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길목, 경북 영덕은 투표 열기로 뜨거웠다. 영덕의 구불구불한 해안 길을 따라 천혜의 자연이 모습을 드러냈다. 깊은 산골길에는 탐스러운 사과가 주렁주렁 열렸다. 나뭇가지가 찢어질 듯 매달린 감나무에도 붉은 가을이 들었다. 전국 어디에 내놔도 손색없는 청정지역에 핵발전소라니...
인구 4만 명의 소도시 영덕에서 핵발전소 유치 찬반 의견을 묻는 주민투표가 지난 11일부터 12일까지 이어졌다. 거리에서 나부끼는 현수막만도 1만 장이다. 정부 지원을 받지 못해 민간 주도로 치러진 투표소에는 주민뿐만 아니라 외부인의 발길도 이어졌다. 제주에서 서울까지 500여 명의 시민들이 자원봉사를 위해 찾았다. 언론사 기자들도 몰려들어 취재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핵발전소 반대 91.7%] 아이들까지 업고 나온 투표장
"넘어지면 다쳐!"투표 당일 한 엄마가 투표장 앞에서 소리쳤다. 잰걸음을 옮기는 또 다른 젊은 엄마 등에는 갓난아이가 잠들어 있다. 얼굴에 주름이 자글자글한 할머니, 뒷짐 지고 느린 걸음으로 뒤따르는 할아버지도 투표소로 향했다. 할아버지와 아들, 손자가 한꺼번에 온 '3대 유권자'도 있었다. 거동이 편치 않아 보이는 106세 최고령 할머니도 핵발전소 유치 찬반 의견에 한 표를 던졌다. 후손들의 미래를 위한 한 표였다.
개표 결과 91.7%의 핵발전소 유치 반대. 쉽게 나오기 어려운 수치다. 11일과 12일 20개 투표소에 1만1209명이 몰렸다. 7.7%, 865명만이 유치 찬성표를 던졌다. 나머지 0.6%는 무효표로 처리됐다.
투표 전 각종 여론조사에서 드러난 핵발전소 유치 반대 의견은 55~60%였는데, 이 수치를 훌쩍 뛰어넘었다. 여론이 억눌려 왔다는 뜻이다. 주민들은 정부의 일방적인 발표와 한수원의 집요한 물량공세 속에서도 굳세게 견디면서 자기 표심을 지켜온 것이다.
짧은 기간에 유권자 10명 중 3명이 투표장으로 나왔다. 보수 성향이 강한 영덕에서 정부정책에 반기를 든 것으로, 위기감의 표현으로 해석할 수 있다. 대게로 유명한 '청정 영덕'. 송이 생산량도 전국 1위지만 브랜드 가치가 주변 지역에 밀려 찬밥 신세다. 여기에 핵발전소까지 지어진다면 천혜의 자연을 찾아드는 관광객마저 잃을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이들을 투표장으로 이끈 것이다.
[엄청난 방해공작] 선심성 관광에 '도촬'까지
주민들이 자기 동네의 운명을 결정하는 선거인데도 방해가 만만치 않았다. "원전을 반대하는 단체가 주도하는 주민투표는 '주민투표법'에 따른 합법적인 투표가 아니며, 영덕군의 행정 지원이 없다"고 윤상직 산업통산부장관 장관은 말했다. 투표하기도 전에 재를 뿌렸다. 이와 비슷한 내용으로 정종섭 행정자치부 장관의 사인이 담긴 유인물이 집집이 뿌려졌다.
이뿐만이 아니다. 주민투표가 진행되는 동안에도 공무원들의 수상쩍은 행동이 여기저기서 포착됐다. 군청 직원들은 투표하지 말라고 공공연하게 종용했다. 투표 당일에는 청사가 텅텅 비었다. 군수도 기자들이 들이대는 마이크를 교묘하게 피해갔다. 중앙정부가 강하게 밀어붙이는 일이기에 주민의 뜻을 살피는 일을 포기한 것이다. 책임지고 싶지 않다는 의미다.
한수원(한국수력원자력)의 투표 방해 전술은 치밀했다. 투표를 하루 앞둔 지난 10일, 한수원이 주민들을 온천관광에 선물까지 안기고 저녁까지 거하게 대접한다는 제보를 받고 <오마이뉴스> 취재진이 저녁 식사 접대가 이뤄지는 오리전문점을 급습하기도 했다. 그런데도 한수원은 여전히 접대 사실을 부인하고 있다. (관련기사:
영덕 주민들에 밥 사주고... '주민투표 소문' 사실이었다)
"정부가 불법이라고 하던데 투표는 해서 뭐하노."한수원은 20곳의 투표소마다 차량 3~4대를 배치하고 이렇게 외쳤다. 현장에 모습을 드러낸 이들은 180cm 이상의 건장한 젊은이들이었다. 이들은 차 안에서 밥을 먹으며 대기했고, 심지어 초소형 블랙박스를 통해 투표장에 들어가는 사람들을 도촬했다. 기자들이 사진을 찍으면 '초상권'을 내세우며 강하게 제지하기도 했다. 당당하지 않다는 것을 그들도 알고 있는 것이다.
