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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2회 충북 향토문화 학술대회
제22회 충북 향토문화 학술대회 ⓒ 이상기

제22회 충북 향토문화 학술대회가 지난 9월 11일과 12일 이틀 동안 충북 옥천에서 열렸다. 학술대회도 열어야 하고 숙박도 해야 하는데 옥천 읍내에는 그 정도 되는 호텔이 없어 대회장이 군서면 장령산 휴양림이 되었다고 한다. 그곳에 가기 위해 지도와 자료를 찾아보니 장룡산 휴양림으로 되어 있다. 그동안 장룡산이라고 했는데 사료조사를 해 보니 장령산이 맞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 옥천에서는 이름을 장령산으로 바꾸는 작업을 하고 있다고 한다.

경부고속도로 옥천 나들목을 나오니 곳곳에 학술대회장으로 가는 입간판이 세워져 있다. 군서면 장령산은 옥천에서 금산으로 이어지는 37번 국도를 타고 가다 군서면 소재지를 지나 좌회전 해 금천계곡을 따라 올라가면 나온다. 금천은 군서면에서 서화천과 합쳐져 금강으로 흘러 들어간다. 계곡을 따라 올라가면서 보니 수량이 만만치 않다. 금년에는 비가 많이 와 모든 골짜기에 물이 풍부한 편이다.

 장령산 휴양림
장령산 휴양림 ⓒ 이상기

장령산 휴양림에 진입하니 학술대회 플래카드가 걸려 있다. 이번 학술대회의 주제는 '충북 토산물의 활용'이다. 충북의 12개 향토사 단체에서 자기 고장의 토산물을 소개하고 그것의 활용방안을 발표하는 자리다. 대회장에 들어가니 120명쯤 되는 회원이 벌써 자리하고 있다. 시간이 되자 30명쯤 더 들어와 참가인원이 150명쯤 되고 대회가 시작된다.

이번 학술대회는 첫째 날의 주제발표와 둘째 날의 문화유산 답사로 이루어져 있다. 물론 첫날 주제발표 후 회원간 친목을 도모하기 위해 공연과 화합의 장이 마련되어 있다. 원래 배움은 즐거움이 동반되어야 지속성이 있고 오래 남는 것이다. 또 한 가지, 대회에 꼭 있는 것이 개회식이다. 이때는 늘 자치단체의 장이나 유지들이 나와 한 마디 하고는 한다. 그런데 그들은 대개 인사만 하고 가는 경향이 있다.

관산성이 바로 옥천에 있습니다

 옥천에 분포되어있는 산성
옥천에 분포되어있는 산성 ⓒ 이상기

개회식이 끝나고 시‧군 연구단체의 주제발표가 있기 전, 산성 전문가인 충북대 차용걸 교수가 '관산성 전투의 재조명'이라는 특강을 한다. 원고는 있지만 차 교수는 PPT 위주로 강연을 한다. 파워포인트라는 것이 대중을 상대로 하는 강연에는 효과가 있다. 우선 시각과 청각을 동원하니 주목을 끌 수 있고, 생각과 논리는 말로 보충하면 되기 때문이다.

강연의 핵심은 관산성이 옥천에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관산성 전투가 백제와 신라의 명운을 건 한판 싸움이었다는 사실이다. 싸움을 먼저 건 쪽은 신라였다. 500년 전후 신라가 백제 영토인 금강 서쪽 지금의 옥천읍까지 진출, 거점을 마련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501년 백제 동성왕은 신라군을 저지하기 위해 탄현(옥천 군서면 오동리)에 목책을 설치한다. 이후 50년간 백제는 무령왕과 성왕을 거치면서 국력을 키운다. 그리고 554년 백제 성왕은 금강변에서 신라와 한판 승부를 겨룬다.

백제의 왕자 여창(餘昌)이 선봉에 선다. <일본서기>에 보면 백제군이 함산성(函山城)을 점령하고 구타모라(久陀牟羅)에 요새를 마련한다. 그러고는 금강을 넘어 지금의 옥천군 이원면 지탄리와 심천면 경계까지 진출한 것 같다. 이에 아버지인 성왕은 아들을 지원하기 위해 4명의 좌평과 함께 3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몸소 지금의 옥천 지역까지 원정을 나선다.

그런데 성왕은 이곳 관산성에서 매복하고 있던 신라군에 사로잡혀 최후를 맞는다. 관산성은 대전과 군서면 지역에서 옥천으로 넘어가는 길목에 있는 산성이다. 현재 관산성에서 서산성까지 산줄기가 동북으로 흘러가는데 그 중 어느 곳으로 추정된다. 현재 차용걸 교수도 관산성을 정확히 비정하지는 못하고 있다. 그것은 사서의 기록이 너무 적고 과거의 지명과 현재의 지명이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서 속에 나오는 관산성 전투

 옥천의 산성: 5번 서산성, 8번 삼거리토성, 8번 삼양리토성, 15번 관산성
옥천의 산성: 5번 서산성, 8번 삼거리토성, 8번 삼양리토성, 15번 관산성 ⓒ 이상기

삼국시대를 다룬 사서로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있다. 그 중 정사는 <삼국사기>뿐이다. 일반적으로 삼국시대 논문은 <삼국사기>를 토대로 과거의 역사를 재구성하고, 그것이 부족하면 중국의 사서나 일본의 사서를 참고한다. 관산성 전투와 관련된 기록은 <삼국사기>에 세 군데 나온다. 「신라 본기」 진흥왕조와 「백제본기」성왕조에 나온다. 그리고 「열전」 김유신조에 나온다.

