ㄱ. 소금자 블루스
모르니까 모르는 소리를 하는구나 싶습니다. 아니까 아는 대로 이야기를 들려줄 테고요. 그렇지만, 아직 모르기 때문에 아는 사람이 섣불리 건드리지 않거나 우상으로 섬기는 대목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거나 다른 모두와 똑같이 바라보기도 한다고 느낍니다. 그리고, 알고 있기 때문에 자랑을 하거나 거들먹거리거나 아직 모르는 사람들은 좀처럼 다가갈 수 없도록 울타리를 높이 쌓기도 한다고 느낍니다.
국회의원 정몽준 씨는 요새 버스삯이 70원인 줄 알았다고 합니다. 이 소식을 듣고 피식 웃음이 났는데, 정몽준 씨만이 아니라 다른 정치꾼들도 여느 사람들 살림살이를 거의 모르지 않으랴 싶습니다. 손수 집삯 물삯 전기삯 밥삯을 치르고 밥상 차리고 치우고 옷 마련하고 빨고 집안 치우고 쓸고 닦고 아이 돌보고 하지 않는 가운데, 여느 사람들 삶을 얼마나 알랴 싶습니다. 날마다 입으로는 ‘서민 경제 걱정’을 욀 수 있지만, 살갗으로 느끼며 스스로 온몸을 내던지도록 ‘서민 삶을 북돋울’ 만큼 애쓸 수 있겠는지요. 그분들 머리에 온갖 지식은 가득 차 있을지라도.
한 해 배움값이 이천만 원이 넘는다고 하는 법학교(로스쿨)에 다닐 아이들은 학교 마치는 네 해 동안 일억이 넘는 돈을 들여야 한답니다. 무슨 재주가 있어 그 돈을 들이며, 또 이만하게 들인 돈은 뒷날 어떤 일자리를 얻고 어떻게 일해야 얼마만에 벌어 채울 수 있을까 궁금합니다. 저잣거리를 가 보면 애호박 두셋에 천 원씩 팔곤 하는데, 애호박 값이 이렇다면 애호박을 기르는 농사꾼 삶이란 어떠할까요. 법학교 다니는 아이들은 이 나라 농사꾼 삶과 장사꾼 삶을 얼마나 헤아릴까요.
“이제 우리 그만 만나. 난 느꼈어. 우리 사랑 깊어질수록 후회만 남는다는걸. 영어도 아니고, 수학도 아니고, 가정 선생님에게 내 인생을 맡긴다는 건 도박이고 투기라는 걸 알았어. 어딘가에 자기에게 맞는 여성이 있을 거야. 하지만 난 아냐. 안녕.(2권 112쪽)”
김수정 님이 1987년부터 〈하이틴〉이라는 잡지에 그렸던 만화 《소금자 블루스》(서울문화사,1990)를 펼쳐 봅니다. 1980년대에 여고생이던 아이들 눈물과 콧물과 웃음이 담뿍 담겨 있는 가운데, ‘접장질’ 소리를 듣는 학교 교사들 아픔과 슬픔과 기쁨이 소롯이 배어 있습니다.
“질문 있습니다. 선생님은 영원한 자유인이십니까? (1권 48쪽)” 여교장에 여선생에 여학생만 있는 학교에 처음으로 온 남선생은 아이들한테 왜 ‘장가 안 가고 혼자 사느냐’고 묻는 말을 뻔질나게 듣습니다. 남선생은 “그때 왜 나는 방관만 하고 있었을까? 그 애가 자퇴서를 들고 왔을 때 나는 왜?(1권 53쪽)” 하는 뉘우침 때문에 마음문을 좀처럼 못 엽니다.
만화 주인공 소금자는 어느 날 문득 아버지한테 “아빠, 엄마 사랑하세요?” 하고 묻습니다.
“그럼 사랑하지. 앞으로도 사랑할 거고.” “어디가 좋으세요?” “삼겹살, 등심, 갈비, 아롱사태, 맹장, 대장, 췌장 등등 … 하지만 무엇보다도 면적(뚱뚱한 살)만큼이나 넓은 엄마의 마음씨를 사랑한다 … 그리고 말이지, 넌, 네 엄마보다도 더 넓은 마음을 가졌다.(1권 86쪽)”
정치하는 분들은 이 나라 사람들 어느 대목을 좋아하거나 사랑하고 있을까요. 아니, 사랑하기나 할까요.
