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이 퇴진 후, 우리는 어떤 공동체를 만들까요? 광화문 광장의 '퇴진 캠핑촌'은 촛불 시민과 시민단체들의 대안 토론 광장을 엽니다. 이 기획은 <오마이뉴스>와 <광화문 퇴진 캠핑촌 광장토론위원회>가 공동기획했습니다. [편집자말] |
'꼴페미', '친박페미'DJ DOC의 촛불집회 현장공연이 취소되자 일부 여성단체들에게 낙인이 찍힌 문구다. 심지어 DJ DOC 공연 반대는 '갑질'이며 '검열'이라는 비난도 잇따랐다. 노래 '미스박'에 분노한다면 '다방레지들일 것'이란 여성혐오 발언과 '단체로 대줘서 공연을 취소시켰냐'는 성적인 모욕까지 등장했다. 다른 곳도 아닌 촛불 광장 안에서다.
보다 평등한 사회와 너른 민주주의의 공론장인 광장에서 소수자를 차별하고 배제하는 공연이 이뤄져서는 안 된다는 페미니스트들의 요구사항들이 처참하게 묵살됐다. 반면, 내부적 성찰과 반성적 논의가 아닌 여성혐오와 모욕은 이어졌다.
지난 11월 26일 힙합 그룹 DJ DOC가 박근혜 정권을 비판하는 노래 <수취인분명>을 발표하고 난 뒤, 이 곡이 '박근혜정권퇴진비상국민행동(아래 퇴진행동)' 본부 측의 무대에서 불릴 것이라는 사실이 알려지자 많은 페미니스트들이 '미스박', '얼굴이 빵빵', '세뇨리땅', '빽차 뽑았다. 널 데리러가'와 같이 여성혐오적 가사에 대한 문제를 제기했다.
퇴진행동 측은 해당 노래 가사가 박근혜 정권의 비판을 목적으로 한들 여성성에 대한 비하를 수단으로 하는 한 퇴진행동 본부 측 인권지침에 부합하지 않다는 이유로 공연취소를 결정했다.
이후 몇몇 기자들은 공연취소 사실을 보도하며 "'일부 여성단체'의 반대로 공연이 무산됐다"고 주장했고, 이러한 내용이 '분노한 남자들'의 뇌관을 건드렸다. 이후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은 끔직한 일이 벌어졌다.
변화는 들리지 않던 목소리가 들릴 때 시작된다당위로서의 평등을 이야기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구체적·과정적 영역으로 넘어갈 때, 이는 비로소 어렵고 불편한 일이 된다. 평등을 요구하는 경우는 대부분 약자 및 소수자의 '보편에의 요구'에 초점이 맞춰져 있고, 이는 어떤 경우 다수의 규범과 불화하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이 광장의 특정한 문화에 어떤 문제의식도 느끼지 못할 수 있다. 이 사회가 작동하는 모든 규범적 양식들은 다수의, 불편할 것 없는 이들에게 맞춰져왔기에 그렇다.
나는 평상시 집회를 나가며 단 한 번도 사회자의 "모두 일어나 주십시오"라는 말에 의문을 가진 적이 없다. 일어났다 앉았다 하는 일이 나에게 크게 어려운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반면, 일어나고 앉는 데에 제약이 따르는 장애인에게는 사회자의 이 발언이 있는 매 순간 고립과 배제를 경험하게 된다.
하지만 촛불집회 현장 사회자는 달랐다. 매번 "모두 일어나 주십시오"라고 말하는 대신 이렇게 말했다.
"일어나실 수 있는 분들만 일어나 주십시오."고작 한 문장이 달라졌을 뿐인데, 사실 이 말은 우리의 광장이 그 어떤 소수자도 배제하지 않는다는 선언과 같은 울림을 준다.
인간은 종으로 횡으로, 날실과 씨실이 교차하듯 다종다양한 층위에 존재하며 같은 이유로 다종다양한 억압에 놓여있다. 꼭 같은 억압을 공유하고 있는 것은 아니더라도 우리에게 어떠한 '감정적 공명'이 중요한 이유는 바로 그것이다. 내가 겪은 불평등과 차별, 배제, 고립의 경험을 통해 나 아닌 다른 이의 고통을 반추해야 한다.
누군가 어떠한 문제를 제기할 때 그것을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사회를 바꾸는 힘이라는 것은, 언제나 더 들리지 않았던 목소리가 들리는 데에서 출발한다. 비록 변화를 향한 성찰과 반성의 과정이 다수에게 불편하며, 심지어 불필요하게 느껴질지라도 그렇다.
