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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석씨!

이제 두 달만 지나면 1964년 용띠 동갑인 당신과 나는 마흔 살이 되겠군요. 당신과 난 일면식도 없는 사이이지만 당신의 이름을 듣거나 보게 될 때마다 막연히 나랑은 비교가 되지 않는 자리에 서 있는 당신이 친근하게 느껴진 건 단지 동갑이라는 이유 때문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래요 80년 5월 당신과 난 까까머리 고등학생이었지요. 남도에서 피비린내 나는 살육이 진행되고 있었을 때, 무심히 창 밖으로 돌린 눈길 끝에 스크럼을 짜고 구호를 외쳐대던 대학생들의 행진을 보다가도 커튼을 내리고 수업에만 열중하라던 선생님의 말씀을 거부할 이유를 발견하지 못했던 우둔한 까까머리 고등학생이었지요. 당신이 투옥되던 1985년 난 파쇼 용병이라 자학하며 입대하였던 군인이었지요.

1987년 동아리 회원들과 논란 끝에 동학 답사여행을 강행하던 6월, 그때 난 동요하던 후배들에게 이렇게 타일렀지요. 어차피 이 싸움은 오늘내일 끝날 싸움이 아니다. 길게 보자. 30일 돌아오던 차 안에서 백기를 든 군사독재 정권의 소식을 들으며 현장을 떠났던 어리석음을 자책하고야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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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보단일화 ' 주장하는 김민석씨에게

1992년 당신이 27살의 나이로 국회의원에 출마하여 석패하던 때, 난 첫아이와 감격적인 상봉을 하고 있었습니다. 1994년 어여쁜 당신의 약혼녀와 도미하여 공부를 하던 때 난 이름 없는 중소기업에서 옳지 않은 방법도 불사하며 부끄럽게 식솔과 삶의 지난함을 몸으로 배워가고 있었습니다. 1996 년 31살의 나이로 당신이 국회에 화려하게 입성하던 해 전 둘째 아이와 만났습니다.

당신에 비하면 전, 아니 비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겠지요. 당신만큼 잘 알지는 못해도 무엇인가가 잘못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당신만큼은 잘 말하지 못해도 누군가에게 '이건 아니다'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건 내 몫이 아니라고, 내 몫은 당신 같은 사람 믿고 또 도와서 내가 믿는 세상이 빨리 오도록 내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라 믿었던 것입니다.

당신이 서울시장 후보로 나왔을 땐 내가 서울에 살지 못하고 서울 변두리에나 산다는 사실이 처음으로 후회스러웠습니다. 광주에서 당신과 몇몇이 술에 취해 신문에 오르내릴 때도, 정당개혁을 위한 내부 목소리를 당신이 앞장서 묵살하고자 하였을 때도 당신은 적어도 나보다는 많이 생각하고 또 많이 반성하였으리라 믿고 싶었습니다. 맹목적으로 당신을 좋아한 것은 아니었지만 언제인가는 당신이 옳은 명분을 찾고 그 명분에 의해 나 같은 사람에게 희망을 줄 수도 있지 않을까 믿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젠 철회하렵니다. 당신에 대한 심정적 모든 지지를 철회하렵니다. 당신에 대한 동년배로서의 연대에 대한 공감을 철회하렵니다. 당신이 이루었다고 믿는 그간의 정치적 모든 성과에 대한 지지도 철회합니다. 어떤 청문회에서 당신이 흘리던 눈물에 우리 정치의 희망이 있다고 믿었던 순진함도 철회하렵니다.

정치 엘리트로서 이렇게 저급한 정치판에서 뭔가 새로운 싹을 틔워줄 수 있으리라는 낙관주의와도 결별하렵니다. 결국 본질을 꿰뚫지 못하였던 이런 나의 우둔함이 오히려 이 나라의 올바른 진보를 가로막고 있었음을 자인합니다. 막연한 낙관이나 소수 엘리트들에 의한 개혁과 진보에 대한 희망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이었음을 깨닫습니다.

이제야 당신이 그런 사람인 걸 알았느냐는 사람들도 많이 있더군요. 또 아주 적은 일부는 당신의 선택에 정당성을 부여하려고도 하더군요. 하지만 왜 이런 논란의 한 가운데로 당신이 들어섰는지, 당신의 말대로 당신이 어떻게 해서 "이 길이 이 시점에서 민주평화개혁세력의 후보단일화를 통해 대선 승리를 이루기 위한 현실적인 마지막 대안이라고 확신"하고 있는 것인지... 당신보다 훨씬 못난 사람이 보기엔 변절이란 말밖에 다른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군요.

김민석이 걸어온 길에서 당신이 썼던 "시위 때면 대열의 맨 앞에서야 시야가 확 트여 앞도 잘 보이고 상황 판단도 빨라 퇴각(?)하기에도 좋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처럼 빠른 상황 판단의 결과일는지요.

유엔 사무총장이 당신의 꿈이라고 말하는 걸 여러 번 들었습니다. 제 꿈은 그렇게 거창하지 못합니다. 우리 가족의 건강을 비는 소심한 소시민의 희망과 더불어 내가 살아가는 세상, 혹은 내 아이들이 살아가야 할 통일된 올바른 세상을 보는 것입니다. 우러러 보였던 당신이 한없이 초라해 보이고 비루해 보였던 제 삶이 적어도 당신의 처세보다는 확실히 우월해보이는 이 마흔 언저리가 황당하기만 합니다.

이제 추워집니다. 그리고 얼마 후면 마음에도 없는 사람의 지지연설을 하는 당신을 TV에서 바라보게 될 수도 있겠군요. 그럼 더욱 제 마흔 고개가 가파를 듯합니다. 적어도 당신처럼 살지는 않으리라 다짐할겁니다.

무명의 동년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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