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사람] 정통 볼셰비키 친구 이철의 변모

[김갑수 한국전쟁 역사팩션 24] 제6장 사과벌레

등록 2009.03.29 13:01수정 2009.03.29 1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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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실의 정경은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쇠를 채워두었던 문들은 누군가가 발길로 차서 모조리 부숴놓아 버렸다. 맨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수세미처럼 구겨진 연구 문헌들이었다. 표지가 뜯긴 채 굴러다니는 양서(洋書), 휴지로 썼는지 반도 안 남은 채 나뒹구는 한서(漢書), 나름대로 노력을 기울여 만들어 놓았던 연구 카드들이 마구 구겨진 채 모퉁이에 박혀 있었다. 어렵사리 구했던 5만 분의 1 전국지도는 반쯤이나 찢겨나가 있었다.

김성식은 심란한 마음으로 연구실을 나섰다. 집에 가는 길에 그는 법전 동창 친구 철(哲)을 찾아보기로 했다. 철은 인공위 문화선전부에 있었다. 그를 만나 인민공화국에 대해 터놓고 이야기해 보고 싶었다. 전쟁 전에도 그와는 사회주의를 놓고 허물없이 대화를 주고받았었다.

철은 세상이 바뀌었다고 해서 심성이 바뀔 위인은 결코 아니라고 그는 믿고 있었다. 철은 맹목적인 공산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는 명철한 이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그에게 가 인민공화국에 실망한 이야기를 늘어놓으면 그가 무슨 말로라든지 자기를 위로해 줄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정문에서부터 난관에 부딪혔다. 불시 방문자의 출입은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철이 알면 달려 나올 것 같아 연락만 취해 달라고 말했다. 수위는 난색을 표시했다. 그는 하릴 없이 정문 위병소 주변에 서 있었는데, 한 청년이 다가오더니 그에게 인사를 했다.

"어이구, 김 선생님 아니십니까? 선생님은 저를 모르실 겁니다. 저는 선생님의 강의를 수강했던 제자입니다."

청년은 고급 당원인 듯했다. 그가 손짓하자 수위가 급히 달려 나왔다. 김성식은 얼굴도 못 알아보는 사람이 베푼 호의 덕으로 겨우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는 2층 문화선전부로 올라갔다. 마침 철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 창문으로 보였다. 그가 손짓하자 철은 자리에서 일어나 복도로 나왔다.

"야, 철아! 반갑다. 너를 만나고 싶었다. 널 만나서 너에게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았는데 이제야 왔다. 너는 오늘 두드려 맞을 각오를 해라."


뜻밖에도 철은 당혹해 하는 기색을 보였다.

"성식아, 내가 지금 너무 바쁘니 밖에서 기다려 주면 내가 점심에 맞춰 나갈게."

김성식은 아차 싶었다.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고 해도 이 바쁜 때에 예고도 없이 찾아온 것은 자기의 불찰인 듯싶었다.

그는 무려 두 시간을 기다리며 학창시절, 그리고 전쟁 전 철과 나누었던 대화들을 반추했다. 스스럼없이 이 놈 저 놈 하며 막걸리 사발을 기울였던 장면들이 마구 떠올랐다. 예컨대 북에서 전기를 끊었을 때 그는 철에게 화풀이한 일이 있었다.

"이 놈아! 남조선은 조선이 아니냐? 남조선의 산업이 엉망이 되어 백성이 헐벗고 굶주리게 되면 너희 놈들이 좋을 게 뭐 있냐? 결국은 조선 전부가 뒤처지게 되어 외국 놈들에게 수모나 당하게 되지."

"야, 인마! 내가 끊었냐? 그래도 끊은 측에는 뭔가 이유가 있겠지. 그래, 그 전기를 받아서 미국 놈들이 텅스텐이나 캐어 가고 애국자들을 잡아다 전기고문이나 해대는데 북에서 전기를 더 이상 보내주고 싶겠냐? 너 같으면 그러겠냐?"

사상하고 결혼한 것은 아니니까요

그만큼 철과는 추억을 공유한 시간이 많았다. 철은 집에도 불쑥 찾아와 며칠씩 묵고 가기도 했다. 그는 한적한 교외를 찾아 철이 머리를 식히러 온 것이려니 생각했다. 그는 기쁜 마음으로 친구를 맞이했고 여러 차례 용돈을 주기도 했다.

