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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수 화백 ⓒ 오마이뉴스 이종호
동네 길섶에 검은 귀가 뾰족한 새끼 염소들이 올망졸망하게 해바라기를 하고 있었다. 그 풍경 위로 누군가 손을 크게 흔드는 모습이 보였다. 이 동네사람들이 '그림 그리는 사람'으로 부르는 이철수 화백이다. 담장 공사를 막 마친 뒤라 길이 어수선하다며 고무호스를 잡고 물 청소를 하던 중이었다.

"얼른 들어가요. 점심 먹어야지. 여보 손님 왔어요!" 그가 집 안을 향해 소리를 친다.

"네, 알았어요, 모두들 어서 들어오세요."

안에서 밝은 목소리가 화답을 한다. 그리고 그 소리보다 더 고운 부인이 마루문을 열며 나온다. 그 안주인을 따라 집안의 모든 문이 열리며 손님맞이를 하는 듯했다.

제천에 사는 이 화백을 만나러오는 길 내내 예술가가 사는 집은 분명히 예술적일 거라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인지 모두가 그렇게 보였다. 낮은 봉당, 좁은 툇마루, 시멘트 바닥에 동글동글하게 박혀 있는 작은 돌멩이들이 모두 예술적인 분위기를 품고 있는 듯했다. 신을 벗기 전 나는 야트막한 툇마루에 걸터앉아 보았다. 마당이 아늑하게 보였다.

"자 용감하게 먹읍시다. 많이 드세요."

이철수 화백과 그의 부인 이여경 씨, 사진기자와 나, 우리 네 사람은 된장찌개를 가운데 놓고 점심을 먹었다. 이화백 부부가 직접 농사지은 쌀과 콩과 채소로 만들어진 식탁이었다.

"밥이 더 있어요. 한 그릇 더 드실래요?"

밥을 먹는 사이 동네 이야기며, 아이교육 이야기를 하는 사이 넉넉하고 편안한 안주인의 분위기에 나는 매료되고 말았다. 문득 이 집에 오는 손님들은 모두가 쉬이 떠나지를 못할 것 같았다. 특히 주방에서 일어나기 싫을 것 같았다. 이 화백을 만나자고 오겠지만 실상 그의 부인과 얘기했으면 하는 마음일 듯싶었다.

점심을 마치고 이 화백은 벌써 작업실로 건너갔지만 나는 식탁에 앉은 채 부인에게 계속 말을 걸었다. "집안이 정갈한 게 참 좋아 보이네요." '이 집에 온 지 16년만에 처음으로 집수리를 한 덕분'이라고 대답한다. "마루 천장에 서까래가 높아서 좋군요, 이 광목커튼은 참 예쁘네요, 어머 커튼의 이 무늬는 선생님께서 그리신 거로군요, 어떻게 프린트 하셨나요?"하며 난 계속 미적거렸다.

"여기서 이러면 일은 언제 하실라고, 어서 가서 일하세요. 차를 곧 내갈게요." 부인에게서 등이 떠밀려서야 주방을 나왔다.

징검다리처럼 놓인 나무를 밟고 이 화백의 작업실로 들어갔다. 그는 벌써 책상에 앉아 조각도를 열심히 놀리고 있었다. 이야기를 시작했지만 그는 작업을 멈출 낌새를 보이지 않았다.

▲잠시도 조각도를 놓지 않는 이철수 화백과 부인 이여경 씨. ⓒ 오마이뉴스 이종호

"난 이렇게 일하면서 얘기하는 게 아무렇지 않아요. 이 일은 밥 먹는 일보다 더 익숙한 일이거든요. 아마 평생 밥 먹은 시간보다 이렇게 나무를 깎은 시간이 더 많을 거예요." 그가 나무판을 세워들고 손바닥으로 나무를 쓸어내린다.

이철수의 판화그림은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다. 유명해진 사실을 알고 있느냐고 물었다.

"허허, 그렇다고 하는데 우리는 여기서만 사니 유명하다는 게 뭔지 잘 모르겠어요. 제 이름을 할아버지께서 국회의원 되라고 지어주셨는데 제가 다른 재주가 없어서 이것만 하고 있지요."

그는 국회의원이라는 직업은 특별한 재주가 필요한 직업 아니냐고 묻는다.

