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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게만 느껴졌던 복지 문제가 어느새 한국 사회의 중심 화두가 됐습니다. 삶의 질을 어떻게 높일 것인가 하는 것은 앞으로 치러질 각종 선거에서도 중요한 문제가 될 전망입니다. <오마이뉴스>는 복지 제도를 먼저 구축한 유럽과 미국의 경험을 살펴 한국 사회 복지 논쟁의 폭을 넓히고자 합니다. 이를 위해 <오마이뉴스>는 외국에 거주하는 해외통신원들의 글을 연재합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 편집자말
 연극 상연을 앞둔 파리의 한 극장.
연극 상연을 앞둔 파리의 한 극장. ⓒ 한경미

'예술의 나라'답게 프랑스에는 예술인들을 위한 복지정책이 따로 수립되어 있다. 이 중 가장 특이한 것이 엥테르미땅 제도인데, 엥테르미땅은 일의 성격상 간헐적으로 일을 할 수밖에 없는 예술인을 지칭하는 말이다. 배우, 가수, 연출자, 영화감독 등 뿐만 아니라 편집인, 음향·조명 기술자, 미용사, 분장사 등 모든 종류의 예술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이에 해당된다. 이들이 하나의 일을 마치고 새로운 일을 다시 찾기까지 비어 있는 기간, 즉 일하지 않는 기간 동안에 실업수당을 지급하는 것이 엥테르미땅 제도이다.

엥테르미땅 실업수당을 받으려면 전년도 10개월 동안 507시간을 일해야 한다. 이 조건을 충족하면 8개월 동안 실업수당을 받게 된다. 하루 8시간을 일한다고 가정하면 507시간은 약 3개월에 해당하는 기간이다. 출산휴가(16주로 보통 출산 전에 6주, 출산 후에 10주를 이용한다), 입양휴가, 업무사고로 인한 병가(단지 이 경우 하루 노동시간은 5시간으로 계산된다)와 실업보험에 의해 무료로 이루어지는 연수기간(1년에 최대 338시간), 예술인들이 정식 교육기관에서 강의를 하는 시간(1년에 최대 55시간) 등도 이 507시간에 포함된다.

이 중 입양휴가 기간은 자녀의 수 및 입양할 아이의 수에 따라 달라진다. 프랑스 노동법에 따르면, 아이가 없거나 하나 있는 부모가 아이 한 명을 입양하면 10주, 이미 두 명의 아이가 있는 부모가 한 아이를 입양하면 18주, 아이 둘 이상을 입양하면 22주의 입양휴가를 받을 수 있다.

비정규직 예술인들의 노동 조건은 일반 비정규직과 몇 가지 점에서 차이가 있다. 비정규직 예술인들은 ▲ 계약을 무한정 연장할 수 있고 ▲ 불안정 직업 수당이 없는 대신, 변상유예기간(일반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일이 없을 때 사회보장 혜택을 받을 수 없는 것을 말함)이 없어 계약과 계약 사이에도 사회보장 혜택을 받을 수 있다.

여기서 불안정 직업 수당이란 소득이 불안정한 비정규직에게 정부가 지급하는 보조금을 말한다. 프랑스 정부는 1990년 7월 불안정 직업 수당을 법으로 규정했다(노동법 L 1243-10). 처음에는 월급의 6%였던 불안정 직업 수당은 2007년 1월에 월급의 10%로 늘었으며, 보통 마지막으로 일하는 달에 한꺼번에 지급한다.

세계에서 유일한 엥테르미땅 실업수당의 역사

프랑스에서 엥테르미땅 실업수당이 만들어진 것은 1936년으로 당시 막 기지개를 켜기 시작한 영화산업에 종사하는 이들을 돕기 위해 레옹 블룸 인민전선 정부가 고안한 아이디어이다. 이것은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유일한 정책으로, 1936년 당시에는 영화 간부(영화감독과 연출자 등)와 기술자들만이 혜택을 누렸다. 영화배우나 가수 등 영화·방송산업에 종사하는 다른 예술인들은 1965년부터 이 혜택을 누릴 수 있게 됐고, 연극에 종사하는 이들에게까지 혜택이 돌아가게 된 것은 1968년부터다.

이렇게 오랜 기간 동안 예술인을 도와온 실업수당이 있었기에 많은 예술인들은 생계 문제에 구속받지 않고 예술 활동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 프랑스가 예술의 나라로 입지를 굳힌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오랜 무명 시절을 거쳐 뒤늦게 가치를 인정받은 예술인들은 거의 이 실업수당의 혜택을 받았기에 나중에 빛을 볼 수 있게 됐다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다.

전년도 10개월간 507시간의 노동 경력만 채우면 8개월 동안 실업수당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은 한국 현실에 비하면 꿈과 같은 일일 것이다. 엥테르미땅 제도의 혜택을 누리는 프랑스 예술인들은 이 기간 동안 생계 걱정 없이 새로운 에너지를 충전해 다시 새로운 창작 활동에 임한다.

