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비스 프레슬리가 즐겨 먹은 게 이거야"

[시골한의사, 미국을 달리다] 미국 자전거 횡단 57일~59일

등록 2012.11.20 13:19수정 2012.11.20 1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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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0일 화요일

Saratoga, WY - Lamont, WY
75 mile = 120 km


새벽부터 모기가 극성이다. 속담을 바꿔야겠다. 일찍 일어나는 모기가 사람을 잡는다. 자그마한 미물과의 신경전 속에서도 찬찬히 떠오르는 해는 운치있게 다가온다.

로스(Ross)의 엄마 찾아 400마일 둘째 날이다. 75마일 떨어진 라몬트(Lamont)가 목표. 동료와 함께 이른 아침부터 라이딩하는 느낌은 생경하다. 로스가 앞서고 나는 뒤따라간다.

월컷(walcott)에 도착하여 주유소 옆에서 휴식을 가진다. 로스가 어머니에게 전화하는 동안 나는 가솔린 스토브를 주섬주섬 꺼냈다. 연료가 거의 바닥을 보이는지라 자칫하면 불을 못 피울 판이다. 주유기 옆에 늘어선 차량들 틈새에서 서둘러 스토브의 주린 배를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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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 라이더와 이지 라이더(Easy Rider)들의 만남 ⓒ 최성규


짧은 휴식 후 싱클레어(sinclair)로 향한다. 차량 통행이 빈번한 인터스테이트(Interstate) 80번을 타고 13마일 구간을 지나쳐야 한다. 자전거 출입이 가능한 주도로(State Road)나 연방도로(Federal Road)와 달리 인터스테이트(Interstate)는 차량들의 독점지대라고 알고 있던 터라 난감함이 머리를 때린다. 대체 도로가 없는 구간에서는 인터스테이트 로드(Interstate Road)도 자전거 통행이 가능하다는 로스의 말에 그제야 불안감이 누그러진다.

로스를 따라 고속도로로 들어섰다. 갓길이 충분히 넓은 데다 차량 통행도 그리 많지 않아 수월하게 싱클레어 출구로 빠질 수 있었다. 9마일을 더 가니 로린스(Rawlins)가 보이고 트랜스 아메리카 트레일 6번째 장이 끝나게 되었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듯 보였던 12장의 지도는 이제 5개만 남았다.


이제 라몬트(Lamont)까지는 33마일. 덩치도 작고 약해 보이는 로스가 한 번도 쉬지 않고 계속 달려 나간다. 자존심상 쉬어가자고 할 수 없었다. 역설적이게도 황새가 뱁새 쫓아가다 가랑이 찢어질 판이다. 몇 년 전에도 자전거 횡단에 도전했던 로스의 연륜은 쉽게 무시할 수 없다.

냉장고에 가득한 아이스크림과 음료수... 천국이 따로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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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state를 맹렬히 달리는 자전거 라이더. 다행히 차량 통행이 많지 않았다. ⓒ 최성규


마지막 4마일을 남겨두고 맞바람이 거세게 불어닥친다. 한 바퀴도 앞으로 나갈 수 없다. 저 멀리 앞서나가던 로스도 휘청거리며 핸들바를 가누지 못한다. 고생 끝에 목적지에 다다른다. 근처 가정집에서 자전거 여행자들을 위해 숙소를 제공한다.

"안녕. 나는 LB라고 해."

린다 브랜트너(Linda brantner) 아주머니. 예전 다니던 직장에서 동료들이 자신을 LB라는 닉네임으로 불렀다. 점점 듣다보니 어감이 좋아서 아예 이름을 LB로 바꿨다.

집 앞 마당에 온갖 잡동사니들이 굴러다닌다. 목재, 쇠 구조물, 의자, 테이블, 철사, 화분 등등. 마을 주민들이 하나 둘씩 기증하던 것이 어느덧 작은 동산처럼 쌓였다. 쓸 만한 소품이 있는가 하면 청소차에 당장 내버려야 할 쓰레기도 상당수 섞여 있었다.

