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3.08 21:22최종 업데이트 23.03.08 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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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의 법고전 산책>(조국 지음)을 읽은 다양한 독자들이 '15권의 고전을 통해 바라본 한국사회와 민주주의', 그리고 '우리의 공동체와 삶'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이 글은 독후감 대회 대상 수상작입니다.[편집자말]
3년 정도 됐나 보다. 아이들이 많이 성장했으니 문화적 혜택을 누릴 수 있는 곳으로 이동해야겠다 싶어, 읍 단위에 있는 작은 아파트를 팔고 경기도의 소규모 도시로 이사를 했다. 아파트를 팔고도 전셋값이 부족해 있는 돈, 없는 돈 끌어모아 집을 얻었고 아프면 언제든지 병원에 달려갈 수 있는 혜택을 누리며 시내권에서의 새 생활을 시작했다.

부동산 가격이 오르네, 청약 경쟁이 치열하네, 주식을 사네 하는 얘기들을 듣고 산지는 오래됐지만 형편에 맞게 살 집만 있으면 그걸로 됐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던 터라 남들 얘기 따위는 개의치 않았다. 그런데 전세 계약이 만료될 즈음이 되니 아파트 매매가와 전세가가 고공행진을 하여 우리 가족은 갈 곳이 없어졌다.

드러난 내 안의 민낯
 

사진은 2022년 8월 29일 서울 송파구 롯데월드타워 전망대 서울스카이에서 바라본 서울 시내 아파트 단지 모습. ⓒ 연합뉴스

 
도급계약 문제로 회사와 집단소송을 제기했던 남편은 회사에도, 동료들에게도 정나미가 떨어져 살 수가 없다며 자포자기하듯 퇴사했던 상황이었으니 그 시절 나의 좌절감은 설명할 필요도 없다. 아파트 주민을 볼 때면 '저 이는 집주인일까, 세입자일까'가 궁금해졌고 집주인이라는 걸 알게 되면 분노가 치미는 증상이 생겼다.

부동산과 주식에 무지한 것이 세상의 부적응자로 느껴져 나 자신이 한없이 한심하게 느껴졌고, 나름 견고하다 자신했던 자신감과 자존감이 일순간에 무너졌다. 불면과 온갖 염증에 시달리며 스트레스에 익숙해진 채로 사는 동안 한없이 치솟던 부동산 가격이 하락하고, 주가가 떨어지는 시기가 도래했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잠시 세상을 비웃고, 허세 부리던 이들에게 코웃음 치고 나니 빈 껍데기 같은 나 자신에 대해 허무가 몰려왔다. 요동치는 부동산과 극성스러운 사교육 열풍 속에서 민낯을 드러냈던 나의 인격을 40대 중반에 이렇게 확인하게 될 줄 몰랐다. 주변 사람들이 세입자와 자가주택 소유자로 분리 처리되었던 인식 체계가 온전치 않은 건 분명하니까 말이다.

불공정한 사회가 개인의 인식과 감정을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는지 경험하면서 나는 정치, 사회, 제도의 문제가 내 삶을 규정하는 부분적인 문제가 아니라 내 삶의 바탕이자 기본이 되는 것임을 실감했다. 신뢰할 수 없는 정부와 그들이 추진하는 불공정한 제도 속에서 나의 불평은 불면과 주변인들에 대한 불화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으니, 내가 온전하려면 나의 근간이 온전해야 함을 비로소 깨닫게 된 것이다.

사실 '정치체제가 개인의 근간을 이루는 토대'라는 깨달음은 분노와 자괴감에 웅크리고 살았던 현실 경험으로부터 도출된 것이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듯 나 역시 불평등한 사회에서 겪는 불평과 분노를 우울과 무력함으로 받아들였고, 그들만의 정치 놀음에 침이나 뱉으면 뱉었지 관심 따위는 갖고 싶지도 않은 심정이었다.

그런 내가 진정한 시민의식을 고민할 수 있게 된 건 나의 인식과 감정에 파고든 <조국의 법고전 산책>이라는 책 덕분이다. 역사와 시대적 배경 속에서 민주주의와 관련된 고전을 정리하고 해석한 책이었는데, 그들만의 정치 놀음이라 비하했던 정치체제와 민주주의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어떻게 현재로 이어졌는지 기록되어 있었다.

