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사람] 한국전쟁 초기의 세 가지 미스터리

[김갑수 한국전쟁 역사팩션 3회] '두 청년'

등록 2009.02.03 16:14수정 2009.02.03 2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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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7월 1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인민무력부 감찰장교 조수현은 서울사령부에 부임했다. 감찰사령부는 종로 2가 화신백화점 건물에 자리잡고 있었다. 부장에게 신고를 마친 그녀는 2층 집무실에 마련된 책상 앞에 앉아 모자를 벗었다. 그녀는 손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닦았다. 태풍 엘시의 뒤끝으로 창밖 하늘은 잔뜩 흐려 있었고 실내 공기는 무척 무더웠다.

조수현은 책상에 놓인 서류를 열어보려다 말고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갔다. 그녀는 수돗물을 틀었다. 평소 화장을 하지 않는 그녀는 마음 놓고 찬물 세수를 할 수 있었다. 그녀는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조수현은 평양에서 트럭을 타고 서울까지 열 시간 이상을 달려왔다. 트럭 뒤에 앉은 병사들은 단정한 외모의 여자 장교가 선임탑승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한 손으로 소련제 소총을 잡은 채, 쉬지 않고 군가를 불러댔다. 

장군님은 명사수 우린 명중탄/격동 상태 순간에 병사는 산다./멸적의 방아쇠 당기신다면/ 단방에 아성을 박살내리라/라랄 랄랄라 라랄 랄랄라/장군님은 명사수 우린 명중탄

조수현은 피식 웃고 말았다. 군가는 언제 들어도 실감이 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동두천을 거쳐 의정부를 지나자 갑자기 T-34 탱크들이 왼쪽 도로에서 나와 그녀가 탄 트럭을 추월해 갔다. 삽시에 도로는 황토 먼지로 뿌옇게 뒤덮였다. 그녀는 운전병에게 물었다.

“웬일로 전차가 전방에 가 있지 않고 이곳에서 나타나는 걸까요?”


그녀는 운전병에게 물은 것을 이내 후회했다. 운전병이 그것을 알 리 없었다. 창동에 이르자 격렬했던 전투 현장이 생생히 남아 있었다. 누런 먼지를 쓰며 북으로 후송되어 가는 부상병들의 모습이 간간이 나타났다. 그녀는 산봉우리 세 개가 솟아 있는 북한산 주봉으로 눈을 돌렸다. 봉우리 세 개를 합쳐 삼각산이라고 이른다는 것쯤은 그녀도 알고 있었다. 삼각산은 북한에서도 보기 어려울 정도로 수려한 여름 산세를 드러내고 있었다.

조금 지나자 양쪽 산으로 무수한 무덤들이 있는 공동묘지가 나타났다. 운전병이, “미아리 공동묘지입니다.”라고 말해 주었다.

트럭은 길음교라는 다리를 건너자 길고 높은 고개를 맞이했다. 앞서 가선 T-34 탱크들은 조금 전 미아리 삼거리에서 왼쪽 도로로 빠져 이제 보이지 않았다. 조수현은 도로 오른쪽에 세워져 있는 팻말을 보고 그 언덕이 미아리고개임을 알았다. 고개를 넘어 내려가자 전차 종점이 나타났다. 돈암동이었다. 트럭은 전찻길 위로 주행했다.

얼마 후 조수현의 트럭은 창덕궁 돌담을 끼고 오른쪽으로 돌았다. 그녀는 창덕궁의 돌담과 건축물들을 유심히 살폈다. 지붕 아래 단청이 포연에 시커멓게 그을려 있어 그녀의 마음을 안타깝게 했다. 왼쪽으로는 서울대학교 병원이 있었다.

조수현은 종로 2가 화신백화점 건물 앞에서 하차했다. 트럭의 병사들이 그녀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녀는 애틋한 시선으로 병사들을 쳐다보았다. 불과 15,6세 밖에는 되어 보이지 않는 소년이 태반이었다. 그녀는 이슥한 눈길로 멀어지는 트럭을 한참이나 보고 서 있었다. 병사들은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용산이라는 곳으로 간다고 했다.

건물에 들어선 그녀는 1층에 서점이 있는 것을 조금 이색적으로 받아들였다. 서점에는 책이 아주 많아 보였고 책을 구경하는 민간인들이 더러 있었다. 바깥과는 사뭇 다른 평화로운 분위기였다. 그녀는 부임하는 건물의 첫인상이 좋게 느껴진 것을 다행으로 생각했다.  

찬물 세안을 마친 조수현은 마음이 개운해졌다. 거울 속의 얼굴은 불그스름하게 익어 있었다. 그녀는 하얀색 크림로션을 뺨에 찍어 놓은 후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그러고는 두 손으로 모자를 단정히 눌러 쓴 후 집무실로 돌아가 다시 책상 앞에 앉았다.

조수현에게 감찰부장실을 안내하고 신고를 하게 한 박 소좌가 다가와 그녀에게 말했다.

“왜 우리 군대가 서울에 머무르고 있는지 알 수 없어요.”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한 것은 개전 3일 만인 6월 28일이었다. 그러나 인민군은 알 수 없는 이유로 사흘 동안이나 서울에서 지체하고 있었다. 전쟁의 초기 단계에서 사흘은 아주 많은 시간이다. 미군 비행기의 서울 공습이 시작되기는 했지만, 남조선군의 저항은 거의 없는 상태나 다름없었다. 특히 남조선 이승만정부의 피난은 워낙 빨라서 인민군 지휘부조차도 의아하게 여겼을 정도였다.