2009년에 엥테르미땅 실업수당을 받은 예술인은 10만 5826명이고, 이들이 받은 실업수당 총액은 12억 7600만 유로다. 즉 1인당 한 달에 1000유로(약 160만 원) 정도를 받은 셈이다. 일반 실업수당(월 1200유로, 약 190만 원)과 큰 차이가 나지 않는 금액이다.

또한 엥테르미땅의 유급휴가 제도를 보완하기 위해 1939년 창설된 스펙터클 휴가 기금도 있다. 매번 계약을 맺을 때마다 고용주가 부담해 휴가 기금을 모아두었다가 신청하는 사람에게 1년에 한 번씩, 휴가 15일 전에 지급하는 방식이다. 휴가일수는 그해 며칠 일했는지에 따라 달라지는데, 휴가비용은 대략 한 달 치 월급 정도다.

현행 엥테르미땅 제도의 문제점

그러나 불어의 표현대로 모든 메달에는 앞뒤가 있듯이 엥테르미땅 실업수당에도 허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영화 촬영 장면.
영화 촬영 장면. ⓒ www.fr.wikipedia.org
우선 엥테르미땅 실업수당을 받는 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507시간을 채우는 것이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한 통계에 따르면, 프랑스 예술인의 45%가 한 해에 550시간 미만을 일한다고 한다. 특히 학교를 갓 마친 초보자의 경우 507시간을 채우기가 더욱 힘들다. 또한 전년도 10개월에 507노동시간을 채우지 못한 예술인들은 아무런 혜택도 받을 수 없는 것도 문제다.

월급에서 실업수당으로 공제되는 금액보다 엥테르미땅 실업수당으로 나가는 돈이 더 많은 것도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2009년 예술인들 및 이들의 고용인들이 실업수당으로 할당한 금액은 2억 2300만 유로였다. 그런데 엥테르미땅 실업수당으로 지급된 금액은 12억 7600만 유로였다. 결국 그 차액인 10억 5400만 유로는 다른 노동자들의 실업수당에서 충당된 셈이다.

이 차이를 줄이기 위해 엥테르미땅 실업수당을 받을 수 있는 조건이 점점 까다로워지고 있다. 기준 노동시간이 2003년까지는 '전년도 12개월에 507시간'이었으나, 그 후 '전년도 10개월에 507시간'으로 바뀐 것도 이와 관련 있다. 이 새로운 계산 방식으로 인해 많은 예술인들이 수혜 대상에서 제외됐다.

노동시간 계산에도 문제점이 있다. 예를 들어 연출가가 3주 동안 심혈을 기울여 어떤 공연을 준비했더라도 그 공연이 열흘 동안 이루어졌다면, 이 연출가는 3주가 아닌 열흘 동안만 일한 것으로 계산된다. 또한 공연·예술 이외 부문에서 일한 것(예를 들면 방학 때 시골에서 열리는 여름학교에 도시 아이들과 함께 간 경우)도 시간 계산에서 제외된다.

비정규직이기에 지위가 불안정하다는 점도 예술인들을 괴롭히는 요소다. 노동시간을 늘리면서 연장근로수당을 지급하지 않는 고용주 등 비정규직 예술인들의 불안정한 지위를 악용하는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비정규직 예술인들은 고용주 맘에 들지 않으면 갑자기 해고될 수도 있다. 계약서를 쓰고 일을 시작했어도 현장에서 실제로 이런 식의 부당한 해고가 수시로 이루어지고 있는 형편이다.

그 이외에도 2008년 2월 엥테르미땅 실업수당이 1년 늦게 지급되는가 하면, 존재하지 않는 사람에게 수당이 지급되기도 하는 등 여러 가지 운영상 허점도 지적되고 있다.

한국에 엥테르미땅 같은 제도가 있었다면...

그러나 이런 허점에도 불구하고 예술인을 배려하는 프랑스의 복지정책은 한국 정부가 본받아야 할 일이다. 한국에 이런 복지 제도가 갖춰져 있었다면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예술을 포기하는 이도, 예술을 포기하지 못해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이도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최고은이라는 젊은 영화인이 생활고 및 병마와 싸우다 숨지는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32세의 연출가 겸 시나리오 작가였던 최씨가 세상을 떠나기 전 남긴 "죄송해서 몇 번을 망설였는데... 저 쌀이나 김치를 조금만 더 얻을 수 없을까요"라는 쪽지를 우리는 잊지 않고 있다.

 시나리오 작가 고 최고은씨가 송모씨의 집 출입문에 붙인 쪽지.
시나리오 작가 고 최고은씨가 송모씨의 집 출입문에 붙인 쪽지. ⓒ <민중의 소리> 제공


#복지#실업수당#예술가#엥테르미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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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가, 자유기고가, 시네아스트 활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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