「신라 본기」의 기록에 따르면 백제의 성왕은 가야(加良)와 함께 신라의 관산성을 공격한다. 신라는 군주(軍主)인 각간(角干) 우덕(于德)과 이찬(伊湌) 탐지(耽知) 등이 맞아 싸웠으나 세가 불리해졌다. 이에 신라의 신주(新州) 군주 김무력(金武力)이 그 지역 군사를 이끌고 와 교전을 벌이게 되었다. 그때 비장(裨將)이던 삼년산군 고간(高干) 도도(都刀)가 급히 백제군을 공격하여 백제왕을 살해했다. 그 결과 신라군의 사기가 올라 좌평 4인과 사졸 29,600명을 죽이는 큰 전과를 기록했다.

이에 비해 「백제본기」는 전투상황보다는 성왕이 구천에서 죽었다는 내용을 간단하게 전하고 있다. 성왕이 신라를 공격하고자 하여 몸소 보기(步騎) 50을 이끌고 밤에 구천(狗川)에 이르렀다. 신라가 복병을 내어 더불어 싸우다가 어지러운 가운데 죽임을 당하였다. 시호를 성왕이라 했다.

또 다른 사서인 <일본서기>는 관산성 전투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백제 성왕의 왕자인 여창(餘昌)이 신라로 들어가 구타모라(久陀牟羅)에 요새를 마련한다. 이에 성왕이 아들을 위로하기 위하여 신하들과 함께 금강변까지 간다. 이에 신라에서는 나라 안의 모든 병력을 총동원하여 길을 막고 백제군과 맞선다. 그 결과 성왕이 사로잡혀 참수 당한다. 왕자인 여창(餘昌)은 원병인 왜군(倭軍)의 도움으로 간신히 살아 돌아온다.

옥천 향토사연구회, 정말 애 많이 썼네

 민요 부르기
민요 부르기 ⓒ 이상기

학술발표는 시‧군별로 이루어졌다. 모두 12편의 논문이 제출되었는데, 이날 발표는 9명이 했다. 서원 향토사연구회 전호수 선생은 사서에 근거해서 토산물에 대한 포괄적인 얘기를 했다. 보은향토문화연구회의 정유훈 선생은 대추에 대해 얘기했고, 단양 향토문화연구회의 유지상 회장은 마늘에 대해 얘기했다. 그리고 주최측인 옥천 향토사연구회의 손채화 선생은 옻의 활용방안을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학술발표가 끝나고 만찬이 이어졌다. 회원들은 장령산휴양림 산림문화관 2층에 마련된 식당에서 식사를 한다. 그리고 8시부터 회원들을 대상으로 한 공연 및 회합의 장이 마련되었다. 공연은 노래와 춤 그리고 악기 연주로 이루어졌다. 먼저 옥천군 민요연구회 팀이 우리 전통 가락을 노래한다. 요즘 각 지방에는 우리 민요를 배우고 가르치는 사람들이 있어 창의 수준이 대단히 높아졌다.

이어 옥천과 제천에서 각각 춤을 선보인다. 옥천의 남자춤은 춤사위가 비교적 느린 편이다. 그에 비해 제천의 부채춤은 춤사위가 빠르고 움직임이 상대적으로 역동적이다. 춤에 이어 노래가 이어진다. 이 고장 시인 정지용의 '향수'를 성악 버전으로 부른다. 요즘 '향수'는 한국 사람들이 가장 즐겨 부르는 가곡이 되었다.

 섹스폰 연주
섹스폰 연주 ⓒ 이상기

또 이곳 옥천 섹스폰동호회에서 음악을 연주한다. 아주 어린 학생에서부터 노년층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회원이라고 하는데, 그 수준이 꽤나 높은 편이다. 이들은 옥천에서 이루어지는 행사에 늘 초대받는 인기 단체라고 한다. 이들 공연 후 회원들간 친목 도모를 위해 노래자랑이 이어진다. 학술발표 후 이루어진 저녁행사는 두 시간이 넘게 계속되었다.

하나의 학술대회를 기획하고 치르려면 정말 많은 사람들의 노력이 필요하다. 논문집을 만드는 일, 행사를 진행하는 일이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또 이번 학술대회는 이틀 내내 비가 와 외적인 여건도 그렇게 좋은 편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옥천 향토사연구회 회원들의 노력으로 정말 좋은 학술대회가 될 수 있었다. 첫날의 학술대회는 물론이고 둘째 날의 문화유산 답사도 좋은 체험이었다.

사실 옥천에는 내세울만한 문화유산이 별로 없다. 보물이 용암사 쌍삼층석탑 하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튿날 문화유산 답사도 장계 시문학공원, 정지용문학관, 정지용 생가, 육영수 여사 생가로 구성되었다. 그렇지만 이들 유적지가 현대사인물 중심이어서 오히려 회원들이 친근함을 느낄 수 있었던 것 같다. 이들이 우리와 같이 20세기를 살다 간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번 답사를 통해 옥천은 이제, 현대사의 무게 중심이 육영수 여사에서 정지용 시인으로 완전히 넘어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덧붙이는 글 | 충북 옥천에서 열린 제22회 충북향토문화 학술대회에 참여한 것을 계기로 3회에 걸쳐 옥천의 역사, 토산물, 인물을 다룰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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