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정지용 위주의 향토유적지 답사
학술대회(9월 11일~12일)가 끝나고 밤늦게 잠을 청한다. 그런데 잠이 안 온다. 비가 세차게 와서 내일의 향토유적지 답사가 걱정되기 때문이다. 금년에는 주말마다 비가 와 단체들이 행사를 치르느라 애를 많이 먹은 편이다. 새벽에 비가 오지 않으면 장령산 너머에 있는 용암사도 한 번 가볼 생각을 한다. 그곳은 옥천에서 역사가 가장 오랜 절이고, 문화유산이 가장 많은 절이다. 용암사의 문화유산으로는 쌍삼층석탑, 마애불, 목조 아미타여래좌상이 유명하다.
내일의 향토유적지 답사는 장계 시문학공원, 향토전시관, 정지용 생가, 정지용 문학관, 육영수여사 생가 순으로 진행될 예정이다. 아침에 눈을 뜨니 비가 계속 내린다. 밤새 장령산 휴양림 앞 금천의 물이 불어 앞으로는 건널 수가 없다. 우리는 마을 쪽으로 난 길을 따라 내려와 다리를 건넌 다음 군서면 소재지로 나온다. 우리는 옥천읍사무소에 차를 주차시키고 관광버스에 올라 장계 시문학공원으로 향한다.
장계시문학공원 입구에서 공원 안으로 들어가는 길가 벽을 보니 온통 정지용 시인의 시다. 시와 함께 그림이 그려져 있어 시화전을 보는 기분이다. 공원의 중심광장에 이르니 정지용의 '멋진 신세계'가 눈에 들어온다. 영어로는 'Brave Modern World'라고 써 놓았다. 붉은색과 검은색 철제구조물이 강렬한 인상을 준다. 이곳에는 원래 옥천 향토전시관이 있고, 놀이공원이 있었다. 그런데 정지용 시인이 복권되면서 공원의 중심이 정지용 시문학공원으로 바뀐 것이다.
그래서 이곳에 모단 가게가 들어서고, 정지용 시비가 만들어지고, 정지용문학상 시비가 들어섰다. 모단 가게에서는 사진과 공예품, 책 등이 팔린다. 비가 와서인지 사람이 별로 없는 편이다. 가게 관리인에게 물으니 평상시에도 사람이 그렇게 많지는 않다고 한다. 이곳 정지용 시문학공원에는 금강변을 따라 시비가 서 있기 때문에, 모단 가게에서 강 쪽으로 내려간 다음 강변을 따라 한 바퀴 돌도록 되어 있다.
장계 시문학공원에서 만난 지용강변으로 내려가면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조형물이 '책과 독자'다. 열 권의 책이 쌓여 있는데 책 제목을 보니 국문학 4권, 영문학 3권, 러시아문학 1권, 일본문학 1권, 중국문학 1권이다. 우리 문학에는 박경리의 <토지>, 김수영의 <거대한 뿌리>, <정지용문학상 시비> 이희승의 <국어대사전>이 있다. 이들 책의 선정 근거가 뭔지는 모르지만, 조금은 주관적인 편이다.
책 앞에는 지적인 여인이 앉아 '오월소식(五月消息)'을 전하고 있다. 1927년 6월 <조선지광>제68호에 실린 시다. 이 시에는 서경적 사실주의와 서정적 낭만주의의 토대 위에 언어적 모더니즘이 실려 있다. 어떤 학자는 이 시를 교토로 유학을 떠난 정지용이 강화도의 여선생을 그리워하며 썼다고 한다.
梧桐(오동)나무 꽃으로 불밝힌 이곳 첫여름이 그립지 아니한가?어린 나그네 꿈이 시시로 파랑새가 되여오려니.나무 밑으로 가나 책상 턱에 이마를 고일 때나,네가 남기고 간 記憶(기억)만이 소근 소근거리는구나.모초롬만에 날러온 소식에 반가운 마음이 울렁거리여가여운 글자마다 먼 黃海(황해)가 남설거리나니....…나는 갈매기 같은 종선을 한창 치달리고 있다…快活(쾌활)한 五月(오월)넥타이가 내처 난데없는 順風(순풍)이 되여,하늘과 딱닿은 푸른 물결우에 솟은,외따른 섬 로만팈을 찾어갈가나.일본말과 아라비아 글씨를 아르키러간쬐그만 이 페스탈로치야, 꾀꼬리 같은 선생님 이야,날마다 밤마다 섬둘레가 근심스런 風浪(풍랑)에 씹히는가 하노니,은은히 밀려 오는듯 머얼미 우는 오ㄹ간 소리....
다시 몇 편의 시와 조형물을 지나니 이번에는 정지용문학상 시비가 보인다. 이 시비를 만든 커뮤니티 디자인 연구소는 작품의 의도를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하나의 큰 바위를 다섯 개의 공간으로 분절하였습니다. 각각의 공간에는 시가 디스플레이 되며, 공간과 공간 사이에 금강이 위치하게 하였습니다. 이로써 시는 자연으로 속하게 되며, 금강과 함께 흐르게 됩니다." 이들 다섯 개의 바위조각 중 하나가 '정지용문학상 시비'라는 표지석이 되었고, 다른 네 조각이 시비가 되었다. 그 중 가장 앞에 제1회 정지용문학상을 받은 박두진의 '서한체(書翰體)'가 새겨져 있다. 이 시는 '노래해다오. 다시는 부르지 않을 노래로 노래해다오. 단 한 번만 부르고 싶은 노래로 노래해다오'로 이어진다.