진리를 탐구하는 학자도 아니었건만, 역사와 시대적 맥락 속에서 공화제가 태동하고 민주주의가 발전되어 온 과정을 보면서 포기할 수 없는 진리를 발견했다고 말해도 그리 과장된 표현은 아닐 것 같다. 내가 발견한 진리는 바로 '정치체제가 개인의 바탕을 이루는 토대'라는 명제이다.

책을 읽으며 해소된 궁금증도 있는데 그건 저자의 집필 의도에 대한 부분이었다. 고난의 한가운데 놓여 있는 저자의 상황을 알기에 그러한 와중에 집필한 책은 과연 어떤 책이고, 어떤 마음으로 집필했을지 몹시 궁금했다. 그런데 1장 <사회계약론>을 채 읽기도 전에 그냥 저자의 마음과 의도가 전해졌다.

길을 헤매는 종교인에게 성경이나 불경이 지표가 되듯 저자에게 법 고전은 정치인으로서, 학자로서 그리고 인간으로서 다양한 정체성을 성찰할 수 있는 지표가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저자의 등불인 법 고전이 나 같은 아무개에게도 등불이 될 수 있었던 건 저자의 명확한 관점과 탁월한 해석 덕분이라고 생각했다.

법이 하나의 문구로 완결되기까지 존재했던 논쟁들의 역사적인 맥락과 함의가 잘 설명되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 과정에서 나는 법이 사회적 규범 혹은 처벌의 기준으로 인식되는 수준을 넘어 개인의 가치관이나 삶의 태도를 고민하게 만드는 잣대가 될 수 있음을 깨달았다.

국가를 하나의 인격체로 보았던 철학자들의 고민에 유난히 공감하면서 나는 이 책을 통해 부모로서, 교사로서 그리고 한 인간으로서 나의 정체성을 고민할 수 있었다. 국가라는 인격체를 더욱 정의롭게 성장시켜가고자 했던 이들의 자취를 통해 나라는 인격체를 비추어보고, 그 논쟁 속에서 진정한 시민의식을 다져가는 여정을 시작했다.

내 삶에 개입하여 나를 튼튼히 세워줄 문장, 역사 속에서 치열하게 검증되었기에 내 인식의 근거가 되고 지표가 될 문장들을 새기며 사십 대 중반의 나이에 민주주의의 의미를 다시금 찾아가고자 한다.

내 인식의 지표가 될 문장들
 

조국의 법고전 산책 ⓒ 이은영

 
<조국의 법고전 산책>을 따라 시작된 첫 번째 인식은 국가와 법의 형성과 역할, 사회계약의 의미와 관련된 부분이다. 대학에 입학하고 급격하게 다른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되면서, 초중고 시기 동안 주입된 애국심은 한순간에 허상으로 돌변했다.

사회의 모든 현상이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와 부르주아 민주주의 한계라는 틀로 해석되니 사회계약론이나 의회민주주의 따위의 개념은 허울 좋은 껍데기에 불과하다 여겼다. 그러니 국가의 형성이나 법의 역할 등에 대한 인식과 고민이 진지했을 턱이 없고, 사회주의적 변혁을 지향하되 그 근거와 방법론이 구체적이었을 리가 없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렇다. 모든 시대는 맥락 속에서 해석되어야 하고 역사적 의의와 한계를 동시에 지니며 이어지는 것인데 당시의 나는 그 의의를 간과하고 한계에 대한 비난부터 배웠으니 말이다. 나는 루소의 <사회계약론>과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 밀의 <자유론>을 통해 국가와 법의 형성과 역할, 사회계약의 의미에 대해 알아갈 수 있었다.

장 자크 루소는 '인민의 자기 계약을 통한 권위와 국가의 형성'이라는 관념을 제시했다. 힘이 권리를 만들어서는 안 되며 오직 대등한 계약으로 구성된 합법적인 의무에만 복종할 의무가 있다는 것인데, 인민이 자유롭고 평등하게 계약을 해서 국가를 만들었기에 그 국가의 요구에 머리를 숙인다는 관념, 오직 합법적인 권력에만 복종할 의무가 있다는 관념으로 이어진다.

