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를 닮은 석불, 우연은 아니었다

[경전선 남도 800리, 삶의 풍경 39] 천불천탑의 꿈 화순②

등록 2013.07.09 17:58수정 2013.07.09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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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나리에서 화순역 가는 길 ⓒ 김종길


여행, 아흔 살 할머니의 수줍은 미소

화순군내버스터미널을 찾았다. 남평역으로 가려면 일단 광주로 나가야 했다. 버스노선을 정확히 몰라 터미널에서 길을 묻기로 했다. 조금은 궁벽해 보이는 터미널에서 매표소를 찾고 있는데 가만히 앉아 버스를 기다리는 할머니 한 분이 눈에 들어왔다. 고운 모습에 끌려 다가갔더니 놀랍게도 할머니는 머리에 비녀를 찌르고 있었다.


천궁리 2구에 사신다는 조귀순 할머니는 올해 아흔이었다. 천궁리는 화순군 동면에 있는 마을이다. 사진촬영 허락을 구했다. 여행길에서 노인 분들에게 사진 촬영을 부탁하면 늘 돌아오는 답은 한결같다. "다 늙은 거 찍으면 뭐 할꼬." 아니나 다를까. 할머니도 똑같은 말을 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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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순군내버스터미널에서 만난 조귀순(90) 할머니는 비녀를 찌르고 있었다. ⓒ 김종길


그러면서도 촬영을 시작하자 이내 한껏 웃으신다. 그 표정이 너무나 해맑아 주위 사람들도 다 같이 웃는다. 맑은 웃음에 수줍음까지 더해 아흔이라는 연세는 금세 잊히고 만다. 할머니는 유독 수줍음이 많았다. 사진을 찍는 동안 할머니는 수십 년 전 소녀의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다. 입을 가려 웃는 모습은 영락없는 새색시다.

양쪽으로 가르마를 타고 곱게 빗어 넘긴 머리에 비녀를 꽂은 모습을 보고 몰려든 사람들이 한마디씩 거든다. "참말로 고우시다!" 할머니는 더욱 부끄러워했다. 사진 몇 컷을 더 찍고 할머니께 감사의 인사를 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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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나리 민불'로도 불리는 화순대리석불입상은 경전선 옆 논가운데에 있다. ⓒ 김종길


할머니를 닮은 석불, 우연은 아니었다

터미널 주위는 화순 교통의 요지였다. 이곳에서 운주사 가는 178번, 182번 버스도 흔히 볼 수 있었다. 길 건너편에선 광주 가는 버스가 연신 멈췄다 떠나기를 반복했다. 화순공공도서관 입구 편의점 앞에서 벽나리 가는 버스를 기다렸다. 벽나리로 곧장 가는 250번 버스가 막 지나가 버려서 20여 분을 기다린 끝에 252번 버스를 탈 수 있었다. 평일인데도 버스는 만원이었다. 252번 버스는 읍내를 조금 에둘러 가서 벽나리까지 가는데 시간이 배나 걸렸다.


운 좋게도 마침 빈자리가 있었으나 얼마 가지 않아 할아버지께 자리를 양보해야 했다. 벽나리 민불을 보러 간다고 했더니 할아버지는 가장 가까운 곳에 여행자를 내려주라고 기사에게 부탁을 했다. 자리를 양보해준 고마움을 할아버지는 길안내로 갚고 있었다. "여기서 내려요." 할아버지가 큰소리로 말했고 버스는 소방서 앞에서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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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기둥과 같은 느낌을 주는 화순대리석불입상은 조선시대 후기 돌장승에서 흔히 보는 양식이다. ⓒ 김종길


들판 가운데에 석불이 있었다. 정식 명칭은 화순대리석불입상이다. 수로를 따라 논두렁을 조심조심 건너 석불로 다가갔다. 석불의 얼굴을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깜짝 놀랐다.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얼굴이었다. 아! 석불의 얼굴은 바로 아까 터미널에서 본 할머니의 얼굴이었다.

대리석불입상은 보성과 화순을 지나는 길목에 있다. 사찰에서만 볼 수 있는 불상이 개인의 기복과 마을의 안녕을 비는 길거리에서 쉽게 대하는 불상이 되면서 '민불(民佛)'로 불리었다. 그 얼굴도 부처의 엄숙함에서 벗어나 민초들의 소박한 표정이 담겨 있다. 불교와 민간신앙이 섞인 형태로 그 생김새가 매우 친근하다. 석불과 할머니의 얼굴이 닮은 것은 어찌 보면 우연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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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순군내버스터미널에서 만난 조귀순(90) 할머니는 석불을 꼭 닮았다. ⓒ 김종길


그들만의 미륵세상을 꿈꾸다

화순대리석불입상(전남문화재자료 제243호)은 문화유적이 많은 화순의 다른 지역과 달리 변변한 유물이 없어 다소 밋밋할 수 있는 화순 읍내에 홍일점과 같은 존재다. 화순읍에서 남쪽으로 경전선 철길이 달리는 논 한가운데에 있는 석불은 얼핏 보면 무슨 선돌로 보이기도 한다. 잘 자란 느티나무 두 그루를 일산삼아 서 있는 모습에서 사뭇 위엄까지 느껴진다.