티피(tipi)가 보인다. 유목생활을 하던 아메리카 인디언 부족들이 사용하던 텐트의 일종이다. 안이 생각보다 아늑하다. 긴 나뭇가지 여럿을 하늘로 향하게 서로 기대놓고 두꺼운 가죽천을 원뿔처럼 그 옆면에 덧댄다. 티피 천장 정중앙에는 하늘로 향하여 구멍이 뚫려 있었다. 안에서 불을 피웠을 때 연기가 잘 나가도록 도와주는 용도로 보인다.

올해 50에 접어드는 아주머니는 자전거 여행자들을 위해 집을 이렇게 꾸며왔다고 한다. 어느덧 티피는 세 개로 늘어났고 바깥에 설치된 냉장고에는 아이스크림과 음료수가 그득그득했다. 샤워시설이 없다는 점만 빼면 천국이 따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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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피(Tipi) 아름다운 우리의 보금자리 ⓒ 최성규


LB 아주머니가 사는 집은 친구인 목장주가 무상으로 임대해준 주택이다. 그 친구 목장 크기가 60만 에이커라고 하는데 자그마치 2428 km²라는 엄청난 크기다. 1에이커는 에드워드 1세(1272~1307) 시대에 황소를 부려 하루에 갈 수 있는 땅의 면적을 기준으로 정해진 면적이다. 60만 마리의 황소가 하루에 경작하는 땅의 면적이라고 한다면 웬만한 땅부자는 명함도 못 내밀 정도가 아닌가. 와이오밍에서 가장 큰 목장이라는데 우리가 오늘 힘겹게 지나쳐 온 지역이 그 목장 안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와이오밍의 대다수 목장에서는 소를 키우는데 소 한 마리를 먹이려면 40에이커의 땅이 필요하다. 비효율적인 농토의 이용. 이를 햄버거 커넥션(Hamburger connection)이라는 용어로 풀이할 수 있다. 햄버거에 들어가는 쇠고기 패티를 위해서는 많은 소가 필요하다. 목축을 위해서 삼림 지대에 불을 질러 초원지대로 만든다. 이러한 목적으로 지금도 아마존의 수많은 밀림이 연기에 뒤덮인 채 타들어가고 있다. 세계적인 햄버거 체인 맥도날드의 고객이 증가할수록 아마존은 사라져간다. 겉으로는 전혀 상관성이 없을 듯한 햄버거가 지구의 허파를 무참히 파괴한다는 사실을 새삼 느낀다.

해가 뉘엿뉘엿 서녘으로 지는 가운데 로스와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무엇보다도 여행이 끝난 다음 행로가 궁금하다.

"난 아직 계획이 없어. 포틀랜드에 도착하면 생각해 봐야지. 여러 가지 상황이 있지. 태평양 연안을 따라 샌프란시스코까지 내려갈 수도 있고 바로 버지니아로 돌아가서 일자리를 구할지도 모르지.

예전에 일하던 레스토랑이 있는데 종업원으로 취직하면 되거든. 아니면 포틀랜드로 가도 돼. 내 친구가 아는 분의 목장이 근처에 있거든. 거기서 한두 달 목장일 해서 돈을 좀 벌고 또 여행을 갈 수도 있겠지."

어느 정도 기력이 회복되자 우리는 저녁식사 준비를 서둘렀다. 서로 가진 음식을 꺼내 놓고 각자의 조합을 선보였다. 로스는 또띠야에 피넛버터와 잼을 한꺼번에 발랐다. 반신반의하면서 따라해 보았는데 맛은 상당히 괜찮았다.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 알지? 식빵에다 땅콩 버터를 바르고 바나나 하나를 통째로 넣어 먹는 걸 즐겼대. 나도 먹어봤는데 기가 막혀."

그간의 경험을 통해 얻은 조리법 하나를 나도 공유했다. 또띠야에 살사 소스와 참치를 얹는다. 살사의 매콤함과 참치의 담백함이 어울려 새로운 맛을 낸다. 시식을 해본 로스도 크게 만족한다. 이쯤 되면 황제의 식사가 부럽지 않다.

