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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 다시 모인 조선어학회 구성원들. 1945년 11월 13일에 촬영된 사진에서 앞줄 왼쪽 두 번째가 이병기, 네 번째부터 이극로, 이희승, 정인승. 한 명 건너 정태진, 가장 오른쪽이 김윤경이다.
 해방 후 다시 모인 조선어학회 구성원들. 1945년 11월 13일에 촬영된 사진에서 앞줄 왼쪽 두 번째가 이병기, 네 번째부터 이극로, 이희승, 정인승. 한 명 건너 정태진, 가장 오른쪽이 김윤경이다.
ⓒ 한글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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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상이 정상화되다시피 한 시대에 양식과 지절을 지키며 90년을 산다는 것은 힘겨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대한제국-일제강점기-해방-미군정-남북분단-6·25 전쟁-이승만 독재-4월 혁명-박정희 쿠데타-유신 쿠데타-전두환 쿠데타-광주민주화운동-6월 항쟁'으로 이어지는 근현대사 1세기의 공간에서 그는 이 모든 풍파를 겪었다.

일제에 저항하여 옥살이를 하고, 이승만의 부정선거에 도전하여 교수단 선언문을 짓고, 유신체제에 반대하는 선언문에 서명하는 등 행동하는 지식인이고 시대의 양심이었다. 열여덟 살 때부터 뜻을 둔 국어 연구는 필생의 과제가 되고, 그가 편찬한 <국어대사전> 등은 겨레의 소중한 유산이다.

노령에 들어서도 연구를 멈추지 않았고, 많은 사람의 우러름을 받으면서도 교만하지 않았고, 역량과 업적이 쌓여도 노욕을 보이지 않았다. 다양한 분야의 사회활동으로 노익장을 과시했다. 1966~89년 현정회 이사장, 1970~87년 한국 글짓기지도회 회장, 1981년 3·1문화상 심사위원장, 광복회 고문, 1988년 한국어문교육 연구회 명예회장 등을 지냈다.

1953년 가을의 환도 후에도 선생의 맑고 깨끗한 생활에는 변함이 없었다. 특히 4·19와 5·16으로 이어지는 격동기에, "학생의 피에 보답하자"고 나섰던 교수 데모(1960년 4월 25일)에 앞장을 선 이후로, 80년대까지 줄곧 군사정권의 감시 아래 지냈었지만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었고, 이른바 '노추' 소리도 듣지 않으셨다. 그야말로 '대쪽같이 곧은 기개로 만인의 숭앙을 받았던 어른'이라는 말, 헛말이 아니었다. (주석 1)
1985년 6월 9일, 그는 9순(九旬)을 맞았다. 이화여전 출신 제자들을 비롯해 많은 후학이 찾아와 스승의 장수와 건강을 빌었다. 그러나 그는 구순 전인 1982년 2월과 1987년 7월에 수술을 받고, 1987년 12월에 부인과 사별하면서 부쩍 쇠약해졌다. 그리고 1989년 10월과 11월에 다시 수술을 받았다. 11월 27일, 병원에서 퇴원하던 날 오후 7시에 동숭동 자택에서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조용히 눈을 감았다. 향년 94세였다.

사회장과 국립묘지 안장이 논의되었으나 그의 유언에 따라 이는 실현되지 못하고 장례식은 조촐한 가족장으로 치러졌다. 그의 유해는 경기도 고양군 벽제면 문봉리 선영에 묻혔다. 12월 15일에 정부는 그에게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하고, 1993년 6월 1일에는 국가유공자증이 추증되었다.

"내가 아무래도 더 오래 못 살 것 같으니, 그동안 내가 생각해 오던 일을 이야기하겠네" 하시고는 학술상 기금을 비롯하여 여러 학회에도 상당한 액수의 연구 장려금을 희사하겠다고 하셨다. 이 말씀을 듣고 나는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선생은 평생 동안 근검절약을 생활신조로 하시어 일흔이 넘을 때까지 만원 버스만을 이용하고, 늘 다음과 같은 말씀을 입버릇처럼 하셨다.

분수에 넘치는 생활은 절대로 안 한다.
공짜로 재물을 탐내지 않는다. (주석 2)


장례식에서는 많은 제자와 지인들의 추도사와 추모사가 이어졌다. 그 가운데 일부를 소개한다.

"생님께서는 이 민족의 가장 어려운 시기에 이 땅에 오셔서 하루도 이 민족의 일을 걱정하시지 않을 날이 없으셨습니다. 긴 생애를 통하여 하루도 일신의 안일을 위하여 하신 일이 없으셨습니다. 저세상에서는 이 세상의 일을 모두 잊으시고 편히 쉬시기를 이 못난 제자 엎드려 비옵나이다." - 문하생 이기문 복배 (주석 3)

"업적만으로 스승이 되는 것은 아니다. 선생은 많지만 스승은 적다는 말도 있지 않는가. 그런데 선생께서는 이 시대 '마지막 선비'라는 말을 듣기에 스승으로 조금도 모자람이 없다. 조선어학회 사건 때 일제의 혹독한 고문에도 굽히지 않으신 꿋꿋한 지조, 한글파동과 4·19 때 불의에 항거하시던 결연한 자세 등은 이상적인 선비의 지조와 자세 그것이었다. 안분지족의 생활태도로 생겨난 선생의 일화는 알 만한 제자들은 모두 알고 있다. 선생께서는 선비가 갖추어야 할 덕목을 어느 것 하나 빼놓고 사신 적이 없으셨다." - 안병희, <겨레의 스승 일석 선생> (주석 4)

"한국 근세 격동기 1세기를 살면서 역사의 여울목마다 거센 파도와 맞싸우기를 피하지 않았던 선생이 팔순, 구순의 나이에도 변함없이 정의의 편에 서는 모습에 감탄을 금할 수 없다. 행동하는 학자로서, 따뜻하고 절도 있는 생활인으로서, 자신에게 겸허하고 냉철한 지성인으로서, 그러면서도 풍부한 낭만을 지닌 문필인으로서 숱한 업적과 작품과 전설을 남기고 간 선생은 참으로 멋진 '작은 거인'이다." - 김만옥, <'작은 거인' 일석의 자유언론 큰 뜻>(주석 5) 

"그분은 평생 동안, '삼불(三不)의 비애' 속에 살다 가셨다. 자신을 항상 '벙어리·장님·귀머거리'라고 자평하였던 것이다. 즉 '말하는 벙어리·보는 장님·귀머거리' 노릇으로 겨우 실낱같이 구명도생할 수 있겠노라고 자신의 마지막 수필집 <메아리 없는 넋두리>에서 그분은 나지막하게 술희하고 있다.

과연 그분은 그토록 부족했던가. 아니다.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그리도 혹독했던 시련의 세월을 고고하게 살아온 자신의 위대한 영혼, 깨어 있는 지고한 시대정신의 명징성을 역설적으로 극명히 드러냈다고 판단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즉 그분은 행동하지 않을 수 없는 지성인의 귀감을 몸소 여지없이 보여 주셨던 것이다." - 김문장, <일석, 겨레의 스승>(주석 6)


주석
1> 강신항, <겨레의 큰 스승 일석 선생>, <회고록>, 251~252쪽.
2> 위의 책, 253쪽.
3> 서울대 국문과 동창회보 <새소식> 7호, 1990, 3기.
4> <딸깍발이 선비>, 505~506쪽.
5> <한겨레>, 1989. 12. 12.
6> <어문연구>, 65·66 합병호, 1990. 7. 31.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딸깍발이 선비 이희승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이희승, #이희승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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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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