가까이서 보니 석불은 제법 키가 크다. 멀리서의 위엄 있는 모습과는 달리 친근하고 해맑은 인상이다. 동그란 맨머리에 기름한 눈은 편안하다. 넓적한 코는 장승처럼 순박했고 일자형의 입은 도톰하니 작은 것이 순하다. 턱과 목이 구분되지 않고, 목 부분이 어깨로 바로 연결되어 돌기둥과 같은 느낌을 주는 조선시대 후기 돌장승에서 흔히 보는 양식이다.

석불은 돌기둥에 가까운 자연석을 사각형으로 대충 다듬은 뒤 앞쪽에 얼굴 부분만 돋을새김을 하고 나머지 턱 밑으로 내려온 몸체 부분은 선각으로 처리했다. 주변에 절터로 추정할 만한 곳은 없고 다만 동쪽으로 약 500m 떨어진 곳에 이 고장 출신인 진각국사(송광사 16국사중 제2세) 탄생설화와 관련된 학서정이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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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순대리석불입상은 당산나무 두 그루를 일산삼아 서 있다. ⓒ 김종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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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사람들은 이 석불을 '미륵'이라 부르기도 한다. ⓒ 김종길


이 민불을 마을에선 '미륵'이라고 부른다. 미륵이라. 이곳에는 한 기가 있을 뿐이지만 인근의 운주사라는 절에 가면 수백 기의 미륵이 모여 있다. 아득한 신앙의 세계에 머물던 불교를 자기들의 생활 속으로 끌어와 신앙물인 '민불'에 의탁한 것이다. 말 그대로 백성들의 부처가 된 것이다. 비록 투박하여 근엄한 외경의 대상은 아닐지라도 자기들의 삶터에 깊이 뿌리내려 마을의 안녕과 개인의 복을 빌어 그들만의 미륵세상을 꿈꾸었을 것이다. 농사철이 되면 당산나무 아래 석불을 보며 새참도 먹었을 것이고 아이들은 이 둔덕을 놀이터삼아 뛰어다녔을 것이고 뜨거운 여름에는 마을 사람들의 쉼터가 되었을 것이다. 이곳은 그 자체로 마을 사람들의 고단한 몸과 마을을 달래는 이미 작은 미륵세상이었을 게다.

르 끌레지오와 이용대 체육관

2008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프랑스의 르 끌레지오는 운주사를 찾았다가 천불천탑에 감명을 받아 <운주사, 가을비>라는 시를 쓰기도 했다. 그가 운주사라는 절에 깊이 매료된 건 운주사에 담긴 염원과 정서가 우리만의 것이 아닌 세계 보편적인 의미와 공감을 담고 있는 공간이라는 걸 증명하고 있는 것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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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순 운주사 경내의 석탑과 석불 ⓒ 김종길


소설가 황석영은 <장길산>에서 운주사를 통해 미륵의 세상으로 대미를 장식한다. 시인 정호승은 또 이렇게 읊었다.

"운주사 와불님 뵙고 / 돌아오는 길에 / 그대 가슴의 처마 끝에 / 풍경을 달고 돌아왔다. / 먼데 바람 불어와 / 풍경소리 들리거든 / 보고 싶은 내 마음이 / 찾아간 줄 알아라."

화순, 수 천 년 된 고인돌에서 아득한 시절 인간의 역사를 읽어내고, 조광조가 꿈꾸었던 이상사회와 동학농민군과 의병들이 죽음으로 이루어내고자 했고 해방 후에 화순탄광 노동자들이 바랐던 새 세상, 인간다운 세상이 있었다.  5·18 때는 화순군민들이 너릿재를 넘어 광주로 갔다. 어쩌면 그들은 이 고개를 넘으면서 새로운 세상에 대한 염원이, 결코 허황된 꿈이 아니라는 확신을 가졌을 것이다. 전국을 떠돌다 이곳 화순 동복에서 마지막으로 숨을 거둔 김삿갓, 그가 본 것은 또한 어떤 세상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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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선로가 화순탄광으로 가는 화순선이고 오른쪽 곡선 철로가 경전선이다. ⓒ 김종길


철길이 두 갈래로 나뉘었다. 남도 800리를 달리는 경전선과 화순탄광이 있는 동북으로 가는 화순선이 이곳에서 갈린다. 우리나라에서 세 번째로 석탄을 많이 캐낸다는 화순탄광의 선로는 녹슨 지 오래였다.

철로 너머로 체육관 건물이 보인다. 아, 근데 체육관 이름이 '이용대 체육관'이다. 이용대가 화순 출신인 줄은 언뜻 알고 있었지만 화순에서 이렇게 떠받드는 유명인사인 줄은 몰랐다. 나중에 2013 화순 힐링 푸드 페스티발 행사장에 들렀었는데 그곳에는 이용대 연못도 있었다. 이용대는 이곳에선 적어도 유명인사를 넘어 화순의 희망이자 열망의 대상이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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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불에서 보이는 이용대 체육관, 이용대는 이곳 화순 출신이다. ⓒ 김종길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코레일과 블로그 '김천령의 바람흔적'에도 실릴 예정입니다.
#화순대리석불입상 #이용대체육관 #운주사 #민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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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의 미식가이자 인문여행자. 여행 에세이 <지리산 암자 기행>, <남도여행법> 등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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