그런데도 인민군이 서울에서 3일씩이나 지체한 이유는 뭘까?  이것은 한국전쟁이 남긴 숱한 미스터리 중에서 첫 번째 미스터리였다.

국가문서와 한국은행권도 남기고 도망친 대한민국 정부

조수현이 인민무력부에 부임한 그 날, 대한민국 대통령 이승만과 국방장관 신성모 일행은 대구까지 도망쳤다가 허겁지겁 대전으로 올라와 있었다.

“적은 패주하고 있습니다. 정부는 여러분과 함께 서울에 머물 것입니다. 국군의 총반격으로 적은 퇴각 중입니다. 우리 국군은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을 것입니다. 우리 국군은 이 기회에 적을 압록강까지 추격하여 민족의 숙원인 통일을 달성하고야 말 것입니다. 대한민국 정부는 끝까지 서울을 사수하기로 하였습니다. 오늘 옹진반도의 국군이 북진하여 북한 해주시를 점령했습니다.”

국군이 황해도 해주를 점령했다는 대한민국 당국의 발표 역시 또 하나의 미스터리였다. 점령은 아니지만 국군이 해주 근처까지 올라간 것은 사실이었다. 옹진반도는 38선 이남의 황해도 지역으로 6월 25일 이전까지는 남한군이 주둔하고 있었는데 그곳에서 남한으로 후퇴하는 길은 해로밖에는 없었다.

그런데 이미 해로는 인민군에 의해 봉쇄되어 있었다. 그러니 국군은 38선 이북으로라도 일단 올라갔다가 남하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 경유로 인근에 해주시가 위치했다. 그래서 국군은 해주시 부근으로 돌아서 도망쳐 내려왔는데, 그것을 대한민국 당국은 해주 점령으로 부풀려 발표한 것이었다.

대한민국 당국은 관공서의 국가 문서도 치우지 않고 퇴각했다. 심지어 한국은행 지하에는 대량의 은행권까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이승만 일행은 국회 요인들에게도 통보하지 않고 서울을 빠져 나갔다. 또한 한강 이북에는 아직 4만 이상의 국군이 남아 있었지만 그들은 성급히 한강 다리를 폭파해버렸다. 이것 역시 미스터리에 속하는 일이었다.

이승만은 대전에서 마치 자기가 서울에 있는 것처럼 위장하면서, 국민들에게 고생이 되더라도 굳게 참고 있으면 적을 물리칠 수 있다고 방송했다. 전파의 목소리가 원거리 전화임을 알아챈 일부 서울 시민은 이승만이 도망쳤다고 추정했다. 그러나 대다수의 시민은 이승만의 말을 믿었다.

서울시민들이 믿었건 안 믿었건 간에, 한강 이남으로 가는 다리는 이미 동강났고, 인민군은 서울 4대문 안에 들어차 있었다. 그러므로 인민군이 사흘씩이나 서울에서 아까운 시간을 허비해야 할 이유가 하등 없는 거였다.

“아마 이 선에서 전쟁을 끝내려는 게 아닐까요?”

조수현은 북침설을 믿고 있었다. 그녀는 미군과 국군이 먼저 38선을 넘어와 인민군이 반격을 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제 공화국이 오히려 남한의 서울까지 점령한 이상, 전쟁을 확대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는 것이었다. 박 소좌는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건 아닐 테고 뭔가 이유가 있을 것이오.”

조수현은 뒤늦게야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애초 인민군은 서울을 북· 동· 서 3면으로 포위, 함락시키는 작전을 세워 놓았다. 서울로 직행하는 주력군과는 별도로 동과 서에서 진격하는 인민군은 자연이 한강 이남을 점령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렇게 될 경우 한강 도하 작전을 따로 펼칠 필요가 없게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서부 전선의 국군이 의외로 드세게 저항했다. 아울러 도강 훈련이 안 되어 있는 인민군은 임진강을 건너면서 계획보다 시간을 오래 끌었다. 거기다가 동쪽으로 밀어닥치던 인민군은 남한의 도로 사정을 세심히 파악하지 못했다. 인민군의 제1무기는 단연 T-34 소련제 탱크였다. 그들은 이 탱크를 앞세워 파죽지세로 서울로 달려올 수가 있었다.

그들은 일부 탱크들을 서울의 동부 외곽으로 배분해 쳐내려갔다. 그러나 얼마 못 가 퇴계원에 이른 그들은 T-34 탱크가 통과할 수 있는 도로가 더 이상 없다는 것을 알아야 했다. 조수현이 트럭을 타고 서울로 올 때, 의정부 인근에서 만난 탱크들은 퇴계원까지 갔다가 뒤늦게 되돌아오던 것들이었다.

결국 인민군은 서울 함락 작전에서 보이지 않는 차질을 빚은 것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3일씩이나 허송해야 할 이유는 없었다. 이것은 유엔군에게 참전할 시간을 주었고 훗날 낙동강 전투에까지 불리한 영향을 미쳤다.

혹시 인민군은 한강 도강을 준비하면서 소련 군사고문단의 하회를 기다리느라 시간을 끈 것 아니었을까? 아무튼 그 사이 되레 시간을 번 것은 미 공군이었다. 이로 인해 종로 2가 화신백화점 감찰부 건물 부근에도 무시로 공습 사이렌이 울리게 되었다.

덧붙이는 글 | 한국전쟁을 본격적으로 다루는 소설입니다. 이 소설은 약 60회 정도 연재될 예정입니다.


덧붙이는 글 한국전쟁을 본격적으로 다루는 소설입니다. 이 소설은 약 60회 정도 연재될 예정입니다.
#인민군 #이승만 #옹진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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