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구들아 정신 차려라, 너희들이 나라를 말아먹었다

[역사소설 소현세자 99] 백성들은 알고 있었다

등록 2008.09.16 13:57수정 2008.09.16 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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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록강. 압록강 표지석 ⓒ 이정근

압록강을 건너온 칙사일행을 맞이한 서로(西路) 연변의 관리들은 설설 기었다. 임금을 문책하러 오는 칙사다. 자칫 잘못하면 벼락이 떨어질 줄 모른다.

의주를 거쳐 황주에서 일박한 칙사일행이 여명이 밝기 전에 숙소를 출발했다. 역관 정명수가 길에 세워둔 횃불이 적다고 도사 신응망의 갓을 벗기고 개처럼 끌고 오다가 서흥에 이르러서야 풀어주었다.


칙사 일행이 한성에 도착하기 전, 평안감사 구봉서가 띄운 비밀 서찰이 죄의정 신경진에게 전해졌다. 역관 정명수를 특별대우해주면 어려운 일이 적을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품의를 받은 인조가 비국당상회의를 주재했다.

"정명수의 자급을 올려주어 그의 마음을 즐겁게 해주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하라."

"정역이 신들에게 비밀히 알려오기를 '부모의 제사를 봉영운에게 맡겼는데 영원군의 임지로 가게 되어 불편하니 가까운 고을로 옮겨 제수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리고 청수만호(靑水萬戶) 이옥련을 고을의 원이 되게 해달라고 하였습니다."

좌의정 신경진과 우의정 심기원이 합계하여 주청했다.

"봉영운을 순천군수로 바꾸고 이옥련을 문화현령으로 하라."


임금이하 대소신료들이 역관 정명수에게 목을 매는 진풍경이다. 가린과 박시가 한성에 도착했다. 인조는 그들을 양화당에서 접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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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화당. 양화당 편액 ⓒ 이정근

"내가 신하들을 단속하지 못하여 임경업이 도주하였으니 황공하고 부끄럽기 그지없소이다."

일국의 왕이 사신에게 '황공하다'고 사죄했다. 치욕이다. 이러한 광경을 즐기는 사람이 있었다. 역관 정명수다. 정명수는 조선에 어려움이 터질 때 마다 신바람이 났다. 자신의 주가가 오르기 때문이다.

"임경업이 땅속으로 꺼지거나 하늘로 올라가지 않았을 것 아니오?"

"기어코 잡으려 해도 나의 부덕으로 인해 이처럼 늦어지니 더욱 황공합니다."

"이계는 죽는 것이 마땅하나 그가 진술한 것 중에는 서로 대면하여 물어볼 일이 많이 있는데 어찌하여 미리 죽였습니까?"

"상국이 이계를 우리나라로 내보냈으니 이는 우리나라의 죄인입니다. 우리 쪽에서 처리하는 것이 무방할듯하기 때문에 감형관(監刑官)을 파견하여 그에게 처치하게 하였습니다. 그 뒤 구류하라는 명이 있어 형을 정지할 관리를 급히 보냈으나 시간이 조금 늦어 형을 집행하기 전에 미치지 못했으니 더욱 황송합니다."

"의주에 구금된 자는 이계뿐만 아니라 민응건· 김여기· 정이남이 있는데 유독 이계만 먼저 죽였으니 이는 입을 막으려는 처사가 아니오?"

"악을 주벌할 때는 반드시 괴수를 우선으로 하는 법인데 이계는 그 당시 부사로서 잠상(潛商)의 일을 선도하였기 때문에 먼저 형을 시행한 것입니다. 이계가 이미 우리나라의 일을 빠짐없이 다 말하였는데 앞으로 무슨 미진한 점이 있기에 입을 없애버리려 했겠소?"

