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에 등장하는 소년들의 이름은 가명입니다.
엄마 얼굴도 모르는 소년, 부모 이혼으로 가정이 해체된 소년, 부모가 버림으로 조부모 손에서 자란 소년, 알코올 중독, 가정폭력, 방임, 학대 등으로 몸과 맘이 병든 소년…. 학교 밖을 떠돌다 절도와 폭력 등의 죄를 짓고 소년원생이 된 소년범…. 옷깃만 스쳐도 치고 박고 싸우는 소년원생, 싸울 의욕조차 없는 우울증 환자인 소년원생….
서울소년원은 국립서울병원(정신치료병원)과 지난해 9월 5일부터 10월 24일까지 소년원생 210명에 대한 정신건강 조사를 했습니다. 국내 최초로 시도한 소년원생 정신건강 조사 결과 43%가 정신분열 또는 품행장애(ADHD)를 앓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들 중 83.3%는 고참 행위와 폭력 등으로 소년원 질서를 훼손했습니다. 교정보다 정신치료가 시급한 소년들이었습니다. 소년들을 전문적으로 치료할 '의료소원의'의 확충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그런데, 이 소년범들을 희망의 주인공으로, 서울소년원을 '힐러 양성소'(치유자 양성소)로 만들겠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한영선(50) 서울소년원장입니다. <공포의 외인구단> 주인공들은 낙오자이긴 했지만 소년범은 아니었습니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 존 키팅 선생은 성공과 경쟁교육에 반기 들면서 학교 측과 충돌했지만 제자들은 동조했습니다. 그런데 소년범에게 무슨 가능성이 있다고, 소년범에게서 회복적 정의를 찾겠다니…. 그는 돈키호테일까요? 혁신가일까요? 한영선 원장은 말합니다.
"빈곤과 결손 등의 척박한 환경을 바꿔주는 것은 어렵습니다. 하지만 꿈과 희망을 갖게 해서 시련과 역경을 극복하도록 도울 수는 있습니다. 그렇게 상처와 아픔을 극복한 소년은 '운디드 힐러'(Wounded Healer, 상처 입은 치유자), 자신의 아픔으로 아픈 사회와 이웃을 치유하는 힐링파워의 소유자가 됩니다.부모 이혼으로 방황하며 마약에 취했던 위기청소년 오바마 대통령과 사생아로 태어나 미혼모의 아픔까지 겪었던 오프라 윈프리가 대표적인 운디드 힐러입니다. 서울소년원에서 운디드 힐러가 나올 것을 저는 믿습니다. 소년들은 꽃입니다. 먼저 핀 꽃은 꽃이고 늦게 핀 꽃은 꽃이 아닐까요? 아픔만큼 늦게 피는 대기만성의 '운디드 힐러'가 소년원생 중에서 나올 것을 저는 믿습니다.""소년범 중 진성범죄자는 6%뿐... 변화 힘들지만 포기해선 안 돼"
"사람들은 소년범 대다수가 범죄자가 될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소년범 중에 성인(진성) 범죄자가 되는 것은 불과 6%인 것으로 연구결과 나타났습니다. 소년들은 비행에 잠시 노출됐을 뿐이며 성장통을 앓은 뒤에 거의 돌아옵니다. 소년범 중 74%는 가장 먼저 바뀌고, 20%는 천천히 바뀌고, 6%는 아주 오래 걸릴 뿐입니다. 이 아이들은 변화가 힘든 아이들이지 포기할 아이들은 아닙니다."
한영선 원장은 1993년 행정고시(36회) 합격 후 소년범들과 22년째 생활 중인 교정 전문가인데다 미국 미시건주립대와 동국대에서 석․박사학위를 취득한 범죄학 박사입니다. 10편의 학술지 논문과 4권의 저서와 번역서 모두 소년 범죄와 관련됐습니다. 이론과 실제, 검증까지 거치면서 신뢰 수준을 높였으니 소년범에 대한 낙관론을 무모하다고만 할 순 없습니다.
그는 일반 공무원과 달리 특이한 경력과 소명을 가진 공무원입니다. 공장 다니는 어머니의 아들이자 가난한 대학생이던 그는 약자를 돌보는 신학도가 되고 싶었지만 가난 때문에 법학도가 됐습니다. 그런데 그 뜻이 실현됐습니다. 가지 못한 길에 대한 아쉬움이 소년 교정 현장에서 실현된 것입니다. 한 원장에겐 슬로건이 있는데 이렇습니다.