그를 만나러가는 아침, 나는 가방에 쾨테 콜비츠 책을 챙겼다. 20세기 초 독일여성 판화가인 그의 작품은 젊은 날의 나를 감동으로 몰아넣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그 책을 다시 읽으며 옛날의 감흥을 떠올려 보았다. <방직 공장 직공들의 봉기>, <전쟁터>…. 그의 모든 작품들은 여전히 무거운 돌처럼 내 가슴을 짓눌렸다. 아들을 잃은 슬픔에 젖은 어머니인 콜비츠의 자화상. 그의 작품은 내게 모두 슬프고 음울한 것의 동의어였다.

"젊었을 적에는 누구나 좋아할 만한 작가지요. 저도 그랬죠. 한 10년 전에 독일 전시회를 갔을 때 틈틈이 그의 작품을 보러갔는데 많이 놀랐어요. 사람들이 별로 찾지 않더라구요. 잊혀진 존재 같았어요. 역사는 흘러가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스산한 콜비츠의 미술관을 보면서 그는 '현재'보다 본질적인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생각을 하였다. 그의 마음이 흔들렸단다. 그리고 당시 그의 전시회를 찾은 한 독일사람은 "이철수 씨 당신의 그림에서는 전체주의의 냄새가 난다"는 말로 그를 더욱 흔들었다. 충격이었다.

"그때는 아니라고 말을 했지요. 그런데 한국에 돌아와서 곰곰히 생각하게 되었어요. 한 이년 동안은 작품을 하지 못했어요. 그 말이 화두가 되었지요. 그 이후 변화가 시작된 거지요."

예술이란 '그 당시'의 '시간적인 일'보다 더 근본적인 것 그 무엇을 근저에 두는 것, 그래야만 한다는 생각이 그를 사로잡은 것이었다.

70년대 말 80년대 그는 민중에게 말을 하는 미술을 위해 판화를 시작했다. 그때는 그래야만 했다. 그래서 판화를 보며 '아, 참 좋구나, 이건 정말 멋진데'하는 느낌은 오히려 불경스런 것이었다. 그냥 시대의 아픔을 느끼는 게 우선이었다. 그는 어땠을까? 80년대 작품 분위기가 그에게 짐이 되었을까?

ⓒ 오마이뉴스 이종호

"그때 작품을 하면서 이건 아니다, 아니다 하는 생각이 많았어요. 그러나 한번도 정직하게 그 회의에 제 자신이 반응해보지 못했어요. 그냥 내가 지나치게 유약한 탓이려니 하면서 오히려 더 열심히 했지요. 어떤 식으로든 나를 다잡아야겠다는 생각만 했지요. 90년대 작업을 해오면서 아, 그때 정직하게 얘기했었어야 했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다른 사람들한테뿐만 아니라 스스로에게 말이지요."

그가 아주 편안하게 물 흐르듯이 말을 이어갔다.

"그래서 아니라고 느껴지면 언제나 아니라고 얘기하려고 했지요. 인간관계,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도 그렇고요. 자연스럽다고 하는 게 맞아요. 종교적인 표현을 빌자면 선적으로 변했다고 하는 게 옳아요."

결국 자연스러운 것을 하기로 했다. 그는 다시 쌓인 나무 껍질을 훌훌 털어낸다. 세상의 껍질도 저렇게 훌훌 털어내고 살아오는 듯 보였다.

"그런 변화를 비난한 사람도 있었겠군요?"
"있다는 소리는 들었는데 면전에서 그런 경우는 없던데요. 노골적으로 얘기하지 않아도 선을 그어 놓고 생각하고 있구나 그런 느낌을 받았어요. 그러나 그게 저를 짐스럽게 하진 않아요."

그는 이 시점에서 분명히 덧붙였다.

"제가 선적인 것을 그린다고 해서 분노, 슬픔을 버린 것은 아닙니다. 화가 나면 화를 내고 성날 땐 크게 소리지르고, 그게 자연스러운 것이거든요. 다들 제가 그 동안의 것을 잊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는 않지요."

선적인 표현이 그의 작품활동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특별한 데서 좀더 특별한 것을 찾겠다고 하는 것은 여행을 끝없이 새로운 곳을 찾아다니는 것으로 여기는 다소 경박한 태도가 아닌가 싶어요. 한자리에 앉아서 보면 세계가 안보일 리가 없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많은 평범한 이들의 삶이 그 그릇 그대로 온전한 부피와 무게를 가지고 있는 거죠. 일상적인 것을 아주 비범한 것으로 바로 그 자리에서 치환할 수 있는 것이 예술가들에게 필요한 능력이 아닌가 합니다. 평범한 진실이 아름다운 진실이지요."