DJ DOC의 경우에도 퇴진행동 측은 하루 전날 공연취소를 결정했다. 시간과 비용, 이미 할애된 노동 등 그 모든 것들을 감수하고 공연취소를 결정한 이유는 단 하나였을 것이다. 누구들이 공경하는 것처럼 페미니스트 세력이 '압박해서? 대줘서?'가 아니라 그것이 평등한 광장을 위한 당연한 노력이기 때문이다.
옳을지언정 쉽지는 않은 선택이다. DJ DOC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대학 공연의 단골 초대가수로, 손가락에 꼽히는 무대 장악력을 가진 그룹이다. 심지어 직접 노래까지 만들 정도로 박근혜 퇴진 정국에 기여하기에 열정적이다. 그들의 무대가 공연되기를 원하는 수많은 '촛불 시민들'도 있다. 그러므로 사실은 그들을 무대에 세우는 것이 퇴진행동 본부로서는 가장 편한 일이었을 것이다.
안다. 이 사회의 기울어진 지형에 한 번 더 눈길을 두고, 가려진 곳에서 들리는 마른 비명소리들을 들어보려고 노력하는 것은 얼마나 많은 수고와 노력이 필요한 일이던가 말이다.
우리에게 통렬한 질문을 던질 때이다
누군가는 '대의'를 위해 작은 것을 희생해야 한다고 말한다. 해일이 오는데 조개만 줍고 있어서야 되겠느냐고 호통을 치기도 한다. 하지만 그들이 말하는 '작은 것'이란, 박근혜를 비판하기 위해 '년'을 끌어와 욕하고, '미스박'이라 부르고, '멍청한 아줌마'나 성형중독인 아줌마의 이미지를 끌어와 욕하는 것이고, 여성인 비선실세와 그의 딸, 여성대통령의 성생활에 대한 소문을 흘리고 이를 유희삼아 낄낄대는 것에 불과하다.
대의를 위해 작은 것을 희생하자는, 비슷한 논리가 여기 또 하나 있다. '국가를 먹여 살리는 재벌기업을 위해' 노동개악을 강행하고, '국론통일을 위해' 분열을 책동한다는 여론몰이로 세월호 유가족의 입을 막고, '애국시민을 길러내기 위해' 군부독재를 미화하는 국정교과서를 강행하고, '안보와 국방을 위해' 사드며, 제주군사기지를 배치하고, '일본과의 외교관계를 위해'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의 목소리를 무시한 채 한일협정을 강행한 소위 "애국보수"의 논리가 바로 그것이다.
"여성혐오와 민주주의는 함께 갈 수 없다." 수많은 페미니스트들이 매주 광화문에 나가 '박근혜 퇴진과 즉각 구속'을 요구하는 한편, 소수자 혐오로부터 민주주의와 평등의 광장을 지켜내기 위해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어제보다 나은 사회, 진일보한 사회를 고민하는 '우리의 광장'은 이들의 목소리에 응답해야 한다. 진정한 민주주의와 평등의 헌법적 가치 회복은 박근혜 퇴진 이후의 사회를 함께 구상하고 논의할 때에, 소수자에 대한 배제와 차별을 예민하게 인지하고 스스로를 성찰하고 반성할 때에야 비로소 가능한 영역이기 때문이다.
최순실-박근혜 국정농단에 국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온 이유 중 하나는 다름 아닌 '불평등'이다. 정유라의 이화여대 부정입학과 부정한 성적 취득, 재벌기업의 미르·K재단에 대한 막대한 자금 출연과 삼성의 경영권승계를 위해 쓰인 3000억 원의 국민연금과 같이 그 어떤 권위도 가지지 못한 최순실, 차은택, 고영태 등이 대통령을 등에 업고 정·재계 인사들과 야합하여 부당한 이득을 획득해온 것은 많은 국민들에게 좌절과 분노를 동시에 안겼다.
근대 이후 왕정이 폐기되고 공화정의 시대가 도래 하면서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명제 하에 참정권의 확대로 나타났던 민주주의 원칙에 대해 근본적으로 의문을 제기하게 했다. 대통령조차 헌법을 부정하고 민간인인 비선실세들과 작당하여 그들의 왕국을 운영하는 것과 다를 바 없이 운영되는 국가라면, '이것을 과연 민주주의 국가라고 말할 수 있는가? 우리가 사는 이 사회가 과연 옳은 사회인가?' 묻게 된다.
그래서다. '평등'과 '민주주의'에 대한 열만은 분리불가능한 키워드로서 이 시민불복종의 역사적 흐름에 주요한 동력으로서 등장했다고 본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우리 스스로에 이런 통렬한 질문을 던져야 할 때다.
"불평등에 항거하기 위해 지펴진 200만 촛불의 광장은 과연 얼마나 평등했는가?" 덧붙이는 글 | 글쓴이는 '강남역 10번 출구' 활동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