박두진은 1939년 6월 <문장>에 '향현(香現)'과 '묘지송'을 발표하면서 시인이 되었다. 당시 박두진을 추천한 사람은 정지용이었다. 그런 인연 때문인지 박두진 시인은 1989년 5월 11일 제1회 정지용문학상을 받는다. 사실 당시 박두진은 시단의 원로로 이 상을 받기에는 너무 나이가 많았기(74세) 때문이다.
이들 시 조형물 옆으로는 정지용문학상을 받은 다른 모양의 시조형물들이 몇 개 세워져 있다. 여기서 조금 더 가자 이번에는 유리판에 시를 새겨 넣었다. 조금 더 가자 이번에는 구멍 뚫린 정육면체에 시를 새겼다. 다시 조금 더 가자 이번에는 네 개의 금속판을 세우고, 그곳에 정지용문학상 수상자 네 명의 시를 각각 새겨 넣었다. 이들 수상자는 이수익, 오탁번, 김초혜, 이시영이다.
향토전시관에서 만난 과거의 인물
장계 시문학공원에는 이러한 시비 외에 볼거리가 또 하나 있다. 향토전시관이다. 이곳에는 옥천의 역사와 민속자료, 생업과 관련된 물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1층에는 선사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유물과 고문서 등이 전시되어 있다. 지하에는 물레와 베틀 등 민속자료와 생활용품이 전시되어 있다. 그리고 2층에는 옥천의 인물이 사진자료를 통해 소개되고 있다.
옥천이 내세우는 대표적인 인물로는 조선 전기의 백촌 김문기, 조선 중기의 중봉 조헌, 조선 중후기의 우암 송시열이 있다. 그리고 현대의 인물로는 육영수 여사가 있다. 백촌과 우암은 옥천에서 태어났고, 중봉은 옥천에 은거하며 후학을 가르쳤다. 백촌 김문기는 단종과 세조때 함길도 병마절제사와 병조판서를 지낸 분으로, 1977년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사칠신으로 추증되었다. 이 결정으로 지금까지도 사육신에 대한 논란이 분분하다.
중봉 조헌은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킨 분으로 유명하다. 보은현감을 지낸 다음 옥천 율티에 후율정사를 짓고 학문을 가르쳤다. 그는 1592년 왜군이 침공하자 의병을 일으켜 금산전투에 참가해 순절했다. 우암 송시열은 옥천 구룡촌에서 태어나 좌의정까지 지낸 정치가이다. 그는 정치적인 소신이 뚜렷해 노론의 영수가 되었으며, 소론·남인과 대립하였다. 효종의 묘정에 배향되었고, 후학들에 의해 <송자대전>이 편찬되었다.
육영수 여사는 1925년 옥천읍 교동리에서 태어나 죽향국민학교를 졸업하였다. 집안이 부유하고 공부를 잘 했기 때문에 서울의 배화여고를 다녔고, 졸업 후 옥천여중 교사를 했다. 1950년 6·25사변 때 부산으로 피난 갔다 박정희 중령을 만나 결혼했다. 1961년 5·16혁명의 성공으로 박정희 소장이 대통령이 되어 영부인이 되었다. 그러나 1974년 8월 15일 문세광에게 피격되어 사망했다. 그녀는 모범적인 영부인으로 또 전형적인 한국의 어머니로 평가받고 있다.
육영수 여사 생가에서 들은 이야기
장계 시문학공원과 향토전시관을 보고 찾아간 곳은 교동리에 있는 육영수 여사 생가다. 그곳에 가니 문화해설사가 우리를 안내한다. 우리는 대문을 지나 사랑채로 들어선다. 비도 오고 육영수 여사 생가 설명도 들어야 하기 때문에 우리는 사랑채 마루를 통해 방안으로 들어가 앉는다. 이 집은 원래 조선시대 정승을 지낸 분들의 집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육영수 여사의 아버지인 육종관 씨가 청산면에서 옥천읍으로 이사를 오면서 구입했다고 한다.
당시 육종관 씨는 부자였기 때문에 집뿐 아니라 인근의 농지까지도 소유했다고 한다. 육종관씨는 당시 작은 부인을 한 집에 거느릴 정도로 위세가 대단했다고 한다. 그런데 피난지인 부산에서 육영수 여사가 사촌오빠의 소개로 박정희 대통령을 만나 결혼을 하게 된다. 그러나 이것이 박정희 중령에게는 두 번째 결혼이었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육종관 씨는 박정희 중령을 사위로 인정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육종관 씨는 사위가 대통령이 되었음에도 청와대를 한 번도 가지 않았다는 것이다.
육영수 여사 생가는 대지가 대단히 넓고 기와집도 여러 채 있는 대가집이다. 최근에 건물을 새롭게 보수해서인지 전통적인 고가의 분위기는 느낄 수 없지만, 짜임새가 있는 편이다. 크게 사랑채, 안채, 별채 그리고 사당으로 이루어져 있다. 별채와 사당 사이에는 후원이 있는데 그 공간도 대단히 넓은 편이다. 집 뒤로는 아늑하게 산이 감싸고 있고, 집 앞으로는 논이 펼쳐져 있다.
전체적으로 명당에 자리 잡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안채로 들어가 육영수 여사가 태어난 안방에 들어가 본다. 지금은 문살도 바꾸고 장판과 도배를 새롭게 해서인지 아늑한 맛은 없는 편이다. 고가에 보면 벽이나 기둥 또는 서까래에 현판이나 중건기, 상량문 등이 있는데 그런 것도 전혀 찾을 수가 없다. 보수와 수리라는 이름으로 역사와 온기를 뺏은 것 같다. 생가나 고가를 복원하면서 저지르는 잘못을 여기서도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