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문패, 돌문패, 뿔문패, 새마을문패 ……

[인천 골목길마실 47] 땀과 사랑으로 빚은 골목집 문패는 '산 역사'

등록 2009.06.18 11:21수정 2009.06.18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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볕이 들지 않는 골목집 문패이지만, 한눈으로 보아도 무척 오래되었음을 느낄 수 있고, 이 집을 처음 지어서 살던 때 붙인 문패가 여태까지 이어진 셈 아니랴 싶기도 합니다. ⓒ 최종규

시골에 전원주택을 장만하여 지내시는 아버지와 어머니는 문패가 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와 어머니 사시는 집이 아파트이기만 할 때에는 문패가 없었습니다. 두 분 이름이 나란히 적힌 문패를 바라보면서 두 분이 비로소 마음과 몸을 쉴 보금자리를 마련하셨구나 하는 느낌을 받습니다.
제가 살고 있는 골목집에는 우리 문패를 붙이지 못합니다. 그러고 보면 주인집하고 윗집 사람도 따로 문패를 달지 않았습니다. 주인집은 마흔 해 넘게 이 집에서 살아오셨다는데, 그동안 문패를 한 번도 안 달으셨을까 궁금하고, 윗집은 여섯 해째 살고 있다면서도 딱히 문패를 달 마음은 없는 듯합니다.


어릴 적 골목길에서 뛰놀며 동무네 집을 찾아갈 때면, 으레 '문패를 보면서' 동무네를 찾곤 했습니다. 저는 국민학교 3학년 때 동네 할배한테서 천자문을 배워 웬만한 어른 이름을 읽어낼 수 있었기에, 한자로 적혀 있든 한글로 적혀 있든, 동무네 집에 나붙은 문패를 읽으며 동무네 아버님 이름을 외곤 했습니다. 아주 오랜만에 옛동무네에 찾아갈 때에도 코흘리개에서 스물 몇 해가 지난 오늘까지 그 집 문패가 고스란히 붙어 있는 모습을 보며 반가워 살며시 쓰다듬곤 합니다.

문패를 붙이고 있는 집은, 이 문패 역사가 아무리 짧아도 스무 해는 되지 않으랴 싶습니다. 으레 서른 해나 마흔 해쯤은 묵은 문패일 테며, 쉰 해나 예순 해를 묵었음직한 문패도 곧잘 만납니다.

우리 집살림으로서는 '내 집'이란 엄두를 못 내지만, 옆지기는 '우리는 죽는 날까지 따로 내 집을 마련하지 말고 삯집으로 흐뭇하게 지내면서, 우리 나라 곳곳에 있는 좋은 이웃을 만나러 틈틈이 돌아다니면서 살자'고 이야기합니다. 어쩌면, 앞으로도 우리는 우리 세 식구 이름을 또박또박 적어 놓은 문패 없이 살아가지 않으랴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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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 큰어른 두 분 이름을 나란히 적은 문패를 보기란 몹시 어렵습니다. 더욱이 한글로 두 분 이름을 나란히 적는 일이란, 퍽 예전 우리 나라 사회로서는 더더욱 드문 일이었습니다. ⓒ 최종규


우리 집에는 우리 문패를 붙이지 못하지만, 다른 집을 돌아보면서 온갖 문패를 구경해 보는 가운데, 동네 하나가 어떤 발자취를 남기면서 오늘날까지 이어왔는가를 곰곰이 되짚습니다. 문패를 붙일 수 있는 집이 있는 동네는 살아 있는 동네요, 문패를 고이 지켜 줄 수 있는 정치행정은 동네 하나를 애틋하게 사랑하고 아끼는 문화이지 않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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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 때 이름(아명)’을 문패에 나란히 새겨 놓은 문패를 보면, 이 집 어르신이 이 집에서 태어나 죽 살아오지 않았는가 하고 생각해 보게 됩니다.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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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석 자만 덩그러니 박아 놓은 문패도 있습니다. 양철판에 하얀 페인트를 바른 이름패라 할 텐데, 1970∼80년대 사이에 새마을운동을 하면서 모든 집에 똑같이 새겨 박은 녀석입니다.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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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패에 아예 ‘새마을 무늬’를 박아 놓고, 이 문패를 누가 어떤 생각으로 만들어 붙이게 했는지 엿보도록 하기도 합니다.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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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패 셋 나란히 붙습니다. 모두 남자 어른 이름이라 할 텐데, 여자 어른 이름도 함께 적어 줄 수 있으면 어떠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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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로 새긴 주소패와 돌로 새긴 이름패가 나란히 붙습니다. 어느 쪽이 더 오래된 문패일까요.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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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스틱 문패(뿔문패) 옆으로 종이로 뽑아 붙인 문패가 붙는데, 이름 위에 일본글도 적어 놓았습니다.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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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역이 바뀌기 앞선 때 문패가 용케 살아남아 있는 골목집이 드문드문 있습니다. 문패를 바라보면서 우리네 옛 동네가 거쳐 온 발자취를 헤아립니다.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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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드라지는 문패가 아니더라도, 이쁜 글씨로 박은 문패가 아니더라도, 두 어른 이름 함께 적힌 문패를 만나면 싱긋 웃음이 납니다.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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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패 하나만으로도 얼마든지 ‘지역 문화재’로 삼을 수 있다고 느낍니다.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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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문패.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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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문패.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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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문패 저런 문패.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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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마을문패, 뿔문패.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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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 다시 ‘떼지 않으려고 꽉 박아’ 놓은 문패를 볼 때면, 이 집을 처음 장만하여 이제까지 살아오신 분이 이 집 하나를 얼마나 사랑하고 아끼는가를 느낍니다. 달동네 골목집이든, 가난한 동네 골목집이든, 그저 돈으로만 셈하는 집이 아니라, 사랑과 그리움과 애틋함이 온통 묻어난 보금자리를 섣불리 ‘재개발’과 ‘도시정화’라는 이름을 내걸어 몰아내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삶은 사랑입니다. ⓒ 최종규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hbooks.cyworld.com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작은자전거 : 인천+부천+수원 자전거 사랑이] http://cafe.naver.com/inbus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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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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