론사들이 문제의 '인증샷'을 여과없이 실었다.
ⓒ 화면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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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도서관 성추행 사건을 보도하는 기사들 중에는 선정적인 인증 사진이 인터넷 전역으로 빠르게 퍼져나간 점을 지적하는 내용도 있었다. 그러나 아무런 모자이크 처리 없이 원본을 그대로 기사에 가져다 쓴 다수의 언론 매체들 역시 인증 사진을 퍼 나른 책임에서, 사진으로 클릭 장사를 했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언론 매체들이 경쟁사보다 빠르게 기사를 올리기 위해 분초를 다투는 사이, 성추행 피해자의 인권은 땅에 떨어졌다. 성추행을 하고 사진을 찍어 인터넷에 올린 가해자의 직접적인 폭력만 폭력이 아니다. 국민의 알권리를 내세워 자신들의 잇속을 챙기고 클릭 장사하는 언론의 황색저널리즘은 그 자체로 또 하나의 폭력이다. 그리고 피해자는 그와 같은 언론의 무자비한 폭력에 두 번 운다.


태그:#성추행, #알권리, #옐로저널리즘, #신정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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