"당비로는 쓰지 말게. 나는 아직 공산당 하는 일이 올바른지 아닌지 모른다네."
"에이, 이 영원히 방황만 할 회색분자야."

철은 웃으며 돈을 받아 주머니에 넣고는 했다. 철이 좌익운동을 하자 그의 집에서는 그를 버린 자식 취급했다. 철의 형은 대한민국의 검찰 고급 간부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철은 집과 의절하여 밖으로 나돌았다. 그런 철이 한 여자를 만나 좋아하게 되었다. 하지만 여자 집에서는 가족과 의절한 사위를 받으려 하지 않았다.

김성식은 철의 형을 찾아가 통사정을 했다. 검찰 간부인 그는 처음에는 난감해 하다가 김성식의 부탁대로 여자의 부모를 만나기로 결정했다.

"형님 정말 감사합니다."
"무슨 말? 내가 고맙지. 우리 철이 같은 놈에게 자네처럼 좋은 친구가 있다니 형으로서 내가 할 말을 잃었네."

여자가 김성식에게 찾아온 적이 있었다.

"철은 인간적으로 다시없는 좋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사상적으로는 정통 볼셰비키입니다."

철의 여자는 명쾌하게 대답했다.

"사상하고 결혼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그때 김성식은 날아갈 듯이 기분이 좋았다. 친구가 좋은 여자와 결혼하게 되었다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정오가 지났는데도 철은 나타나지 않았다. 하던 일을 마치느라고 점심이 늦어지는 것이려니 생각했다. 그러나 그 후로도 아무런 기별조차 없었다. 그는 다시 철의 사무실로 올라가 보았다. 철은 오전 자세 그대로 책상에 앉아 일을 하고 있었다. 다만 상체를 조금 돌려 복도 창문이 보이지 않도록 하는 자세로 앉아 있었다.

김성식은 다시 1층으로 내려와 한 시간 정도를 더 기다려 주었다. 오죽 사정이 급박하면 저러랴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철은 나타나지 않았다. 급기야 그는 성난 얼굴로 철의 사무실 문을 열었다. 문 앞으로 장정 하나가 부리나케 나와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이철 동무 만나러 왔습니다."
"지금 없습니다."

김성식은 장정의 어깨 너머로 고개를 들며 말했다.

"저기 앉아 있지 않습니까?"
"아닙니다."
"아니라고요? 지금 바빠서 만나지 않아도 좋으니 다음 약속이나 하고 가려고 합니다."
"안 됩니다."

김성식은 돌아섰다. 그는 눈앞이 어찔하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점심을 굶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어차피 점심은 인민공화국 백성이 되면서 포기한 것이 아니었던가? 분명히 철은 그의 목소리를 들었을 터였다. 하지만 철은 처박은 고개를 끝내 들지 않았다. 도대체 무슨 영문인지를 알 수 없었다.

명민하고 낭만적이었던 사회주의자 철을 저다지 옹졸하게 만든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그가 학수고대하던 인민공화국 세상이 되었는데도 그는 오히려 더 위축된 것처럼 보였다. 그는 주변의 눈치나 살피는 소신 없는 공산당 초급 간부로 전락했음이 틀림없었다. 그렇다면 전쟁 전 피력했던 그들의 열정과 이상은 무엇이었나? 모두가 근거 없는 자기 과시의 치기였단 말인가?

그동안 뜻 있는 지식인일수록 대한민국의 현실에 좌절하면서 인민공화국을 선망해 온 것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철 같은 친구가 인민공화국 세상에서 저리도 옹졸하게 처신하지 않을 수 없다면 인민공화국이라고 해서 대한민국보다 하등 나을 게 없지 않겠는가? 그는 우리 민족은 참으로 불쌍한 민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집까지 걸어오는 한 시간 남짓 그는 배고픈 것도 잊어버리고 철과 사회주의자 친구들을 생각해 보았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오늘 보인 철의 태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는 영원히 그 날 철이 왜 그랬는지를 알지 못한다. 그는 집에 오자마자 자리를 펴고 누워 버렸다.

덧붙이는 글 | 사학자 김성칠 선생의 일기 <역사 앞에서>를 참조했습니다.


덧붙이는 글 사학자 김성칠 선생의 일기 <역사 앞에서>를 참조했습니다.
#볼셰비키 #문화선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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