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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20세기 초 중국의 역사를 바꿔놓은 중국 공산당 홍군의 '대장정'이 끝난지 70년 되는 해이다. 지금 중국에서는 대장정 승리 70주년을 기념해 다양한 기획이 진행되고 있다. 이를 맞아 오마이뉴스 조창완 통신원은 3회에 걸쳐 자신이 그간 다녔던 장정로의 회고를 통해 장정의 의미와 더불어 중국 공산당의 변화를 점검해 본다. 특히 중국 공산당 운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우리 선조들의 흔적도 살펴볼 계획이다. <편집자주>
▲ 장정의 시작점이자 중요한 소비에트 중 하나인 위두 혁명열사 기념비.
ⓒ 조창완
ⓒ 오마이뉴스 한은희

한국임시정부와 중국공산당의 초기 역사는 재미있게 닮아있다.

1921년 7월 23일 처음으로 열린 중국공산당 1차 회의의 장소는 상하이 보경리 4호 우리 임시정부 청사에서 불과 100m 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이들은 경찰이 온다는 말에 지아싱 난후로 자리를 옮겨 배 위에서 회의를 끝냈다. 그런데 나중에 우리 임시정부도 난후의 배 위에서 회의를 해 새로운 피난길을 떠나게 된다. 인연치고는 좀 이상한 인연이다.

이렇게 시작한 중국 공산당은 1차 국공합작과 파경 등 다양한 곡절을 거치면서 발전과 후퇴를 거듭한다. 광동코뮌(1927년 광둥서 일어난 공산당 봉기), 난창봉기(1928년 지앙시 난창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주더(朱德)와 마오쩌둥이 만나게 되는 시초) 등 굵직한 사건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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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창 봉기기념탑. 이 봉기를 통해 홍군이 탄생하게 된다.
ⓒ 조창완
그런 가운데 도시의 공산주의 운동은 소멸되어 가는 반면에 마오쩌둥이 이끄는 공농홍군(工農紅軍)은 발전을 거듭한다. 결국 국민당은 공산당이 이끄는 소비에트들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시작하고, 특히 지앙시·후난 등지에 있는 소비에트 들에 대한 공세를 시작한다.

중국 공농홍군의 예봉이 꺾이고 위기감이 일기 시작한다. 이에 따라 1934년 10월 10일 루이진(瑞金)에 중심을 둔 중공중앙(中共中央)이 이동을 시작한다. 이것이 '대장정'의 시작이다.

이후 1936년 10월 홍군은 옌안에 도착하면서 9600km의 대장정을 마무리한다. 장정은 단순히 국민당을 피한 이동 전쟁이 아니다. 중국 공산당이 세계인들에게 자리하게 한 시간이기도 하다. 그래서 흔히 대장정으로 높여서 부른다.

몇년 전부터 중국에는 홍써뤼요우(紅色旅遊)가 유행이다. 바로 홍군의 근거지들을 찾아가는 유행이다. 대부분 중국 공산혁명의 발상지를 찾는 여행이다. 주로 장정의 길에 많이 집중되어 있다. 가장 주목을 받는 곳은 바로 중국 공산혁명의 요람 징강산이다.

기자는 99년 12월 중국으로 유학온 후 처음 떠난 여행에서 징강산을 다녀왔다. 그 때 징강산은 번화한 여행지였다. 징강산 기차역에서 징강산까지는 2시간이 걸리는 힘든 길이지만, '이 정도면 혁명도 할 만 하겠네'라고 읊조릴 만큼 빼어난 자연경치를 가진 요새였다. 다만 혁명에는 언제나 위험이 도사리기에 내 감회는 지극히 주관적인 것이다.

▲ 광주기의가 실패하고 피신한 김산이 생활하던 하이뤼펑.
ⓒ 조창완
아름다운 혁명의 요람, 징강산

중국 혁명의 지도자인 쑨 원이 1925년 3월 12일 사망한 후 초기에는 국공합작 등을 이뤄냈다. 하지만 정국 혼란 속에서 국민당은 공산당에 대한 탄압을 시작한다.

"(1927년) 4월 난징과 상하이에서 반혁명운동이 벌어지면서 장제스 지휘 아래 조직을 갖춘 노동자들에 대한 전반적인 학살이 자행되었어요." (<중국의 붉은 별(에드가 스노우 저)>중에서 마오의 말)

모든 일에 이유가 있는 법이다. 대만의 역사책은 그 원인을 쑨 원의 사후 공산당의 독단적인 행동과 황포군관학교 내의 노골적인 선전운동으로 본다.