투표 전부터 도로 곳곳에 내건 현수막 문구는 날이 갈수록 강경한 톤으로 바뀌었다. 투표가 임박해서는 '원전반대 불순 좌파세력 강력히 규탄한다!'는 살벌한 문구도 등장했다. 동네 생활 투표를 '이념 투표'로 몰아가려는 의도다. 대통령까지 들먹이며 원전을 찬성하는 막장 현수막도 내걸었다.
[투표, 그 후] 277명 미달하기에 '무효'?
정부는 이번 주민투표를 불법선거로 못 박았다. 동창회 선거도 지원하는 선관위는 '핵발전소 유치'라는 주민들의 중차대한 미래가 걸린 선거에서 선거인 명부조차 주지 않았다. 불법이라고 윽박질렀고 철저하게 외면했다. 투표에 참여하지 말라고 종용했다. 민주주의 원칙을 저버린 것이다.
투표가 끝나고 개표 발표가 난 뒤에는 태도를 약간 바꾸었다. 중앙선관위는 유권자 수치를 언론에 제공했고 주민투표법상 효력을 문제 삼았다. 일부 언론은 중앙선관위 유권자 3만4432명(9월 기준)을 기준으로 주민투표법상 효력 수치인 3분의 1에 미달되기에 효력이 없다고 보도했다. 1만1478명 이상이 투표에 참여해야 하는 데 277명이 미달됐다는 것이다. 주민들은 그제야 언론 보도를 통해서 유권자 수치를 처음으로 확인했다.
하지만 정확히 말하면 이는 잘못된 수치다. 부재자 투표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부재자를 제외한다면 현 총유권자 대비 약 41%가 투표했다. 지방자치단체장이 총력을 기울여 추진한 주민투표의 투표율이 20% 전후였던 것과 비교하면 매우 높은 비율이다.
투표에 참여했던 주민들은 허탈했다. 선관위가 명부를 주지 않아서 발품을 팔면서 1만2008명의 선거인 명부를 만들었다. 시장통을 돌고 동네 구석구석을 다니면서 핵발전 유치 반대 서명과 함께 만든 '땀에 전 명부'였다. 당초 서명했던 모든 유권자들이 투표소로 향하지는 않았지만 선거 당일 신규 투표인 명부를 등록하고 투표에 참여한 사람들이 많아서 1만1209명의 유권자를 확보한 것이다.
압도적인 승리의 환호성부터 터져 나와야 할 '영덕핵발전소반대범군민연대'는 정부와 일부 언론의 '무효 선언'에 침울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다. 하지만 핵발전소 유치 반대에 대한 폭발적인 민심을 확인하며 몸을 추스르고 있다.
이번 선거의 법적 유효성을 가른 277명. 정부와 한수원의 엄청난 '방해 공작'만 없었다면 훌쩍 뛰어넘었을 수치다. 만약에 유권자 3분의 1 이상이 투표했다면, 정부는 이번 투표 결과를 인정했을까? 지난 2010년 영덕군은 한국수력원자력에 핵발전소 부지 유치 신청서를 내면서 인구 4만 명 중 399명의 서명을 첨부했다. 그마저도 조작 의혹이 일었다. 또 이번에 투표한 유권자에 비하면 극히 적은 수치다. 1만명의 의사보다 399명의 의사를 중요시한 것이다. 이게 다수결의 원칙에 따르는 민주주의일까?
[영덕을 떠나며] 희망을 보았다
단식과 투표를 이끌었던 이강석 군의장의 지도력은 대단해 보였다. 군의원 전원이 투표를 지지하게 만들었다. 국회의원부터 군수, 군의원까지 몽땅 새누리당인 곳에서 정치생명을 걸지 않고서는 어려웠을 결정이었다.
박혜령 영덕핵발전소반대범군민연대 대외협력위원장, 강한 듯 보이지만 눈물 많은 여자였다. 그녀를 보면 그가 사랑하는 사람이 누군지 보인다. 주민들 이야기만 나오면 수도꼭지처럼 흘러나오는 눈물이 말해주기 때문이다. 투표를 마치고 개표 직전 박 위원장의 마지막 말이 떠오른다.
"처음 인명부를 만들면서 온갖 멸시와 고통이 뒤따랐다. 온갖 고생 끝에 8000명의 인명부를 만들었다. 그 이후에는 주변의 도움으로 1만2000명 이상의 숫자를 채웠다. 지금 득표율은 관심이 없다. 주민들이 어렵게 참여한 만큼 무사히 주민투표를 마칠 생각뿐이다. 더욱이 영덕의 주민들만으로는 불가능했을 일들을 수백 명의 외부 연대자들과 시민들이 함께 해서 주민투표가 가능했다. '탈핵' 쪽의 승리다. 이제 시작이라고 생각한다."<오마이뉴스> 10만인클럽과 녹색당이 공동 기획안 '영덕대게를 부탁해요!' 응원글쓰기 캠페인에는 400여 명이 참여했다. 마지막으로 영덕 주민들의 핵발전소 유치 반대 운동을 격려하신 많은 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