척화5신을 압송하라

변명으로 일관하여 겨우 모면했지만 정신이 혼미해왔다. 건강이 악화되어 이형익으로부터 번침을 맞고 있던 인조는 더 이상 계속하면 쓰러질 지경이다. 정명수가 박시에게 귀엣말을 속삭였다. 다행히 칙사가 물러갔다. 한강에 나가 유람선을 타고 여흥을 즐긴 칙사가 모화관으로 돌아왔다.

"오신을 불러오라."

신익성·신익전·허계·이명한·이경여가 불려왔다. 이들은 이계가 제출한 쪽지에 거명된 인물들이다. 청나라는 이들을 척화오신(斥和五臣)이라 불렀다.

"이 자들을 결박하라."

군사들이 달려들어 두 손을 묶어 꿇어 앉혔다. 안타까운 심정으로 바라보던 신경진이 읍소했다.

"이 사람들은 무함으로 인하여 죄에 걸려들었으니 소방의 원통함을 드러낼 길이 없습니다."

"듣기 싫다. 이자들을 심양으로 끌고 갈 것이다."

그날 밤, 오신에게 칼을 씌워 차사원(差使員)으로 하여금 먼저 떠나게 했다. 온 나라가 칙사등살에 곤혹을 치르고 있는데 정명수는 챙기기에 바빴다. 대신들이 찔러준 뇌물을 닥치는 대로 후려 넣은 정명수가 이번에는 우황을 요구했다. 후환이 두려운 인조는 그에게 우황 10부를 내려주라 명했다. 삼전도에 나가 비각을 살펴본 칙사일행이 한성을 떠났다.

의주에 도착한 정명수가 김상헌이 억류생활을 하고 있는 거소를 찾았다.

"네가 척신 김상헌이냐?"

정명수가 조선을 무수히 드나들었지만 김상헌과 단독 대면은 처음이다. 김상헌이 정명수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조선국 당상관이 묻는데 왜 대답을 하지 않느냐? 관직도 없는 자가 교만하구나."

폼 새를 잡았지만 조롱하는 말투다. 김상헌이 어이가 없어 웃음을 지었다. 정명수 역시 엷은 웃음을 흘리며 목에 힘을 주었다.

"내가 무지렁이라고 너희들이 깔보지만 장유유서(長幼有序) 쯤은 알고 있다. 하지만 경어를 쓰지 않음에 불쾌하게 생각 하지 말고 지금부터 내가 하는 얘기를 잘 들어라. 내가 정3품 관직을 꿰어 찬 것은 투전판에서 딴 것이 아니다. 주상전하가 받아 라고 통사정해서 받은 관직이다. 너희들이 하늘같이 떠받드는 임금님이 사정해서 억지로 받은 관작이란 말이다."

정명수가 턱을 치켜 올렸다.

나만큼 충성한자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

"너희들은 날 나라를 배신한 놈이라고 욕하지만 이 나라에 나만큼 충성한자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 내가 중간에서 거들지 않았으면 한성에 나간 칙사가 다섯 놈만 잡아가지고 왔겠느냔 말이다. '오신(五臣) 가지고 안 된다. 국왕이 가야한다'라고 칙사가 고집 부렸으면 어떻게 되었겠느냐 말이다. 모두가 내 공이다. 공."

정명수가 '공'이라는 어휘에 힘을 주며 너풀거리는 말채찍을 거꾸로 잡고 손바닥을 탁탁 치며 김상헌의 주위를 맴돌았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김상헌은 가소로웠다.

"네가 웃고 있는 웃음이 비웃음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너의 비웃음을 비웃는다. 네가 공빈 김씨가 정실부인이 아니라고 광해임금을 무시했는데 그 임금을 쫓아내고 네가 받드는 임금이 정실자식이냐? 너희들이 하면 참사랑이고 남이 하면 부적절한 사랑이냐? 개뼈다귀 같은 인간들 같으니라구…."

정명수의 목소리가 커졌다. 광해군을 몰아낸 인조는 선조의 후궁 인빈 김씨 몸에서 낳은 정원군의 아들이 아니냐는 조롱이다.