ⓒ 오마이뉴스 이종호
그는 평범하고 일상적이고 자연스런 것에 대한 가치를 사람들이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하는데 안타깝다고 말했다.

"초월을 금기시해야 하는 것처럼 가르치는 게 사회풍조가 아닌가, 영적인 성숙은 나이 들어서야 해야지 자연스럽다고들 하는 것 같아요. 그러나 저만 하더라도 늦었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가능하면 우리 사회가 영적인 변화에 적극적인 관심을 좀더 일찍 달관한 자세로 세상을 바라보게 한다면 우리가 안고 있는 많은 고통이 줄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사람들이 돈하고 바꿀 수 있는 물건에 너무 빠져들고 있어요. 나 남 없이, 나이에 상관없이 말이죠. 내가 보잘 것 없는 이대로 세상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데 너무 많은 세월을 보내버린 거지요."

사람들이 인생이 뭘까 하는 의문을 가지기도 전에, 자신이 뭘 진정으로 원하는지도 알기도 전에 그냥 살아가는 게 아니냐고 물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그림으로 된 카드를 사랑하는 사람에게 보내고 싶어하고, 그의 그림으로 된 달력으로 날을 세고 싶어한다. 많은 이들이 그의 그림으로 숨을 쉬면서 살고 있다. 그는 자신의 그림이 어떻게 받아들여지기를 원할까?

"전 인생에서 꼭 필요한 한 가지를 챙기라면 가족 혹은, 이웃, 그거라고 생각해요. 저는 따뜻함을 말하고 싶어요. 생활 이야기를 통해서요. 의지할 곳, 기댈 곳, 우리는 누구나 그런 것을 찾는 존재들 아닌가요? 저는 제 그림을 통해 사람들을 흔들어놓고 싶어요. 좀더 많은 것을 얻는 게 성공이라고 믿는 지금 사는 모습에 그게 다가 아니라고 해주고 싶은 거지요. 제 그림을 보면서 단지 보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자신의 생활 속에서 그런 비슷한 생각들, 마음들을 한번씩 찾아내 주었으면 합니다."

최근 그의 그림 중에는 F-15, F-16에 관한 이야기에서 선거 이야기, 각종 여론조사 등 현실적인 사안을 다룬 것이 많다. 반가운 소식은 그 모든 작품들이 조만간 인터넷상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오마이뉴스> 사이트에서 클릭하면 <이철수의 그림>이 보이게 그가 계획중이다.(이철수 화백의 홈페이지는 4월26일 개설될 예정이다. 사이트 주소는 www.mokpan.com이다.)

"아날로그 영역에서 하는 일을 디지털 감각과 접목시켜보는 게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제가 선적인 그림만 그리고 정치적 사회적 관심은 다 버린 것으로 많은 분들이 이해하시는 것 같은데 어떤 식으로든 그 점도 해결해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요. 그런데 인터넷 안으로 들어가 보니 분위기가 너무나 살벌하더군요. 그래서야 안되지요. 전 그런 분위기 속에서 제 그림을 한번씩 보는 것으로 숨을 돌릴 수 있기를 바래요. 내 식의 따뜻함을 부여하고 싶어요. 편협하고 정서적으로 과잉된 표현을 하는 사람들 곁에 제 그림을 두면서 가벼운 대화를 나눠보고 싶기도 하고…. 사람들은 그런 것에 대한 그리움을 많이 갖고 있거든요."

그의 그림이 인터넷 사이트 분위기를 정화시킬 수 있을 것 같다.

"주제 넘지만 그런 욕심을 가지고 있어요. 홈페이지를 데이터 베이스화하려고 해요. 시작할 때 5, 6백장씩 해서 한 번씩 보면서 넘기기만 해도 쉽지 않겠지요. 1천 장까지 올려놓을 작정입니다."

▲이철수 화백을 지켜주는 울타리인 부인 이여경 씨(사진 왼쪽)와 권은정 씨. ⓒ 오마이뉴스 이종호

그의 부인이 국화차를 들고 왔다. 마른 국화꽃잎이 따스한 물에 녹아들면서 향기를 올리고 있었다. 국화차와 부인. 이 배경이야말로 이화백의 그림을 따뜻하게 만드는 근본이 아닐까?

