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난을 해결치 못하니 천지간에 불효자식입니다

[누가 이 나라를 지켰는가 30] 함평 - 심남일 의병장 (4)

등록 2008.03.15 12:23수정 2008.03.15 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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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장(智將) 심남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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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폭도대토벌기념사진첩>에 실린 심남일 의병장 ⓒ 눈빛출판사

<남한폭도대토벌기념사진첩>에 실린 심남일 의병장 ⓒ 눈빛출판사

심남일 의병장 본명은 수택(守澤), 자는 덕홍(德弘), 호는 남일(南一)이며, 본관은 청송(靑松)이다. 그는 1871년 2월 10일(음력) 전남 함평군 월야면 정산리 신기에서 심의봉과 진주 강씨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일찍이 학문을 닦아 사서삼경에 능통하였으나 관직에 나간 기록은 없고 서당 훈장과 향교 교임을 맡은 유생이었다.

 

러일전쟁 후 일제 침략이 노골화 되고, 1905년 11월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통분을 금할 길 없어 거의할 것을 결심하였다. 그는 의병장 김준(金準· 金泰元) 아우 율(聿)의 부장이 되어 장성(長城)· 영광(靈光)· 함평(咸平)· 남원(南原)· 보성(寶城)· 장흥(長興) 등지에서 일군과 싸워 많은 전과를 거두었다.

 

김율이 전사하자 스스로 대장이 되어 군율을 더욱 엄히 하고 진용을 재정비하였다. 이때 심남일 부대의 구성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선봉장 강무경(姜武景)· 임만선(任萬善)· 장인보(張仁甫)

중군장 안찬재(安贊在)· 박사화(朴士化)

후군장 노병우(盧炳友)· 나성화(羅聖化)· 최우평(崔友平)· 김성재(金聖載)

도통장 김도숙(金道淑)

통 장 유치선(柳致先)· 공진숙(孔盡淑)

군량장 이세창(李世昌)

호군장 강달주(姜達周)· 정관오(鄭官午)

기군장 장문연(張文然)· 이덕삼(李德三)

서기 겸 모사 염원숙(廉元淑)

도 포 장경선(張京先)· 김판옥(金判玉)· 선도명(宣道明)

도집사 최유승(崔有承)

모사 권택(權澤)· 정영태(鄭榮兌)

 

심남일 의병장은 향리에서 도학으로 명성을 떨쳤기 때문에 규율을 엄히 하고 민폐를 적게 하기 위하여, 의병들이 지켜야 할 10개 조항을 널리 알려 지키도록 하였다. 그 요지는 민가의 재물을 약탈하거나, 부녀자를 겁간하든지, 가축을 희생시키는 일 등에 대하여 엄히 처단할 것을 밝힌 바, <심남일 실기(진지록)>에서도 이를 자주 언급하고 있다.

 

"원컨대 제군들은 특히 백성을 무마하는 데 힘써야 한다. 부디 토지와 재물을 빼앗지 말고, 겁략하지 말 것이며, 무고한 사람들을 때리지 말라. 그리고 경솔하게 군사를 발동치 말고, 적을 가소롭게 보지 말라. 가는 곳마다 백성들을 집안사람 맞이하듯 반갑게 서로 대함으로써 백성들에게 실망을 주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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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남일 장군이 의병을 일으킨 전남 함평군 신광면 원산리 덕동재(갓점) 계곡. ⓒ 박도

심남일 장군이 의병을 일으킨 전남 함평군 신광면 원산리 덕동재(갓점) 계곡. ⓒ 박도

 

심남일 의병부대의 항일전투사

 

심남일 의병부대는 1907년 11월 1일 함평군 신광(新光)에서 깃발을 올려 의병을 모집, 훈련하기 시작하여 1908년 2월 13일 남평(南平)으로 행군하면서 적과의 접전을 감행하였다. 그의 첫 접전은 1908년 3월 7일 강진면 오치동(吾治洞)에서 있었다. 적병 수백 명을 맞아 아침 6시부터 밤 10시경까지의 교전 끝에 수십 명을 살상하고, 무기를 다수 노획하여 의병들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하였다.