물론 가장 큰 원인은 1926년 3월 18일부터 시작한 중산함(中山艦) 사건이다. 광저우에서 황포로 배가 움직이는 과정에서 장제스는 자신의 명령도 없이 이런 일이 발생한 데 대해 그 원인을 공산당으로 파악했다. 이후 국민당은 공산당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시작했다.

다른 지도자들이 러시아혁명을 본받아 도시에서 혁명을 생각했던 반면 먹물 때가 덜 묻었던 마오는 농촌이 중국 공산혁명의 기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서서히 농촌으로 향했고, 국민당군과의 전투 속에 1927년 겨울 징강산에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주변 산적 등을 융합하던 마오는 1928년 5월 주더가 징강산으로 피신와 역사적인 만남이 이뤄진다.

주더는 전 해인 1927년 8월 1일 난창(南昌)에서 허룡(賀龍), 예팅(葉挺)과 봉기를 일으켰지만 국민당이 밀려오면서 후퇴하는 상태였다. 거기에 황포군관학교 교도단인 예젠잉(葉劍英)등이 주도되어 1927년 12월 11일 단행한 광둥코뮌이 실패하면서 공산당은 소비에트 운동에 집중하기 시작한다.

▲ 징강산 혁명공원 모습. 입구에 '징강산 혁명 근거지의 선열 정신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고 씌어있다.
ⓒ 조창완
중국혁명에 함께 한 우리 선조들

그런데 이런 혁명의 중간에 예의주시할 것이 있다. 바로 우리 선조들의 움직임이다.

당시 이른 선진화를 통해 우리보다 수십배나 강한 생산력을 가진 일본이 을사늑약(1905년)을 강제하자, 많은 사람들이 중국을 향한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에는 그 사람들이 더 늘었다. 그들에게 유일한 희망은 중국을 일으켜 일본을 몰아내는 방식이었고, 이 때문에 중국에 찾아와 공산당과 국민당을 선택해 힘을 기르고 있었다.

그 때 얼마나 많은 이가 중국혁명에 참여했는가는 1927년 12월 광둥코뮌을 보면 알 수 있다.

이 봉기에서 교도단의 지도자 중 하나인 박영(朴英)을 비롯해 수백명의 한국인들이 참여했다. 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사허즈이(沙河子役)에서 희생되었는데, 그때 희생된 150명의 한국인 혁명가들을 기르기 위해 지금도 광저우 기의열사능원에는 '중조인민혈의정(中朝人民血議亭)'이 세워져 그 뜻을 기리고 있다.

광둥코뮌보다 4개월 전에 일어난 난창봉기도 예외가 아닌데 허롱이 이끄는 20사단에 강석필·홍범기 등이, 예팅이 이끄는 24사단에는 박인·김철강 등 수십 명의 한국인들이 참여하고 있었다.

지금도 베이징에서 항공기로 3시간이 걸리는 그 먼 길을 찾아서 혁명에 참여한 이들이 그리 많았다는 것도 대단하지만 혁명 속에서 차지한 위상도 상당히 높아서, 그들의 의지가 얼마나 강했는가를 알 수 있다.

▲ 루이진의 홍군 생활지
ⓒ 조창완
<아리랑>의 김산도 이 광둥코뮌에 참가했다가 가까스로 피신해 하이루펑(海陸豊)을 거쳐서 혁명을 지속했던 인물이다.

중국어도 하지 못하는 이들이 중국에 찾아와서 자신을 군대에 던지고, 또 목숨 건 혁명에 참여한 의지가 얼마나 큰 것인지 상상하기 어렵다. 거기에 중국 혁명의 성공이 곧바로 한국 독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알았음에도 한걸음 한걸음 걷기 시작한 그들의 길에 경의를 표할 뿐이다.

부대에 따라 제각기 시작... 초반엔 궤멸 위기도

소비에트가 서서히 힘을 잡아가자 1930년 말부터 국민당은 초공전(剿共戰 공산당소멸전)을 강화한다. 초반기에는 국민당이 실패했지만 물질적 지원이 강한 국민당은 1933년 10월말 5차 초공전을 시작하고, 오랜 대결에 지친 홍군은 1934년 10월 16일을 기점으로 장정을 시작한다.

