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인생을 살다간 사람들, 나인영과 서재필

[09-038] 보성군에서 태어난 두 사람이 겪은 근대사 격변기

등록 2009.09.02 18:11수정 2009.09.02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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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3년과 1864년에 보성군 문덕과 금곡(당시 낙안군)에서 각각 태어난 나인영과 서재필은 후세의 평가를 떠나 독립운동과 관련해서는 빼 놓을 수 없는 인물들이다. 그들의 순탄치 않은 삶은 돌아보면 근대사 격변기의 암울했던 현실을 간접적으로나마 느껴볼 수 있게 된다.

 

그들은 조선조 말에 지리적으로 매우 가까운 지역에서 1년 사이를 두고 태어나 비록 시기는 달라도 중앙 관직에서 일했고, 일본 신문물의 영향을 받아 개화파의 일원으로 활동했으며, 갑신정변과 을사오적 암살 사건을 주동하고 종국에는 중국과 미국으로 건너가 종교인과 의사로 활동한 인물들이다.

 

나인영과 서재필로 살았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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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보성군 대표적 독립운동사의 인물 나인영(나철)과 서재필(필립제이슨) ⓒ 서정일

현 보성군 대표적 독립운동사의 인물 나인영(나철)과 서재필(필립제이슨) ⓒ 서정일

서재필은 21년간 그 이름으로 살았다. 나인영은 46년간 어릴 적 이름을 간직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후, 서재필은 필립제이슨으로, 나인영은 나철로 개명하게 되는데 이름을 개명한다는 것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삶을 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하다.

 

서재필의 관직 경험은 1882년(18세) 별시문과에 합격하여 교서관부정자에 임명되었다. 1883년(19세) 일본으로 건너가 도야마 육군학교에 입학해 약 7개월간 군사훈련을 받고 1884년(20세) 귀국해 사관(士官)을 양성하는 조련국(操鍊局)에서 일한바 있다.

 

나인영의 경우엔 1891년(29세) 문과에 급제하여 승정원 가주서를 거쳐 1893년(31세) 병조사정, 같은 해 승문원 부정자가 됐고 1895년(33세)에는 징세국장에 임명되기도 했다.

 

서재필의 이름으로 그가 행한 가장 큰 사건은 그의 나이 20세 되던 해인 1884년의 '갑신정변'이다. 나인영의 삶 중에서 가장 극적인 부분은 그의 나이 44세이던 1907년 '을사오적 암살 시도'였다.

 

그러나 두 사건 모두 불발로 끝났는데 그것은 두 사람의 운명을 바꿔놓는 계기가 됐다. 갑신정변 실패 이후 서재필은 미국으로 망명해 필립제이슨으로 살아갔다. 을사오적 암살시도 실패 이후 나인영은 나철로 개명하고 대종교라는 종교에 헌신하게 되는데 결국엔 중국으로 거처를 옮기게 된다. 모두 조국을 떠날 수밖에 없게 됐고 둘 다 개명했다.

 

혹자는 "두 가지 사건이 사회전반적인 변화 시도로 보기는 어렵다"는 의견과 함께 "하층부로부터의 개혁이 아닌 상층부끼리의 변화시도라는 점에서 사회변혁이 아닌 권력투쟁으로 비춰질 수 있는 소지를 충분히 안고 있다"고 지적하고 또 "외세(일본)를 등에 업고 벌였기에 자주적이지도 않다"라고 평가절하하기도 한다.

 

물론, 사건의 중심에 선 그들이 이미 일본과 떼려야 땔 수 없는 관계가 있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서재필의 경우 일본에서 군사교육을 받은 인물이며, 나인영의 경우엔 그 사건 이전에 이미 일본을 네 차례나 비밀리에 다녀온 사실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사평가에서는 '갑신정변'과 '을사오적 암살시도'를 개화파의 사회변화 시도로 보고 있다.

 

필립제이슨과 나철로 살았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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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인영(나철)과 서재필(필립제이슨)의 동상 ⓒ 서정일

나인영(나철)과 서재필(필립제이슨)의 동상 ⓒ 서정일

타국으로 망명하고 이름까지 개명하면서 새로운 삶을 살게 된 두 사람이 가장 먼저 시도한 것은 각각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대종교'라는 종교를 창시하고 중광해 국민의 의식을 변화시켜 사회를 바꿔보려는 시도였다.

 

필립제이슨은 1896년, 독립신문을 창간해 민권운동을 전개한다. 나철은 1909년 속세와 인연을 끊고 대종교를 중광해 교리를 중심으로한 민족운동을 전개한다. 독립신문과 대종교는 '민족의 뿌리를 찾고 자주자강 하자'는 것에서 공통분모를 찾아볼 수 있다.

 

최초의 민간신문이면서 한글신문이라는 '독립신문'과 단군을 중심으로 천지인, 즉 신과 물질과 인간의 조화로움 속에서 홍익인간 구현을 목표로 둔 '대종교'는 철저히 외세를 배격한 '자주적으로 일어섬'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철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을 산 세월은 7년 정도로 그리 길지 않았다. 일본이 대종교를 탄압하자 이에 비분강개해 1916년 유서를 남기고 순국 자정했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필립제이슨은 무려 66년 동안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의사생활과 외교활동을 했다.

 

다시 서재필과 나인영으로 돌아와 보면

 

서재필과 나인영은 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족적을 남긴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다시 서재필과 나인영으로 돌아와 보면, 그곳엔 피맺힌 가족사가 있었다. 서재필이 갑신정변을 실패하고 미국으로 망명한 이후, 부모는 음독자살했고 부인과 아들은 객사했으며 동생들은 사형당하거나 옥고를 치렀다. 나인영 또한 을사오적 암살시도 이후 유배를 당하면서 가족들의 고초는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나인영으로 46년을 살고 나철로 7년을 산 보성군 벌교읍 금곡마을 출신의 독립 운동가이며 종교가였던 한 사람, 서재필로 21년을 살고 필립제이슨으로 66년을 산 보성군 문덕면 용암리 출신의 독립 운동가이며 언론인이었단 한 사람, 한번 태어나 두 번의 인생을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그들의 아픔은 역사적, 시대적 아픔이기도 하다.

 

낙안군과 낙안군 폐군(廢郡)
현재의 순천시 외서면을 비롯해 낙안면, 별량면 일부, 보성군 벌교읍 그리고 고흥군 동강면, 대서면 일부의 땅은 옛 낙안군이었다. 하지만 101년 전인 지난 1908년 10월 15일, 일제는 항일투쟁무력화, 동학혁명진원지분산, 침략거점도시화를 위해 낙안군 자체를 없애버리고 주민들을 인근 지역 세 곳으로 강제 편입시켰다.

덧붙이는 글 | 예고: [09-039] 낙안군의 관문 진석포를 찾아서
남도TV

2009.09.02 18:11 ⓒ 2009 OhmyNews
덧붙이는 글 예고: [09-039] 낙안군의 관문 진석포를 찾아서
남도TV
#낙안군 #남도TV #서재필 #나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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