ㄴ. 오달자의 봄
어머니는 저한테 몸으로 삶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길과 매무새를 가르쳐 주는 한편, 집살림 꾸리기와 바깥일 하기까지도 몸으로 보여주면서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리고, 형과 제가 없는 돈을 아끼고 모아서 장만했던 만화책과 장난감을 둘이 학교 간 사이 집에서 먼 ‘공용 쓰레기통’에 내다 버려 주면서, 허튼 데에 빠지지 말고 샛눈을 팔지 말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저는 어머니한테 더할 나위 없이 많고 깊이 삶을 배웠지만, 이 하나, 만화책과 장난감 버린 일을 두고두고 잊지 못합니다. 누구한테나 백 가지 잘한 일보다 한 가지 아쉬운 일이 더 오래 남을까요. 어쩌면 그 어린 날 그렇게 버려 주었기 때문에, 더더욱 책이 소중하다고 느꼈고, 아무것도 아니라 할 장난감이나 종이조각 하나도 애틋한 역사가 됨을 깨달았습니다.
다시는 버려지지 않도록, 버려지며 없어지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그러면서 나 또한 내 이웃이나 동무한테 소중한 무엇인가를 다치게 하지 않도록 마음을 기울이게 됩니다.
“김 선생! 혹시 만화 그려서 노벨문학상 타려는 거 아니오? 히히히, 낄낄낄낄, 저런 친구도 만화를 그린다고 ……(1권 76쪽).”
1981년부터 1984년까지 〈여고시대〉라는 잡지에 실린 만화 《김수정-오달자의 봄 (1∼2)》(서울문화사,1990)을 보면, 만화를 그리는 김수정 님 자기 삶과도 같은 이야기를 보게 됩니다. 때 되면 ‘불량’이라는 도장을 찍으며 너른 터에 사람들이 머리띠와 푯말 들고 으싸으싸 하면서 만화책을 불태웠습니다. 〈여고시대〉라는 잡지에서는 김수정 님 만화를 실어 주기는 했지만, 만화를 실어 주면서 ‘만화 또한 문학이요 예술이요 문화’라고 생각했을지는 모릅니다.
“이것이 잘하는 처사인지는 모르겠지만 교사 스스로 문제 학생을 만들지는 맙시다(1권 134쪽).”
제가 학교를 다닌 1982년부터 1993년까지, 국민학생 때는 ‘불량식품 사먹는 짓거리 붙잡으’려고 교사들이 몰래 숨어서 지켜보았습니다. 중학생 때는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보지 못하게 막으’려고 교사들이 골목골목 숨어서 지켰습니다. 고등학생 때는 ‘음악방 같은 데에 가서 여학생 만나는가 싶어’ 시내에 나와서 머리 짧은 학생들을 붙잡고 이름을 적었습니다. 그런데 2008년 오늘날에도 학교 교사들은 중간ㆍ기말시험이 끝난 뒤 ‘청소년 지도’라는 이름으로 시내에 나와서 단속을 합니다.
“내 짧은 경험에 의하면, 교육이란 주입시키는 게 아니라, 느끼게 하는 것이오(2권 86쪽).”
지난날을 떠올려보면 학교에서는 틈나는 대로 소지품 검사를 했습니다. 담배나 빨간책 따위를 찾는다고 내세웠지만, 학생한테는 아무 권리가 없던 셈입니다. 학교마다 ‘교칙’이 있는데, 이 교칙은 헌법도 뛰어넘고 인권은 거들떠보지 않습니다. 어쩌면, 우리 사회에 ‘법’이 있어도, 이 법은 우리들을 지키지 않고 다그치기만 할 뿐더러, 힘과 이름과 돈 있는 이한테는 헛낚시질 하는 양과 마찬가지였을까요.
이건희 할아버지한테 ‘죄없음’이 내려졌습니다. 축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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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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