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백꽃과 안개 아름답던 포구, 지금은...

[노래의 고향 ⑫] 처용가

등록 2012.08.24 19:48수정 2012.09.14 1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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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용암 안에 들어가면 제단이 놓여 있다. 아마도 처용을 제사지낼 때 쓰기 위해 설치해 둔 것 같다. 나무 사이로, 세죽마을이 있었던 곳에 공장들이 자리를 잡고 있는 광경이 보인다. ⓒ 정만진


'서울에서 바다까지 집과 담이 줄곧 닿아 있었고 초가는 한 채도 없었다. 피리소리와 노래가 길을 따라 끊이지 않고 이어졌으며, 사시사철 날씨까지 좋았다.' 지상낙원과도 같은 이 풍경은 과연 언제, 어느 나라의 이야기일까? 원문인 '自京師至於海內 比屋連墻無一草屋 笙歌不絶道路 風雨調於四時'가 삼국유사에 실려 있다는 사실을 알면 대략 짐작할 수가 있을 터이다.

삼국유사는 신라 헌강왕(875∼886) 때가 그처럼 태평성대였다고 증언한다. 삼국사기도 맞장구를 친다. 헌강왕 6년(880)의 신라는 '京都民屋相屬 歌吹連聲', '今之民間 覆屋以瓦不以茅 炊飯以炭不以薪'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서울은 민가가 서로 이어져 있고 노래와 악기소리가 끊이지 않으며' '민간에서는 기와집을 지을 뿐 띠를 덮지 않으며  숯으로만 밥을 지을 뿐 나무를 쓰지 않는다'는 뜻이다.


삼국유사의 일연과 삼국사기의 김부식이 한결같이 그렇게 말하니 아니 믿을 수도 없겠지만, 그러나 미심쩍은 것 또한 사실이다. 다른 책도 아닌 삼국사기가 그로부터 불과 10년 뒤인 889년의 신라를 가리켜 '가는 곳마다 도적이 벌떼처럼 일어났다(所在盜賊蜂起)'고 기술하고 있으니, 어쩔 것인가. 889년 원종, 애노, 891년 양길, 궁예, 892년 견훤…… 태평성대와는 거리가 아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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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헌강왕릉. 경주 남산 동쪽 비탈, 통일전과 화랑교육원 사이에 있다. ⓒ 정만진


새로운 인물의 수혈이 필요했던 신라 말기

그나저나 헌강왕은 나라가 태평성대였으므로(於是) '구름이 걷힌 바닷가'라는 뜻의 개운포(開雲浦)로 놀러나갔다(遊開雲浦). 그런데 돌아오는 길에 갑자기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게 끼어 길을 찾지 못할 지경이 되었다. 그것도 대낮에 그런 일이 발생했다. 왕이 괴이하게 여긴 것이야 당연한 일이었다.

사람들은 동해 용왕이 조화를 부려 발생한 사태라고 판단했고, 용을 위해 인근에 절을 지어주면 문제가 해소될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왕이 그렇게 하라고 명령을 내리자 이내 구름과 안개가 걷혔다. 그 후 이곳 바닷가에는 개운포라는 지명이 붙었다.

이윽고 동해 용왕이 나타났다. 용왕은 헌강왕을 찬양하며 춤을 추고 음악을 연주했다. 용왕의 일곱 아들 중 한 명은 헌강왕을 따라 서울로 왔다(一子隨駕入京). 그가 바로 처용이다.


헌강왕은 처용에게 아름다운 아내와 결혼도 시켜주고, 신라에 머물게 하려고(欲留) 벼슬도 주었다. 헌강왕은 왜 그토록 처용을 신라에 머물게 하려고 애를 썼을까.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아마도 그가 용왕의 아들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꼭 그렇게 정치적으로만 해석할 대목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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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죽마을 터에서 바라본 처용암 ⓒ 정만진


서울 밝은 달 아래
밤늦도록 노니다가
들어와 자리를 보니
다리가 넷이어라
둘은 내해건만
둘은 뉘것인고
본디 내해였지만
빼앗겼으니 어쩔 것인고

삼국유사의 처용 설화는 호사다마의 구체적 사례를 보여주는 듯 읽힌다. 좋은 일에는 으레 귀신이 따르는 법, 전염병을 옮기는 역신이 처용 부인의 미모에 혹해 사람으로 변신을 하고 나타났다. 그것도 처용의 모습으로 출현했으니 부인이야 깜쪽같이 속을 수밖에 없었다.