배를 채우고 우리는 헤어졌다. 로스는 트레일러에 마련된 침대로, 나는 티피 속으로. 천장에 뚫린 구멍으로 밤하늘의 별이 보였다. 그 옛날 인디언들은 하늘을 바라보며 바닥에 누웠을 것이다. 반짝이는 별무리가 총총히 눈동자에 와서 박혔겠지. 그래서 그들의 영혼도 밝게 빛났나보다. 나는 평소에 자주 하늘을 바라보며 살았던가? 우리 모두 스스로에게 물어볼 일이다.

7월 11일 수요일

Lamont, WY - Lander, WY
91mile = 146km

라몬트(Lamont)를 출발해 쉼 없이 페달을 밟는다. 오후 3시경이 되자 다시 거센 바람이 휘몰아친다. 북동풍이 몰아치면서 북쪽을 향해 가는 데 큰 지장이 생긴다. 시속 13, 14마일이 순식간에 3, 4마일로 떨어지면서 넘어질 듯 휘청거린다.

바람결에 썩은 냄새가 실려와 코 끝을 자극했다. 바람만 감도는 황야에 커다란 소 한 마리가 옆으로 누운 채 썩고 있었다. 아무 말 없이 묵묵히 자전거 페달을 밟았다.

랜더(lander)까지 9마일 남겨 둔 지점, 자전거를 잠깐 세운다. 마지막 스퍼트를 위한 숨고르기다. 여전히 위세가 대단한 바람이 우리 곁으로 휘몰아치는 가운데 로스 곁으로 밴 한 대가 미끄러지듯 멈췄다. 잠깐 동안의 대화를 끝내고 로스가 내게 손짓을 한다.

"이 아저씨가 태워준대."

차량의 뒷문을 열었더니 널따란 수납공간이 드러났다. 앞바퀴와 페니어백을 모두 떼어낸 다음 자전거를 차곡차곡 포개어놓았다.

그의 이름은 콜비(colby). 'fat fish racing'이라는 산악 자전거 팀에 속해 있는 라이더다. 역시 라이더는 라이더를 알아보는 법. 랜더 시가지까지 우리를 태워준 콜비는 명함 한 장을 건네며 작별인사를 했다. 로스는 그를 '쿨 가이'라며 치켜세웠다.

콜비 아저씨 말에 따르면 이번주 수요일부터 일요일까지 국제 산악인 축제(International climbers festival)가 열린다. 미국 전역에서 산악인들이 모여드는데 근처 산을 오르거나 유명 산악인을 초청해서 강연회를 열기도 한다. 진정 산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공원에 텐트를 치고 머무르고 있었다. 아직은 드문드문 빈 곳이 눈에 띄지만 주말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 예정이다.

공원 한쪽 야외무대에서 연극공연이 한창이다. 불과 20명 남짓한 관객들을 앞에 두고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이 연출중이다. 배우와 관객의 수가 엇비슷하다. 극의 결말에는 등장인물이 모조리 다 죽어야 한다. 여전히 살아서 설왕설래를 펼치는 배우들을 보니 끝나기까지 시간이 한참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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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 한켠에서 리어왕 연극 공연이 한창이다. ⓒ 최성규


주변을 돌아다니다 외줄타기를 하는 사람들을 본다. 두 개의 커다란 나무 밑동에 연결해서 팽팽하게 만든 줄을 사람들이 안간힘을 쓰며 올라탄다. 처음부터 끝까지 떨어지지 않고 가야한다. 일명 스택 라인(Stack line)이라고 부른다. 연습에 몰두중인 피터(peter)라는 친구에게 부탁해서 나도 도전해보았다. 한두 발짝만 가도 흔들려서 균형을 잡을 수 없다. 고도의 균형 감각이 필요한 운동이다.