"오직 사랑만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최근 소년재판 전담판사를 만났습니다. 그 판사는 "관료의 권위를 버리고 낮은 곳으로 내려온 한영선 원장으로 인해 서울소년원이 아이들을 위한 학교로 변했다"라고 평가했습니다. 한 원장은 소년원의 악순환을 불러오는 처벌, 교정, 교화 대신에 치료, 보호, 돌봄을 도입했습니다. 응보적 사법에서 회복적 사법으로 바뀌자 소위 '꼴통 짓'을 하던 소년원생들도 크게 달라졌습니다.
가해자 처벌보다 피해자 회복이 더 중요
한 원장을 처음 만난 곳은 서울소년분류심사원, 2012년 6월 돌보던 소년을 면회하러 갔다가 처음 만났습니다. 재범으로 다시 구속된 소년을 면회하러 2014년 3월 서울소년원을 찾았다가 한 원장을 다시 만났습니다. 2년 사이에 횐 머리카락이 많이 늘었습니다. 2013년 5월 서울소년원장에 부임한 그는 구습인 응보적 사법에다 회복적 정의의 깃발을 꽂으면서 맘고생이 적지 않았습니다.
한영선 원장이 혁신의 깃발을 꽂은 건 고위공직자로서 '노블레스 오블리주'입니다. 가진 사람과 높은 사람은 그만큼의 의무를 다 해야합니다. 소년들과 22년을 함께 했으니 옷을 벗더라도 소년을 위한 혁신에 나서야한다는 의무감이 작용했고, 소년원의 구습을 혁신해야 할 시대적 요청이 무르익었습니다.
소년원은 교정시설인 동시에 교육기관입니다. 서울소년원의 또 다른 이름은 고봉중고등학교이며 한 원장은 교장이기도 합니다. 소년원을 '힐러 양성소'로 혁신하기로 한 그는 소년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는 인성교육을 중시했습니다. 일반학교도 포기하다시피 한 전인교육을 패배의식과 무기력에 빠진 소년들, 걸핏하면 싸움질하는 소년들에게 시도한다?
그건 성공과 실패 이전에 구습과의 싸움이었습니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현실에서 양화가 악화를 구축하려면 배전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가 내건 혁신의 가치는 '회복적 정의'입니다. 그는 '한국아나뱁티스트출판사'(KAP)의 정의와 평화실천 기획물인 <회복적 정의 실현을 위한 사법의 이념과 실천>과 <피해자 가해자 모임>라는 회복적 정의에 대한 두 권의 번역서를 펴낸 전문가입니다. 회복적 정의는 가해자 처벌보다 가해에 대한 반성과 피해자에 대한 회복을 책임지게 하는 것입니다.
소년원에서 싸움은 불가피합니다. 소년원처럼 여럿을 새장에 가둔다면 새들이 노래할까요? 한 원장은 툭하면 한판 붙는 아이들의 싸움을 성장의 계기로 활용했습니다. 싸움이 발생하면 이전에는 "왜 싸웠어?"라고 다그쳤는데 회복적 정의 프로그램을 도입하면서 "무슨 일이 있었니?"라고 경위부터 물었습니다.
그러자 자기변명에 급급하던 피해자와 가해자들이 사건 발생에 대해 각자 설명했고, 싸움을 지켜보던 동료 소년들도 이야기를 들으면서 무엇이 싸움의 원인이 됐는지, 아파하고 싫어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됐습니다. 질문 하나 바꾸었더니 징계 건수가 자그만지 36% 줄었습니다.
소년원에 '사제의 정'이 쌓인다고?
교사들은 회복적 서클, 문제해결 서클, 회복적 대화모임을 적극 운영했습니다. 갈등과 싸움이 발생하면 가해자, 피해자, 동료학생은 물론 교사까지 주체로 참여하면서 문제와 아픔을 해결했습니다. 그러자 교사에 대한 신뢰가 회복됐습니다. 이전의 교사는 악순환의 출발점이었습니다.