자유와 평등을 누리는 것이 나라를 만들고 법을 만드는 이유이며, 만인의 가장 큰 행복이 모든 입법체계의 목적이 되어야 하므로 국가의 합법적 폭력에 의하여 시민의 자유를 박탈당한다면 국가는 존재의 정당성이 없다는 논리이다.

나아가 입법의 힘은 항상 평등을 유지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어야 하므로 국가가 튼튼해지기를 바란다면 지위와 재산은 상당히 평등해야 한다고 말했다. 신분제의 사슬을 끊어내기도 전에 국가와 법이 지니는 권위의 토대와 그 목적에 대해 이렇게 서술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감격스러웠다.
 

<법의 정신> 몽테스키외 ⓒ 오마이북

 
몽테스키외는 '사람이 권력을 남용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는 사물의 본질에 따라 권력이 권력을 저지해야 한다'는 지론을 펼치며, 귀족이든 인민 집단이든 삼권분립이 안 된 권력을 갖게 되면 자유는 사라질 것임을 경고한다. 정치적 지론의 출발이 인간과 사물의 본질 혹은 추이에 대한 성찰로부터 비롯됨을 시종일관 확인하며 법 고전이 과거와 현재, 미래를 성찰하는 지표가 될 수 있음을 깨달았다.

특히 좋은 권력이냐, 나쁜 권력이냐와 상관없이 권력이 권력을 저지하도록 해야 한다는 통찰을 접하면서 '보수나 진보나 권력을 쥐면 다 똑같다'는 식의 의미 없는 빈정거림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못했던 우리의 인식 수준이 왜 그렇게 머물러 있었는지 성찰할 수도 있었다.

공화국의 덕성은 '평등에 대한 사랑'이며 참된 평등정신이 필요한 이유는 동등한 인간에게 복종하고 동등한 인간을 지배하도록 하는 데 있다는 몽테스키외의 언어는 행복론의 진정성을 의심 없이 받아들이게 해 주었다.

<조국의 법고전 산책>이 두 번째로 안내한 곳에는 서글픔과 무력함에 대한 조언이 있다. '인민은 폭정을 폭력으로 제거할 권리가 있다'는 존 로크, '권리 침해에 저항하는 것은 의무다'는 루돌프 폰 예링, '불의한 것이 당신에게 남에게 불의를 행하는 하수인이 되라고 강요하는 경우에는 법을 어기라!'라고 설파했던 소로의 말에 그 답이 있다.

철학자의 고뇌와 진리 탐구가 불의에 대한 저항에 닿아있다고 생각하니 내게는 이보다 더 강렬한 선동은 없을 것 같았다. 정부의 목적은 인류의 복지이며, 인민의 복지가 최고의 법이라는 기본적인 원칙은 내가 타인을 대상으로 하는 행위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는 원칙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상황과 조건을 불문하고 권위 없는 힘의 사용에 대한 진정한 치유책은 힘으로 대항하는 것이다. 권위 없이 힘을 사용하는 자는 항상 침략자일 뿐이다. 해악의 치료 시기를 놓쳤을 때 구제를 기대해보라고 말하는 것이나 노예가 된 다음에 자유를 지키라고 말할 수 없는 것처럼 저항권은 선제적으로 발동되어야 한다. 인간은 폭정으로부터 벗어날 권리뿐만 아니라 그것을 예방할 권리도 가지고 있다'는 말이 얼마나 명확히 다가오던지 로크의 말은 이후 중요한 순간마다 판단과 선택의 근거가 될 것 같다.

'법에 대한 존경심보다는 정의에 대한 존경심을 함양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소로의 말과 '권리 침해에 저항하는 것은 도덕적인 자기 보전의 명령이며 공동체에 대한 의무'라는 예링의 지론은 불의한 것에 저항할 수 있는 근거가 되며 인간으로서 지키고 가꾸어야 할 합당한 가치가 무엇인지 생각하게 만든다.

양보와 화해, 관용과 온유, 조정 등을 이유로 수없이 권리를 포기했던 상황들이 스쳐 간다. 나의 판단과 선택이 정의의 관문을 통과했을 때 비로소 온유와 관용의 가치가 온전히 실현될 수 있음을 되새겼다.

