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세시까지 쑥을? 웬만해선 그들을 말릴 수 없다

아파도 농사 멈추지 않는 농촌 어르신들

등록 2011.05.26 18:36수정 2011.05.26 1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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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방진료실의 모습 ⓒ 최성규

한방진료실의 모습 ⓒ 최성규

고흥군 남양면 남양리에는 곽 할머니가 사신다. 거동이 어찌나 불편한지 지척에 위치한 보건지소에 들르기도 힘겹다. 어쩔 수 없이 지소에서 출장진료 나오기만을 오매불망 기다린다. 원래 이 정도는 아니었다.

 

불과 몇 개월 전 기막힌 일이 있었다. 나 이전에 한방진료실을 지켰던 김 선생님 때 일이다. 긴가민가하는 마음에 침을 맞으러 온 곽 할머니. 일이 되려고 그랬던지, 이틀 만에 깨끗이 나아버린 무릎. 신이 난 할머니. 다시 태어난 것 같은 자유로움. 내 다리로 땅을 딛고 서 있다는 느낌. 흥겨운 기분만 내고 끝냈으면 좋으련만 몸이 나으니 그동안 못한 일이 생각이 났던 것이다.

 

일당 5만 원에 마늘 농사를 거들었다. 자그마치 이레 동안 밭에 쪼그리고 앉아 일했다. 35만 원이 손에 들어왔지만 다리는 다시 망가져 버렸다. 더 심하게. 후회했지만 때는 늦어버렸다. 다시 지팡이를 짚고 일어서기까지 얼마만큼 시간이 들 것인지 가늠하기가 힘들다.

 

한 개인의 문제만은 아니다. 요즘 들어 한방진료실에 하루가 멀다고 들르는 고씨 할머니. 진료 중에 할머니 손을 보니 녹색 물이 손가락에 싸악 배어 있다.

 

"어머님, 뭐가 묻었나 봐요?"

"쑥을 캤다네."

 

몇 시까지 캤냐고 물으니 세시까지 캤단다. 오후냐고 물었더니 새벽이란다. 놀란 것도 놀란 거지만, 답답함이 밀물처럼 밀려든다. 이렇게 몸을 혹사하고 치료 받으면 효과가 있겠느냔 말이다. 그리스 로마신화의 '시지푸스'가 생각났다. 돌을 언덕까지 올려야 하는 수고로움보다는, 올린 돌이 어차피 언덕 아래로 내려올 거라는 허망함이 그를 더 힘들게 했다. 더 나빠지지만 않길 바라는 마음에 오늘도 침을 놨다.

 

"어르신들 돌아가시면 우리나라 농사 다 망해뿔끼다"

 

한 분이 더 있다. 아홉시 종이 울리고 진료실 문이 열리자마자 멋쩍은 미소로 들어오는 조씨 아저씨. 머리에 약간의 장애가 있으신 그분은 요즘 허리가 아프다고 한다. 어제 치료받고 나서 어땠는지 경과를 물어보았다.

 

"괜찮았어요. 근데 또 아파요."

"일하셨어요?"

"네. 일했어요. 하루종일 마늘 쫑지 뽑았어요."

 

다들 몸도 돌보지 않고 농사일에 열심이다. 아직 한창인 나도 고랑 한 줄 가꾸면 허리가 비명을 지르는데, 허리도 굽은 분들이 운동장만 한 밭에서 일하는 걸 보고 놀랄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내가 의지가 약한 것인가, 그분들의 인내심이 대단한 것인가?

 

공보의 술자리에서 한 형님이 이런 말을 했다.

 

"내가 가만히 보면 말이야. 지금 농촌은 50대도 씨가 말랐거든. 우리가 먹는 거 다 70∼80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일해가 주는거 아이겠나. 아파도 일하고 비가 와도 일하고. 그 어르신들 돌아가시면 우리나라 농사 다 망해뿔끼다."

 

초등학교 다닐 적에 학교선생님은 쌀 한 톨 한 톨이 모두 농부들의 피와 땀이라고 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그건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뼈와 살이다. 근육이 망가지고 뼈가 닳으면서도 일하는 분들이 있는 한 말이다.

#보건지소 #농사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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