"문과에 급제한 작자가 무신들의 한직 사과(司果)에 있었던 걸 보면 너도 어지간한 반골에 비주류였어."

광해가 그의 생모 공빈 김씨를 공성왕후로 책봉하는 고명(誥命)을 지어라는 명을 받은 김상헌은 '허물을 보면 어질고 어질지 않은 여부를 알 수 있다'는 뜻을 풍자한 관과(觀過)라는 낱말을 사용하여 삭탈관직 되었고 그가 지은 사은전문(謝恩箋文)은 폐기되었다. 이로 인하여 광해조에서 관직이 없던 김상헌은 인조반정과 함께 화려하게 복귀했다.

김상헌의 주위를 뱅뱅 돌던 정명수가 김상헌 앞에 멈췄다.

"네가 사과직에 있을 때 나는 조국의 부름을 받고 압록강을 건너 원정길에 나섰던 사람이다. 너희들이 입이 닿도록 얘기하는 명나라에 대한 보은을 위해서 말이다."

정명수가 김상헌의 주위를 뱅뱅 돌며 목에 더욱 힘을 주었다.

우물 밖 또 다른 세상을 보았다

"후대의 후손들은 돈 때문에 해외 파병에 자원할는지 모르지만 우리는 순수했다. 급료 한 푼 받지 않고 죽고 죽이는 전쟁터에 나갔으니까. 그 때 힘 있고 뒷배 있는 양반이나 사대부집 자제들은 하나도 없었다. 힘없는 백성들을 춥고 배고픈 사지에 몰아넣고 너희들은 따뜻한 아랫목에 있었다. 나쁜 놈들 같으니라고."

정명수의 눈이 증오심으로 불타고 있었다.

"강홍립장군을 모시고 전쟁터에 나갔을 때 너희들은 우물 안에 있었지만 나는 우물 밖 세상을 보았다. 그리고 깜작 놀랐다. 광해 임금님은 우리 같은 무지렁이 백성들보다 먼저 큰 세상을 보고 있었다는데 정말 놀라웠다. 임금님의 밀명을 받고 투항한 강홍립장군을 용납할 수 없다고? 에끼 눈뜬장님들 같으리라구. 너희들은 날더러 매국노라고 비난하지만 나는 너희 같은 사대부들이 이 나라를 말아먹었다고 생각한다."

광해10년. 명나라의 파병요청을 받은 광해는 후금의 위세가 두려웠지만 임진왜란 때 도와준 보은 차원에서 1만3천명의 군사를 파병했다. 도원수 강홍립은 '형세를 보아 투항하라'는 광해의 밀명을 받아 부하 군사들을 이끌고 항복했다. 그 때 만주어를 아는 정명수는 황제에게 발탁되어 역관으로 활동했고 귀국한 강홍립은 역신으로 몰려 삭탈관직 되었다.

"말이 지나치다."
"뭣이? 말이 지나치다고? 내가 힘이 지배하는 세상을 보았다고 그렇게 말을 해도 아직 말을 알아듣지 못하느냐? 힘이 무엇이라는 것을 보여줄까?"

정명수가 김상헌의 턱밑에 얼굴을 디밀었다. 김상헌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이봐라. 이자를 묶어라."

군사들이 달려들어 김상헌의 손을 묶고 그의 목에 철쇠(鐵鎖)를 채웠다.

"죄인 주제에 책은 무슨 놈의 책이냐? 이자가 보던 책을 모조리 불살라버려라."

군사들이 김상헌의 책을 끌어내어 불태워 버렸다. 정명수는 평안도 은산에서 천출의 아들로 태어났다. 은산현 관아에서 하인 노릇을 할 때, 은산을 방문한 평산 현감 홍집에게 곤장을 맞았다. 이 일이 그에게 상처가 되었다. 양반에 대한 보복심과 선비에 대한 증오심이 작동한 것이다.
#소현세자 #김상헌 #정명수 #인조 #강홍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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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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