 

이어서 그해 4월 15일 장흥(長興)· 곽암(藿岩)에서 적 3명을 사살하고, 6월 19일 남평 장담원(長淡院) 전투에서 적 5명의 목을 베고, 6월 25일 능주 노구두(老狗頭)에서 적 5명을 베고 말 두 필과 무기를 노획하였다. 7월 30일 영암 사촌(沙村) 전투에서 적 10여 명을 죽이고, 8월 1일 나주 반치(盤峙)에서, 9월 20일 장흥 신풍(新豊)에서, 10월 9일 해남 성내(城內)에서, 10월 27일 능주 돌정(石亭) 등지에서 모두 적 백여 급을 살상하였다.

 

이와 같은 전투에서 큰 성과를 올렸으나 불행하게도 심남일과 선봉장 강무경이 병석에 눕게 되었다. 이듬해 봄까지 접전일기에 기록 없었던 점으로 미루어 보아 이 기간 동안 추위와 병고로  은신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09년 3월 다시 적과 격렬한 교전을 재개하였다. 3월 8일 대장 서리 강무경(姜武景)· 박봉주(朴奉柱)· 박채홍(朴彩洪)이 나주 월교리(月橋里)에 머물다가 밤에 남평 운삼동(雲三洞)에 집합하여 선동(船洞)으로 옮기는데, 정찰대로부터 적이 내습한다는 보고를 받았다. 심남일은 미리 의병을 요소요소에 매복시켰다가 적 5명을 사살하자 적은 영산포(榮山浦)로 달아났다. 이에 더 적극적인 전투를 전개해야 할 것을 계획하고 인근 전해산 안규홍 이대극 등의 의병부대와 연합 작전을 꾀하였다. 이 가운데 특히 안규홍과는 끝까지 유기적 관계를 맺게 되었다.

 

심남일은 전군을 5부대로 나누어서 동쪽 대치(大峙), 대항봉(大巷峯), 월임치(月任峙), 덕룡산(德龍山) 꼭대기, 병암치(屛岩峙)에 각기 매복시켜서 적의 내습에 대비하였다. 다음날 새벽부터 능주· 광주· 나주· 남평· 영암으로부터 내습해 온 적병과 접전하여 적 70여 명을 사로잡고 수십 명을 사살하였다. 아군의 희생도 적지 않았으며, 본진의 총독 박기춘(朴基春)· 좌익장 박여홍(朴汝洪)· 우익장 박태환(朴泰煥)이 전사하였다.

 

3월 11일, 계속하여 적의 내침이 있을 것으로 예상하여 능주 풍치(風峙) 좌우에 잠복하고 대기하고 있는데 이웃 12 고을 적병 4백여 명의 포위 공격을 받아 백여 명을 죽였는데도 적병은 물러가지 않았다. 이에 세부득이하여 징을 쳐서 군사를 불러들여 두문(杜門) 북쪽으로 후퇴하였다. 이 전투에서 심남일 의병장의 신출귀몰한 전략에 대해 다음과 같은 동요가 생겨났다고 한다.

 

남일이 용마를 타고

산 밖으로 솟아오르면

현수(강무경)는 풍운을 조화하여

공중으로 날아오른다. 

(南一乘龍馬 而聳出於山外 鉉秀風雲造化 飛上空中)

 

4월 2일에는 장흥 우산(牛山)에 주둔하고 있었다. 그곳은 능주 헌병이 매달 5차례씩 20여 명이 장흥을 통과하는 곳이었다. 이날 강현수가 의병 20명을 거느리고 매복하고 있다가 포를 터트려 적 8명을 사살하자 나머지는 모두 도망해 달아났다.

 

5월 12일 보성 천동(泉洞)에 주둔하고 보성 의병장 안규홍과 석호산(石虎山)에서 만나 연합 작전을 계획하였다. 작전수행을 위해 중군장 안찬재(安贊在)와 통장 김도숙에게 군량을 백 리 밖에서 운반해 오도록 하고, 후군장 김성재(金聖載)와 호군장 강달주(姜達周)에게 군사들을 잘 먹이게 하는 등 만반의 준비를 갖추게 하였다. 보성의 왜장이 산상에 올린 의병의 깃발을 보고 50명 군사를 거느리고 내침해 오자 이들과 격전하여 적 5명을 사살하였다.