부인은 그를 지켜주는 울타리, 여린 듯하지만 강한 울타리임에 틀림없어 보였다.

"서로 울타리가 되는 것이지요. 서로 고맙다고 느껴요. 한 사람만이 그런다고 되는 것은 아니지요. 우리는 거의 같이 지내니 서로 이견이 있더라도 이틀이고 사흘이고 이야기를 해서 맞추지요. 누구 한 사람이 포기해서 해결을 하는 일은 없어요."

이 부부는 올해 결혼한 지 20년을 맞는다.

"결혼기념일 날 서로 어떻게 축하하시나요?"
"우리는 그런 거 모르고 지나가요. 그러다 보니 언제 결혼했는지 이제는 날짜도 기억이 안나요." 설마!

"정말이에요. 올해는 그래도 이십 년인데 싶어서 날짜를 알려고 수소문해서 물었더니 아는 분이 없네요."

겨우 궁리 끝에 옛날 앨범을 뒤지다 보니 한 장 끼여져 있던 청첩장 덕분에 날짜를 알 수 있었단다. 무슨 무슨 기념일 챙기는 게 행복한 결혼생활하고 아무 상관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한 셈이다.

두 분 어떻게 만나셨어요? 아마 결혼 50주년 금혼식을 치른 부부라 할지라도 이 질문에는 언제나 반짝이는 눈빛에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을 할 것이다.

"하월곡동 빈민교회에서 만났어요. 전 거기 탁아소 만드는 일 때문에 들어갔고 저 사람은 벽화 그리러 왔었지요. 일하다가 둘이 만난 거죠."

그리고 한 달만에 청년 이철수 씨가 프로포즈했다.

ⓒ 오마이뉴스 이종호
"일 주일 안에 생각해 보라고. 군더더기 붙이지 말고 하면 한다, 아니면 아니다. 그래서 이왕 할 거 일주일은 뭐, 삼일만에 하겠다고 했지요."

나는 하나도 안 놀랬다. 누구라도 이화백 부부를 만나보면 한 달 만에 결혼하자고 하고 사흘만에 예스라고 대답한 것이 두 사람 사이에서는 당연한 일이었을 거라고 생각될 것이다. (그런데 일 년을 기다려야 했다. 장모 되실 분이 하도 반대를 해서. 그 이유야 다 아는 것이다. 당시 '그림 운동'하는 청년에게 누가 고운 딸을 쉬이 내주려 했겠는가.)

"어떤 운명적인 끌림이 있었나요? 어떤 것이었나요?"
"그걸 어떻게 설명해요? 설명할 수 있으면 한번 해 보세요. 그냥 결혼은 제 인생의 새로운 시작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엄청나게 좋았지요."

이 화백은 무뚝뚝하다 싶을 정도로 간단하게 대답한다. 그리고 아들딸 낳고 이십 년이 흐르는지도 모르면 살아간다. 주위에서 잉꼬부부라고 하는 소리 많이 들을 것 같은데요.

"저희 사는 것보고 결혼하고 싶어하는 사람들 더러 있어요. 그래서 주례도 꽤 했어요. 그런데 이제 그만 해야겠어요. 주례사 하기가 너무 힘들어요. 하하하…."

이 화백은 주례사를 짧게 하는데도 늘 다른 주제로 그 신혼부부에게 맞는 얘기를 하자니 힘이 든다고 말한다. 주례사를 뭐하러 매번 바꾸냐, 형식을 잡아놓고 신랑신부이름만 바꾸면 될 일이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전 똑같은 것 반복하는 것을 못해요. 그걸 아주 싫어해요. 그림도 늘 다른 것을 그리는데 어떻게 똑같은 말을 해요?"

그렇다, 그는 정말이지 말, 아니 글을 잘한다. 평소 그의 그림을 볼 적마다 난 망설였다. 그림이 글의 일부인지, 아니면 글이 그림의 일부인지. 그의 넓고 깊고 다정한 글은 어디서 샘솟는 것인가?

