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홀홀" 종합선물세트 받은 할머니의 웃음

환자가 적어도 속타지 않는 공중보건의의 여유

등록 2011.05.19 09:48수정 2011.05.19 0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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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료실 풍경 한방 진료실 ⓒ 최성규


매년마다 공중보건의는 근무지 이동을 할 수 있다. 상급기관의 명령이 아닌, 자신의 의지에 따라 옮겨 가는 것이다. 정들었던 전남 고흥군 나로도에서 2년 생활을 마치고 새로운 보건지소로 옮긴 날, 모든 게 바뀌었다.


마을과 진료실 풍경이 낯설다. 무엇보다도 오전 9시부터 줄지어 앉아 있던 어른들 행렬이 사라졌다. 그때는 9시 반 정도면 스무 명의 환자가 대기했다. 마을이 밀집한 나로도에 비해 부락이 여기저기 흩어진 이곳의 환자 수는 평소 하루에 10명 이내. 거기다가 공중보건의 이동으로 인한 의료공백이 환자 수를 더 줄여버렸다.

넓어진 진료실 공간만큼 커진 자유시간을 주체할 수가 없다. 책상에 앉아 있는 자세가 영 어색하기만 하다. 밥을 먹고 이를 닦지 않은 것처럼 해야 할 일을 못한 찝찝함이랄까. 정신없이 바빴던 나로도에서는 내 시간 가지길 간절히 바랐지만, 막상 원대로 되자 무엇을 할지 모르겠다.

딸랑. 보건소 문에 달린 종이 울린다. 침 맞으러 왔다며 지팡이를 옆에 내려놓는 할머니의 등장이 칡넝쿨마냥 어지럽던 생각들을 날려버린다.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하는, 김춘수의 시 <꽃>이 생각난다.

보건소에서
나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할머니가 나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나는
한의사가 되었다


이렇게 나는 그녀에게, 그녀는 나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었다

하릴없이 놀리던 손에 생기가 돌기 시작한다. 치료를 시작하려다 고민이 생긴다. 방법을 바꿔볼까? 모든 직업이 마찬가지겠지만, 의료인들도 치료를 하다보면 자신만의 매뉴얼을 만들어 놓고 안주하는 경향이 있다. 흔히 '루틴(Routine)'이라고 하는데, 치료방법이 체계화되는 장점이 있는 반면, 매너리즘에 빠져서 다른 방법에 대한 연구를 게을리하게 된다.

소크라테스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재산'이라고 했던 한가로운 시간. 귀중한 재산이 늘어난 김에 새로운 시도를 한다. 혈자리를 두 번씩 확인해가면서 침을 꽂는다. 침을 꽂고 나서 보사법도 해준다. 보사법은 몸에 꽂혀진 침을 시계방향, 또는 반시계방향으로 돌려주는 방법인데, 기운을 더해주거나 빼준다. 문제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는 것. 이전에는 복도에서 2시간째 기다리는 어르신들을 보면서 이런 여유를 부리기는 쉽지 않았다.

뜸도 뜬다. 아픈 무릎 주위에 몇 개씩 올린다. 상당한 시간과 수고를 필요로 하는 뜸. 하루 30, 40명 진료하던 때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지금 여기서 일어나고 있다. 이참에, 기분이다! 게르마늄 부항기까지 등장한다. 부항기 속을 불로 데워 공기를 연소시키면 피부에 착 달라붙는다. 이것도 시간과 수고를 잡아먹는 방법.

종합선물세트를 받은 할머니는 치료가 끝나자 홀홀홀 웃는다. 꽤 만족하셨는지 마을에 소문 내주겠단다. 환자 수가 늘어날 조짐이 보인다. 보통 환자가 많으면 병원 경영에는 좋지만, 의료서비스의 질은 떨어진다. 환자가 적으면 의료의 질은 오르겠지만 병원은 죽을 맛이다. 이 딜레마는 의료인들의 영원한 숙제다. 국가의 녹을 먹는 공중보건의로서 이런 고민에서 자유로운 것은 참 다행한 일이다. 오늘 홀로 오신 할머니에게도 참 다행한 일이다.

덧붙이는 글 | 최성규 기자는 공중보건의입니다.


덧붙이는 글 최성규 기자는 공중보건의입니다.
#보건소 #공중보건의 #한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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