물론 부대에 따라 그해 8월부터 다양한 갈래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장정의 중심은 중공중앙인 홍1방면군과, 6군단 등 홍2방면군이다. 거기에 쓰촨에 있다가 장정군에 합류하는 홍4방면군과 장정의 중간에 후난과 후베이에 들어가 게릴라전을 펼친 홍6군단등이 있다.

▲ 장정 출발 후 처음으로 감행한 도강작전을 기리는 기념비.
ⓒ 조창완
주요 출발점은 중공중앙인 1방면군이 출발한 루이진과 6군단이 출발한 징강산 북부 산악지역이다. 장정 길의 상당수를 돌았음에도 기자는 아직 공식적인 장정의 출발지인 루이진(瑞金)에 가지 못했다. 가 본 사람도 별로 없을 징강산을 세 차례나 방문했음에도 첫번째 길에 루이진에서 40km 남짓한 위두(于都)까지밖에 들르지 못했다.

역시 길이란 인연이 있기 마련인데, 지금이야 40km를 가는 한두 시간은 쉽게 생각할 수 있음에도 첫 길은 너무나 조급했다.

여행지로 발달해 다행히 나아진 징강산을 제외하고는 위두 등 지앙시 지역은 중국에서 그다지 잘사는 곳은 아니다. 하지만 여름에는 아름다운 산 코스가 있고, 겨울에도 성성한 눈이 대나무에 쌓여 조울되는 징강산은 알 수 없는 여유가 넘친다.

몇 개의 대표적인 샘(井)들이 있어서 이름을 얻은 징강산 곳곳은 중공중앙의 근거지들이나 마오·주더의 거처로 기록되어 있다. 역사 관련지만 보자면 하루 반나절 정도면 되지만 풍경까지 보면 3일 정도를 효과적으로 쓸 수 있는 좋은 여행지기도 하다.

"힘든 10년 참았으니, 이제 마음을 윤회의 끝에"

징강산·루이진 등에서 출발한 장정의 초반기 주도권은 모스크바 유학파인 버고(博古)나 독일인 군사고문 오토 브라운(중국명 李達)이 갖고 있었다. 물론 실전은 주더나 저우언라이가 책임을 졌다.

이런 판단은 역사 드라마 등에서 광범위하게 나타나는데, 이는 장정 초반기의 실패를 중국의 절대적인 영웅인 마오나 주더, 저우언라이에게서 더 분리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거대한 군대가 옮기는 일에 모두가 같이 할 수 없었다. 많은 이들이 남았는데, 초기 공산당 지도자 가운데 문학인을 대표하던 취추바이(瞿秋白)도 지병으로 인해 남아, 상하이로 피신하려 했지만 체포되어 두보시에서 운을 빌린 시 한수를 남기고 처형됐다.

"석양은 어지러운 산 중에 지고, 낙엽은 우물가에 소리없이 다하네. 이미 힘든 10년을 참았으니, 이제 마음을 윤회의 끝에서 쉬게 하리 (夕陽明滅乱山中,落叶寒泉听不窮極 已忍伶俜十年事 心持半偈万緣空)"

▲ 위두에 있는 마오쩌둥 기거지. 마오는 루이진보다 위두에 많이 있었다.
ⓒ 조창완
지앙시·광둥·광시· 후난 등 남부를 지나면서 홍군은 보급의 문제와 우세한 장비를 가진 국민당의 폭격으로 출발자 중 3분의 1만 남는 타격을 받았다. 장정의 초반기는 위기의 연속이었다.

특히 후난성 상지앙(湘江)을 건너던 34년 11월 30일부터는 최악이었다. 상지앙은 태평천국군이 증국번에게 당해 대대적인 출혈을 치른 곳인데, 다시 80년만에 피로 물들여졌다.

이런 가운데 홍군은 1935년 1월 7일 홍1방면군을 시작으로 구이저우성 준이(遵義)에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얼마간의 휴식이자 홍군의 새로운 변화가 시작됐다.

훗날 중국 공산당은 이 시기를 중국 공산당의 유아기로 본다. 중국식 공산주의나 전투방식이 아닌 모스크바 유학파들의 순수 전투방식과 오토 브라운 등 코민테른의 방식에만 의지하다가 대대적인 실패를 봤기 때문이다. 하지만 '준이 회의'를 통해 다시 본토산 혁명가들이 중국공산당의 실권을 장악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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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케이아이테크놀로지 상무. 저서 <삶이 고달프면 헤세를 만나라>, <신중년이 온다>, <노마드 라이프>, <달콤한 중국> 등 17권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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