저자는 저항할 수 있는 용기를 주는 명확한 근거를 제시하는데 이것이 바로 <조국의 법고전 산책>이 주는 세 번째 무기이다. 저항권의 정당성 또는 사법부의 역할 및 사법 통제의 중요성에 대한 부분인데, 예링은 '사법살인'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법률의 수호자와 파수꾼이 살인자로 변할 수 있음을 경고했다.

국가와 사법이 특정 계급에 의해 장악되어 좌지우지되고 시민의 정당한 권리를 억압한다면, 그 불법은 이에 반발해 저질러진 시민의 불법보다 더 비난받아야 한다는 그의 말은 작금의 대한민국을 겨냥하는 말 같아 소름이 돋는 것 같았다.

로크 역시 무사 공평한 재판관에 의해 분쟁이 해결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고, 해밀턴은 사법부에 '법원의 완전한 독립'과 '입법적인 행위를 무효화하는 법원의 권한'이 주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헌법의 위반을 견제하는 것만이 목적이 아니라 편파적인 법률에 의해 재발할 수 있는 가혹함을 완화하고 제한하는 사법관의 확고함이 부각되는 것이 중요하다는 내용이다.

헌법의 기본권으로서 저항권의 인정, 위험심사 또는 사법 통제를 강조하는 제도가 이러한 논리로부터 시작되어 현대민주주의 체계의 근간을 이루게 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조국의 법고전 산책>을 통해 깨닫고 마음을 다지게 된 마지막 진리는 의견 개진과 토론, 진실을 향한 치열한 논쟁의 중요성이다. 밀은 진실과 허위가 자유롭고 공개적으로 대결할 때 진리가 확보될 수 있다는 '사상의 자유 시장' 이론을 제시하며 사상과 토론의 자유가 왜 필요하고 중요한지 강조했다.

진리와 정의의 이익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소수 의견자의 독설을 규제하기보다는 다수 의견자의 독설을 규제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통찰과 어떤 의견 표현을 침묵시키는 것의 해악은 전 인류의 권리를 강탈하는 것과 같다는 강력한 표현 속에서 그 중요성을 헤아릴 수 있었다.

'파벌의 존재는 인류의 본성에서 나오는 것이기에 없앨 수 없다. 오직 파벌의 영향을 조정하는 방법에 의해서 치료할 수밖에 없으며 다수의 전제를 막기 위해서는 더 많은 정당이 필요하다'고 갈파한 매디슨의 주장도 내게는 같은 맥락으로 다가왔다.

자신의 시좌에서 바라보는 견해의 한계는 다양한 입장과 소통하는 가운데 넓어질 수 있으며 이렇게 조정하고 통합해가는 과정 속에서 진리와 정의가 구현되는 것임을 그들은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인간의 본성과 한계에 대한 성찰이 다양성을 수용할 수 있는 겸손과 포용으로 이어지는 것임을 깨닫는다.

깨달음의 시대로 나아가는 길잡이

<조국의 법고전 산책>은 대한민국에서 여러 지위와 역할을 지니고 살아가는 나의 정체성을 고민하게 해주는 책이었다. 현대 민주주의 체계의 사상적 기초 속에서 국가와 개인, 권리와 의무, 자유와 평등이 어떻게 균형을 이루어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를 국가의 존재 이유와 목적 속에서 고민하게 안내해준 책이다.

이것이 '고전의 힘'이라는 것을 절감하며 '온몸을 던져 투표하라. 당신의 모든 역량을 던져라. 소수가 다수에게 고개를 숙일 때 가장 무력하다. 그렇지만 혼신을 다해 막을 때는 거역할 수 없는 힘을 갖게 된다'는 선각자의 말을 되새긴다.

명확한 견해로 용기 있게 집필한 이 책의 저자에게 경의를 표하며 진리를 향한 갈구가 험난한 시대를 살아가는 버팀목이 되기를 소망한다. 국가와 헌법을 자랑하고 싶은 날이 오기를 꿈꾸며, <조국의 법고전 산책>이 깨달음의 시대로 나아가는 길잡이가 될 수 있을 거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조국의 법고전 산책 - 열다섯 권의 고전, 그 사상가들을 만나다

조국 (지은이), 오마이북(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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