처용은 체념인 듯 경고인 듯 아리송한 노래를 불렀다. 역신은 처용 앞에 무릎을 꿇고 다짐했다. 앞으로 처용 본인은 물론 그의 초상화가 걸려 있는 곳에도 결코 나타나지 않겠노라고. 그 이후 신라 사람들은 처용의 얼굴을 그린 종이를 집에 붙여 병이 전염되어 오는 것을 막았다.

이제야 헌강왕이 처용을 붙들어 두려고 한 진정한 까닭이 이해된다. 처용은 인간소외의 중요 원인인 질병을 물리칠 수 있는 '외계'의 낯선 능력자였다. 신라 권력층의 기득권자 수준이 아니라 민중의 고통을 해소해줄 출중한 인물이었다. 신라는 그런 처용을 진심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열린' 나라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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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용암 너머로 거대한 공단의 모습이 보인다. ⓒ 정만진


처용암, 동백섬 거느린 아름다운 포구 개운포

처용이 나타났던 개운포, 안개 자욱한 처용 설화가 깃들어 있는 곳답게 아름다운 포구였다. 가위 모양의 포구 한가운데에 울산시 기념물 4호인 처용암이 자그맣게 떠 있고, 천연기념물 65호 동백꽃을 자랑하는 동백섬이 커다랗게 만의 입구를 막고 있는 개운포는 1980년대까지만 해도 대단한 관광지이기도 했다.

특히 동백꽃이 피는 무렵이면 개운포의 핵심 마을 세죽리에는 하루에도 수천 명의 외지 관광객이 찾아 왔고, 세죽리와 동백섬 사이에는 45인승 유람선 두 척이 쉴 새 없이 오갔다. 수십 채의 횟집들이 해안을 따라 늘어서 있었던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1992년, 동백섬은 향후 20년 동안 출입 금지 구역으로 지정되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드나들어 천연기념물이 훼손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올해 2012년, 출입 금지 해제 여부가 결정된다. 하지만 출입이 허용된다 하더라도 세죽마을에서 처용암을 바라보며 회 한 점과 소주 한 잔을 즐기는 여유는 결코 맛볼 수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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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용암에서 바라본 세죽마을 터. 즐비하던 횟집 등은 모두 철거되었고, 공단 진입로다운 광경만 보인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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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용암 안에서 바라본 공단(왼쪽)과, 사진의 오른쪽 상단에 희미하게 보이는 동백섬 풍경. 처용암과 동백섬 사이에 큰 화물선들이 둥둥 떠 있다. ⓒ 정만진


처용이 나타날 수 없는 사회 풍토, 바뀌어야

마을 자체가 없어져버렸기 때문이다. 1980년 이후 온산공단 조성이 시작되면서 처용암 앞의 세죽마을은 철거되어 집 한 채 없는 황무지로 변했고, 그곳에 살던 사람들은 모두 실향민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관광안내판과 정자 하나가 멀리서 찾아온 이를 반겨 맞이하지만, 안개 대신 공단의 악취에 짓눌린 처용암이 외황강 오염수와 동해 바닷물을 앞뒤로 맞으면서 버려진 듯 떠있는 광경 앞에서 나그네는 그저 씁쓸할 뿐이다.

공단은 처용이 아니다. 경제력은 세계 10권에 들지만 국민들이 느끼는 행복감은 50위 수준으로 현격히 떨어지는 나라, 이제라도 개진포를 회복해야 한다. 세죽마을과 동백섬에 사람의 생기가 넘치도록 만들어야 한다. 권력과 부유를 세습해온 계층 출신이냐를 뛰어넘어 어느 누구든 진심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열린 사회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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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섬으로 가는 유람선 안에서 찍은 1985년 사진. 1984년에 태어난 딸이 뭐라고 소리를 지르고 있고, 엄마가 두 손으로 부축을 하고 있다. 당시에는 사진기가 없어서 누군가가 찍어준 것이 희귀하게 지금껏 남아 있는데, 지금 같으면 아마도 무수한 작품(?)을 남겼을 것이다. ⓒ 정만진


#처용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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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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