 

왜적을 소탕할 날 마침내 있으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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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남일 의병장 진중일지 <진지록> ⓒ 심남일기념사업회

심남일 의병장 진중일지 <진지록> ⓒ 심남일기념사업회

그 후 안규홍과 장래의 전략을 기획할 때 이세창(李世昌)이 적은 군사로 많은 적을 감당하지 못하는 것은 정한 이치이니 (전라) 남· 북도 의병이 합세하여야 한다고 건의하였다. 모두 그 말을 옳게 여겨 각지의 의병 부대와 연락하여 연합 전선을 구축하여 가던 중 의병을 해산하라는 황제 조칙이 내려지게 되었다.

 

심남일 의병장은 일제 협박에 못 이겨 내려진 조칙인 줄 번연히 알면서도 1909년 7월 21일 영암군 금마면 고인동(古引洞)에서 자진 해산치 않을 수 없었다. 이 때 그는 다음과 같은 감회를 읊었다.

 

가을바람 쓸쓸한데 장수와 군사들은 눈물로 이별하니

고인산 앞에서 말조차도 가기를 싫어하는구나

왜적을 소탕할 날 마침내 있으리니

지난 3년 맹세한 일 부디 잊지 마세.

 

(秋風將卒泣相離 古引山前馬去遲 一掃腥塵終有一 草違三載死生期)

 

죄만 있고 이름이 없으니

 

의병을 해산한 후, 심남일은 강무경과 함께 능주로 잠행하여 지난날 전투지였던 풍치의 바위굴 안에서 신병을 치료하던 중, 1909년 10월 9일(음 8월 26일) 이를 탐지한 일군에게 체포되었다.

 

문명이 해와 달같이 밝던 이 강산

홀연히 피비린내 나는 티끌에 덮여 앞길이 캄캄한데

맑은 날 맞이하지 못한 채 지하로 돌아가니

멍든 피 푸른 반점이 되어 천 년은 가리.

 

(文明日月比江山 忽入腥塵 曖問 未覩一晴歸地下 千秋化碧血痕班)

 

심남일 장군은 끝까지 일제에 굴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의 불의를 질책한 후 그의 단심(丹心)을 담은 절명(絶命) 시를 읊고는, 1910년 7월 23일 대구 감옥에서 교수형을 받고 39세를 일기로 순국하였다.

 

고향집 어버이는 백발이 성성하리다

문안드리고 전장에 나선지 몇 해인고?

국난을 해결치 못하고 고향에 못 드니

천지간에 불효자식입니다.

 

(堂上吾親白髮新 年拜退走兵塵 國危未濟家鄕隔 天地環爲不孝人)

 

감옥에서 평생 동지 강무경에게 다음의 시를 주었다고 한다.

 

천지간 지난 10년 동안 비바람 속에서

우리는 형제로 생사를 같이 하여 왔는데,

그대와 내가 이렇게 흘러 다니니 무슨 일인고?

죄만 있고 이름이 없으니 이를 말이 없네.

 

(天地十年風雨中 爲兄爲弟死生同 君遷我滯緣何事 罪在無名說莫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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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공로훈장 ⓒ 박도

건국공로훈장 ⓒ 박도

장군의 교수형 소식을 들은 부인 평택 임씨는 그 충격으로 시력을 잃었다.

 

눈이 있되 해와 달을 보지 못하는 세상인데, 차라리 두 눈을 감고 사는 게 더 마음 편한 일이오.

 

의병장 부인답게 세상을 떠날 때까지 시각장애인으로 의연하게 살다가 장군 곁으로 가셨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홍영기 지음 <대한제국기 호남의병 연구>, 국가보훈처의 공훈록, 김철수 지음 <의병대장 심남일 장군> 등을 참고하였습니다. 

2008.03.15 12:23 ⓒ 2008 OhmyNews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홍영기 지음 <대한제국기 호남의병 연구>, 국가보훈처의 공훈록, 김철수 지음 <의병대장 심남일 장군> 등을 참고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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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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