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시렁책을 아끼는 마음만으로는 책을 찾아 읽을 수도, 책방 살림을 꾸릴 수도 없습니다. 책을 내 몸처럼 여기면서, 내가 곧 책이 되어야 합니다.
최종규
그렇지만, 아무 아쉬움 없이 살던 분이, 아무 아쉬움 느껴지지 않는 문학을 펼친 분이, ‘시를 쓰는 글감은 어떻게 얻어야 하는가’ 하는 이야기를 사람들 앞에서 들려줄 때 “군중 속으로, 시민 속으로, 현실 속으로”하고 외치는 모습을 볼 때에는 그만 입이 쩍 벌어집니다. 그래, 그러면 노천명 님이 말하는 ‘군중’은 누구이고, ‘시민’은 어디에 있으며, ‘현실’은 어떤 모습인지요?
골목 안 아주머니 넋두리가 ‘하찮’더라도 귀를 기울이라 하는데, 참말로 골목 안 아주머니 말씀은 ‘넋두리’에 지나지 않는데다가 ‘하찮’을 뿐인지요?
청계천 다리 밑 사람들은 ‘추하’고, 사대문 둘레 빈민굴 사람들도 ‘추하’며, 부랑아 가둔 곳 아이들도 ‘추할’ 뿐인가요?
책을 잘못 골랐군, 하고 생각하다가, 아니 책을 잘 골랐다, 하는 생각이 뒤이어 듭니다. 그예 친일부역자 노천명 님이라고만 말하고 있습니다만, 노천명 님은 한낱 ‘친일부역자 한 사람’이 아니라, ‘세상을 모르고 세상을 주름잡는다는 헛이름에 매인 노천명’ 님이었음을, 이 책을 펼치지 않았다면 하나도 알 수 없지 않았으랴 싶습니다.
(3) 떠난 이가 남긴 자취<한국종교사회연구소(글),황헌만(사진)-백두산>(미진사,1990)이라는 책은 사진과 글로 백두산 둘레 우리 겨레 삶터와 살림살이를 보여줍니다. 처음부터 마음먹고 ‘기록’을 하려고 다가섰구나 하고 느껴지는데, 마음만 앞선 기록이 아니라 마음이 따뜻한 기록이다 보니, 이제까지 보아 온 다른 ‘백두산 이야기’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깊이와 너비를 느낍니다. 그러고 보면, ‘미진사’라는 출판사에서 나온 책은 하나같이 남다르지 않았던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미술과 예술과 디자인 쪽 책을 즐겨 펴내는 곳인데, 이곳에서 겨레 문화를 다룰 때에는 이만한 깊이와 너비가 되는 셈이라 할까요.
이제는 거의 사라졌다고 할 만한 ‘연변조선족자치주 시골마을 살림집’ 모습을 사진 몇 장으로 들여다보는 내내, “조선족이 살고 있는 전통적인 마을 모습이다. 초가지붕과 회벽 그리고 통나무굴뚝 등이 특히 눈길을 끌고 있다”고 하는 사진말과 함께 사진이 한결같이 가없이 구수하고 살갑다고 느껴집니다.
짚으로 이은 지붕과 싸리로 묶은 빗자루 들을 찍은 사진은, 사진으로 들여다보기만 하여도 잘 알아볼 수 있습니다. 이러는 가운데 사진작품으로도 멋스러움을 잃지 않습니다. 사람을 찍은 사진도, 집살림 안쪽을 찍은 사진도, 저잣거리를 찍은 사진도 어설픈 ‘인물 중심 예술 초상 사진’에 빠지지 않는 한편, 멋없는 기록으로 빠지지 않습니다. 책을 엮는 이하고 사진 찍는 이가 잘 어우러졌구나 싶으면서, 사진 찍은 이가 사진 찍히는 연변조선족 사람하고 마음이 잘 맞고 이어졌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Duby Tal(사진)/Moni Haramati(글)-skyline Jerusalem>(Mod Pub,1994)을 집어듭니다. 요즈음은 어떠할는지 모르지만, 사진에 담긴 이무렵 이스라엘 집들은 높이가 골고루 낮아서 집집마다 햇볕을 골고루 쬘 수 있습니다. 우리 나라도 사람들 살림집이 이렇게 어슷비슷한 높낮이로 이루어진다면 서로서로 이웃사촌으로 여길 수 있지 않으랴 싶습니다. 집을 짓는 데 들어가는 돌이나 흙이나 나무나 짚이 어슷비슷하다면, 더 높은 집도 낮은 집도 없을 테며, 집을 허물 때 자연에 쓰레기가 생기지 않고, 새로 지을 때에도 자연을 망가뜨리지 않습니다.
땅에서 뒹구는 삶이 아름다우면, 하늘에서 가만히 내려다볼 때에도 새삼스레 아름다웁지 않으랴 싶습니다.
<a day in the life of Israel>(Collins,1994)은 하루 동안 어느 한 나라 삶을 담아낸 사진작품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스라엘 이야기는 오래도록 못 찾고 있었는데, 마침 “하늘에서 내려다본 이스라엘” 사진책과 함께 들어와서 운좋게 집어듭니다. 이 좋은 사진책을 기꺼이 내놓아 준 이름모를 분한테 고맙다는 인사를 새삼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