교사는 징계하고, 징계 당한 가해자는 보복하고, 보복 당한 피해자가 가해자로 둔갑하는 악순환의 고리였는데 그 고리는 끊기고 사랑의 고리가 형성됐습니다. 고참 행세, 폭력 행사, 상해사건 가해자를 대상으로 회복적 정의를 적용했더니 47.5%가 긍정적인 효과를 보였습니다.
회복적 서클모임에 참여한 준환이는 "저랑 다른 아이들의 생각이 어떻게 다른지 알게 됐고, 피해자의 심정이 어떤지 알게 돼 (고참행위 및 폭력행사 등의) 잘못을 하려고 할 때면 한 번 더 생각하게 됐다"고 말했습니다.
교사와 학생이 대중목욕탕에 가서 서로의 등을 밀어주었습니다. 뮤지컬, 연극, 영화, 수영, 스키캠프 등의 현장체험을 하면서 사제 간의 정을 쌓았습니다. 형준이는 "선생님 등을 밀어 드리면서 친해지게 됐다"며 좋아했고, 인재는 "잘못해서 소년원 들어왔는데도 선생님들이 잘 챙겨주셔서 감동받았고, 그래서 생활을 잘하려고 노력했다"고 말했습니다.
예산·인력 부족으로 일 못해? 각계각층에 도움 청했더니
관료들은 예산과 인력부족을 탓합니다. 맞습니다. 돈과 사람이 없는데 어떻게 일합니까? 서울소년원 역시 예산과 사람이 턱없이 부족합니다. 하지만 한영선 원장은 '못한다!'는 말 대신 다양한 자원봉사자와 각계각층의 사회자원을 활용했습니다. 그랬더니 자원봉사자는 부임 전보다 2배 늘어난 720명, 인성교육 프로그램은 7가지에서 31가지로 늘었습니다.
각계각층이 '회복적 정의'와 '힐러 양성 프로젝트'에 참여했습니다. 한인섭 서울대 법학과 교수는 독서치료 프로그램, 김희수 한세대 교수는 전문상담, 서울대 박영하 교수는 1년 프로젝트 꿈교육, 영화배우 박중훈, 봉태규의 연극치료, CJ문화재단의 예체능 지원, 종교기관들은 힐링캠프 등으로 참여했습니다.
힐러 양성의 핵심은 봉사활동입니다. 서울소년원은 각종 봉사단을 만들어 노인복지관과 노인요양원, 음성꽃동네 등을 방문해 마술쇼, 노래공연, 장수사진 촬영 등의 봉사활동을 했습니다. 인간쓰레기 취급받던 종철이는 "소년원에 와서 제일 잘한 게 봉사활동"이라면서 "할머니와 할아버지들이 좋아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묘한 쾌감을 느꼈고, 봉사하는 삶을 꿈꾸게 됐다"고 소감을 밝혔습니다.
좋은 일을 했더니 상도 받았습니다. 3년 연속 인권보호 최우수기관 표창(법무부장관), 소년보호 최우수기관 표창(법무부장관), 노인의 날 기념 공로 표창(보건복지부장관), 전국청소년 행복UCC경진대회 최우수상(미래창조과학부), 유공 교육활동 표창(경기도교육감) 등입니다.
혁신 공직자의 시도, 꽃필까? 꺾일까?
한국의 공공기관에도 시스템과 매뉴얼이 있습니다만 기관장이 바뀌면 기관장 취향에 따라 확 바뀝니다. 시스템과 매뉴얼보다 기관장의 취향이 최우선입니다. 기관을 쥐고 흔들기 위해 기관장이 되려는 것처럼 보일 정도입니다. 그래서 전임자가 쌓아놓은 공든 탑은 무너지고 자기 탑을 쌓으려는 한바탕 소동에 직원과 민원인들이 애먼 고생을 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한영선 원장은 "서울소년원은 희망의 학교"라고 큰소리 쳤습니다. 큰소리가 언제까지 유효할지 의문입니다. 그는 머지않아 공직생활을 마감해야합니다. 소년원장에 부임한 지 2년이 넘었으니 떠날 때도 됐습니다. 공직 인사 및 적체 해소는 이해합니다만 혁신 공직자가 어렵게 씨를 뿌린 회복적 정의와 희망의 새싹들이 꺾일까봐 걱정입니다. 그늘졌던 서울소년원에 희망의 햇볕이 늘 비춰져서 한영선 원장의 장담처럼 '운디드 힐러'들이 탄생하길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