"제가 어려서부터 원래 글을 좋아했어요. 책읽기도 무지 좋아했고, 그림은 그냥 곁다리로 좋아했는데, 아마 재주가 그림에 더 있었던가봐요. 그런데 사실 저 정도의 재주는 그냥 평범한 사람들도 할 수 있는 것이지요."

그는 증거를 대주었다.

"이웃 분들이 그림을 보러 와서는 '에에, 저런 그림이면 나도 그릴 수 있다'고 말해요. 백 번 맞는 말이지요."

동네 사람들은 이 화백이 달력을 선물하면 슬쩍 넘겨보고는 휙 던지며 '좀더 좋은 달력 없냐'고 묻는다. 그런 이웃이 그는 더없이 살갑다.

한번은 아들 친구 집인 동네 식당에 갔더니 식당 벽에 이화백의 달력이 걸려 있었다. 한쪽에는 맥주광고 달력, 한쪽은 오토바이광고 달력 (두 달력 모두 어떤 모델을 내세우는지 여러분도 잘 알고 계신다), 그 가운데 있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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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건 정말 경쟁력이 없던데요. 하하하…."

우리는 함께 크게 웃었다.

그래도 그의 동네 밖에서는 그의 달력을 걸고 싶어하는 이들이 많다.

"제가 최근 제일 즐거웠던 일은 대방동 어디 포장마차에 제 그림이 걸려 있다는 소식이었어요. 화가들은 작품만 생각하는 것 같아요. 그 그림을 누가 봐줄지에 대한 생각을 했으면 좋겠어요. 전 위대한 화가는 꿈도 꿔본 적이 없어요. 그냥 사람들 곁에 있는 사람, 자기 삶에 지친 사람들에게 잠시 쉴 자리가 되어 주는 그런 사람이 되었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은 늘 해왔지요."

그는 혹시라도 '노대가'라는 말을 들을 때까지 작품활동을 하게 될까 저어된다고 말했다. 적당한 선에서 물러나 세상공부를 하고 싶다고 했다. 그 동안 자신이 맡아오던 여러 가지 역할을 후배들이 얼른 맡아 해주기를 바란다는 기대 같았다.

이 화백 부부는 자기들의 주된 일을 농사라고 한다. 함께 밭을 갈며, 고추를 따며 남편은 '틈틈이' 그림을 그리고 부인은 그와 세상 얘기를 나눈다. 그러나 아무래도 부인 쪽이 '완전한 농부'에 더 가까운 듯하다.

"동네 분들에 비하면 우리는 엉터리 농사꾼이지요. 그래도 우리 논을 지나면서 '이 집은 대충하는데도 농사가 잘 되었네'하면 너무 많이 서운해요. 저는 논에 들어가서 김도 매고 하는데, 아무도 안 그러거든요."

정말 억울하다는 표정을 짓는다. 그는 해가 갈수록 농사짓는 일이 정말 좋다고 했다.

"농사지으면서 살아보니 농사를 잘 짓는다는 것이 어떤 경지인지 알게되었어요. 예술도 그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해요. 고상하고 거창한 것, 어떤 특정한 사람만 하는 분야라고 생각하면 틀린 것이지요."

자신의 방식으로 완전히 할 수 있는 것을 그는 예술이라고 믿는 것이다.

자리에서 일어나기가 싫어 이런저런 얘기를 하고 있는데 한 수녀님이 방문하셨다. '재너머' 있는 사회 복지원에서 오신 분이다.

ⓒ 오마이뉴스 이종호
"우리를 많이 도와 주시지요. 추수 때가 되면 우리는 쌀에서 고추, 콩 뭐 안 갖다 먹는 게 없어요. 늘 큰 힘이 되는 분들이세요."

그 수녀님은 최근 한 전시회의 안부를 물었다.

"그런 대로 성황이었나 봐요. 기금모금에 보탬이 되어서 다행이에요."

<제천 환경연합>을 돕기 위해서 그가 작품을 내고 전시회를 열었다. 그를 찾는 이로 그의 집은 하루도 손님이 빌 날이 없다. 그에게 그림을, 글을 당부하는 연락이 끊이지 않는다. 세상이 그의 따스함을 그리워한다는 뜻이리라. 작업실 창으로 산 목련이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었다. 봄 날씨 때문만은 아닌 듯하다. 이 화백의 따스한 마음 기운에 저 꽃이 저리도 터질 듯한 것이다.

ⓒ 오마이뉴스 이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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