텐트마다 불이 꺼지고 사방은 적막한 어둠으로 뒤덮인다. 많은 이들과 함께라는 든든함 속에서 잠이 든다. 내일은 뒤부아(Dubois)까지 74마일

"뷰티풀(Beautiful)해서 뷰트(Butte)라 지었대"

7월 12일 목요일

Lander, WY - Dubois, WY
74 mile = 119 km

랜더(lander)를 출발한 지 15마일쯤 되었을까. 포트 와샤키(fort washakie)에 도착한다. 이 곳에 사카가위아(Sacagawea)의 무덤이 있다. 1789년 또는 1790년에 쇼쇼니(Shoshone) 인디언 부족에서 태어난 사카가위아(Sacagawea)는 12살 무렵 미네타리(Minnetaree) 인디언 부족에게 납치되어 가족과 헤어지게 된다. 13살에는 투생 샤르 보노(Toussaint Charbonneau)라는 모피상에게 넘겨져 그의 아내가 되었다.

당시 미국의 3대 대통령인 토마스 제퍼슨(Thomas Jefferson)은 북서부에서 태평양까지 이르는 지역으로 탐험대를 보냈다. 탐험대의 대장인 루이스(Lewis)와 클라크(Clark)은 Bitterroot Mountains를 가로지를 때 필요한 말을 쇼쇼니(Shoshone) 족으로부터 얻기 위해 그들의 언어를 할 수 있는 사카가위아를 탐험대에 받아들인다.

눈과 비, 질병으로 고생하는 많은 탐험대원들을 약초로 치료하면서 사카가위아는 탐험대에 없어서는 안 될 인물이 되었다. 험준한 산 속에서 사카가위아는 추위 속에서 식량이 떨어졌을 때 야생 식물로 대용하는 법을 알려주고 새로운 인디언 부족을 만났을 때는 통역자로 활약을 하며 탐험대가 태평양에 무사히 도착하도록 많은 도움을 주었다.

긴 여정이 끝나고 탐험대와 헤어진 사카가위아는 1812년 어린 딸 리제트(Lizette)을 남긴 채 병으로 세상을 떠난다. 루이스와 클라크의 탐험 이후 인디언과 백인들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면서 미국인들은 사카가위아의 존재를 잊고 있었다. 1900년쯤 탐험대의 100주년 기념식이 열리면서 그녀는 재조명을 받게 되고 여성의 독립성과 진취적인 기상을 상징하는 인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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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트 와샤키(Fort Washakie). 위대한 사카가위아(Sacagawea)의 영혼이 모셔져 있는 곳. ⓒ 최성규


그녀가 묻힌 포트 와샤키(fort washakie) 인근 지역은 현재 인디언 보호구역으로 지정되었고 우리는 역사의 흔적이 켜켜이 쌓인 땅에서 자전거 바퀴를 굴린다. 근처 편의점에 들어섰던 로스가 노년의 라이더 2명을 보더니 반갑게 인사를 했다. 이럴수가, 참 좁은 세상이다. 3주 전에 캔자스에서 만났던 인연들이 다시 모였다.

불타는 노년인 조(Joe)와 가이(Guy)는 캔자스 주 토론토(Toronto)에서 점심을 먹으려 거리를 배회하다 로스를 만났다. 그 이후 이들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자주 마주치게 된다. 허드슨(Hudson)에서는 기연을 만나 가정집에 함께 머물게 되었고, 레오티(Leoti)를 마지막으로 작별인사를 하였다.(저녁 무렵 허드슨에 도착한 이들은 배고픔을 달래려 레스토랑을 찾았다. 인구 133명의 작은 마을에는 우체국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낙담한 채 방황하던 그들을 보고 한 아주머니가 불러 세웠다. 집 안으로 들어서자 음식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특별한 연회가 있을 때마다 주문받은 음식을 준비하는 집이었는데 때마침 다음날 결혼식이 있었던 것이다. 주인의 친절과 기막힌 타이밍 덕택에 세 명의 방랑객들은 그날 저녁부터 다음날 아침까지 숙식을 해결할 수 있었다.)

조는 목사님이었다. 30여 년 동안 취미생활로 자전거를 탔지만 늘 장거리 여행에 목말라 있었다. 은퇴하자마자 바로 필생의 숙원이었던 대륙 횡단에 도전 중이다. 가이는 기업 사유지를 관리하다가 은퇴했다. 한 동네에서 태어나 6살 때부터 '불알친구'였던 이 둘은 몇 십 년이 지난 지금도 변치 않는 우정을 과시하며 함께 노년의 정열을 불태우고 있었다.

동서양과 세대 차이를 뛰어넘어 만난 우리 4명은 의기투합하여 뒤부아(Dubois)로 향했다. 1500피트(457m)만큼의 오르막이 힘겹다. 시간이 서서히 지체되자 오후에 불어닥칠 맞바람이 걱정되었다.

"여러분, 인터넷으로 알아보니까 오후 3시 정도에 맞바람이 분대요. 4시에는 다시 그친다니까 그나마 다행이죠."

오른편으로 크로우허트 뷰트(Crowheart butte)가 보인다. 뷰트(Butte)는 건조지대 고원에서 벙어리 장갑 모양으로 우뚝 솟은 지형이다. 제주도의 오름마냥 우뚝 서서 아래를 굽어보고 있는 신비로운 산. 자전거 안장 위에서 함께 이 광경을 바라보던 조는 이렇게 말했다.

"뷰티풀(Beautiful)하다고 해서 뷰트(Butte)라 지었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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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우허트 뷰트(Crowheart butte) 들판에 우뚝 솟은 산. 평화로이 풀을 뜯는 피조물들을 정답게 굽어보고 있다. ⓒ 최성규


그렇다. 뷰티풀하다. 뷰트(butte)의 가호를 받는 양 수많은 소떼가 그 밑자락에서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었다.

뒤부아(Dubois)에 도착하기 5마일 전부터 길은 평탄해졌고 예상과 달리 맞바람도 없었다. 미리 도착해있던 조와 가이가 근사한 숙소까지 잡아놓았다. 근처 교회 목사님과 연락이 닿아서 예배당을 잠자리로 쓸 수 있게 되었다.

아직 날이 밝은 틈을 타 자전거를 손보고 있는데 로스가 나를 부른다.

"아무래도 잭슨은 나 혼자 가야겠어."

미안해하며 말을 잇는 그에게 오히려 내가 할 말이라며 눙을 쳤다. 나 또한 요 며칠 동안 고민했던 부분이었다. 극적으로 모자가 상봉하는 현장에 내가 끼는 게 영 어색했었다. 로스가 어머니와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내가 빠져 줘야 한다.

월든에서 만났고 사라토가, 라몬트, 랜더, 뒤부아까지 오면서 5일을 함께 했다. 내일 티탄 스퍼(teton spur)에서 우리는 길이 갈린다. 사람 사이의 정이란 묘한 것이어서 인종과 언어를 뛰어넘어 서로에게 깊이 스민다.

로스를 통해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진리를 다시 한번 깨닫는다. 25살의 식당 종업원은 나에게 트레일 믹스 배합법, 자전거 라이더의 식사법, 캠핑의 법칙을 알려주었다. 무엇보다도 도전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었다. 겉으로만 보자면 로스가 가진 명함의 무게는 매우 가벼울 것이다. 변변한 학력도 번듯한 직장도 없었다.

그에게 그런 겉모습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한국의 젊은이들이 끝없는 무한경쟁에서 스펙을 쌓고 있을 무렵, 한 미국 청년은 길 위를 달렸다. 돈이 생기는 것도 아니요, 알아봐주는 이 없지만 그는 달리고 또 달렸다. 그가 가진 인생의 여백을 추억으로 알알이 새겨 넣고 있었다. 온 몸에 문신을 불량스럽게 새겨 넣은 로스는 전혀 불량스럽지 않게 그의 인생을 만들어 나가고 있었다. 그래, 로스! 넌 최고야.
#미국 #자전거 #횡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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