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티와 빤쓰와 트렁크의 차이점

[송준호 교수의 길거리 사회학]

등록 2014.03.14 09:38수정 2014.04.15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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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백화점에서 발견한 '트렁크' ⓒ 송준호


[기사 보강 : 19일 오전 11시 8분]

1982년 11월 13일, 미국 라스베이거스 시저스 펠리스 호텔 야외 특설 링에서 WBA 라이트급 복싱 세계타이틀매치가 열린다. 현지 시각으로 오후 1시. 챔피언은 25전 24승 19KO 1패의 화려한 전적을 자랑하는 미국의 레이 맨시니. 도전자는 태평양 건너 한국에서 날아온 무명의 복서 김득구 선수다.

전형적 인파이터에 돌주먹으로 정평이 난 맨시니는 당시 복싱계의 신성으로 미국인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먼저 링에 오른 김득구 선수는 챔피언 맨시니가 수많은 관중들의 열광적인 환호를 받으며 링으로 다가오는 동안 고국에 두고 온 약혼자와 그 뱃속의 아이를 떠올리며 비장한 표정으로 어금니를 질끈 깨문다.

김득구 선수는 전문가들의 예상을 깨고 1회전부터 맨시니와 난타전을 벌인다. 문외한이 봐도 기량이 열세인 그는 챔피언과 대등한 경기를 펼친다. 하지만 맨시니의 돌주먹에 온몸을 무수히 두들겨맞은 김득구 선수는 9회를 넘어서자 동공의 초점마저 흐려지기 시작한다.

운명의 14회전. 공이 울리자 맨시니는 무섭게 돌진해오는 김득구 선수의 안면에 카운터 블로에 이어 강력한 레프트 훅을 적중시킨다. 비틀거리는 김득구 선수의 턱에 맨시니의 라이트 스트레이트가 작렬한다. 링에 쓰러진 김득구 선수는 로프를 붙잡고 혼신의 힘을 다해서 일어서려 하지만 도로 나동그라지고 만다.

들것에 실려 나간 김득구 선수는 뇌출혈에 의한 뇌사상태에 빠진다. 수술을 집도한 로니 함그렘 박사가 그의 사망을 공식 확인한 것이 나흘 뒤인 11월 18일이다. 그는 김득구 선수가 경기 때 입었던 노란색 트렁크(왼쪽에는 '미림전자', 오른 쪽에는 '프로스펙스'라는 스포츠 용품업체의 휘장이 새겨진)를 자신이 갖게 해달라고 코칭 스테프에게 간곡히 요청한다. 행운을 가져다준다는 것이었다.

김득구 선수가 경기 때 입었던 반바지, 바로 그게 '트렁크'(trunk)다. 축구나 농구, 배구 같은 경기를 할 때 선수들이 입는 짧은 바지는 다 '트렁크'라는 말이다. 그뿐이 아니다. 사실은 우리가 흔히 일컫고 아랫도리에 입는 '팬티'도 어원을 따져 보면 정식 명칭은 '트렁크'다.


잘 아는 바와 같이 '트렁크'는 '자동차 짐칸'이나 '여행용 가방'을 가리키는 말이다(사실은 이 두 가지 뜻으로만 쓰인다). 그런데 사전을 찾아보면 '트렁크'는 이 둘 말고도 '운동경기 등에서 남자들이 입는 짧은 바지'라는 뜻도 있다.

그렇다면 '팬티'는 무엇인가. 미국인들이 아주 오랜 옛날에 썼던 말 중에 'panties'라는 게 있는데 이게 바로 우리가 일상적으로 입는 '긴 바지'의 뜻을 가진 말이다. 그러니까 굳이 따지자고 들면 '팬티'나 '팬츠'는 그 이름도 살갑고 정겨운 '빤쓰'가 아니라 '바지'를 가리키는 말이 되는 것이다. 


그래도 우리는 그냥 아랫도리 속옷은 남자용도 '팬티', 여자용도 '팬티'라고 오랫동안 쓰고 불러왔다. 말의 본디 뜻이야 무엇이든 상관이 없다. 그게 이제는 우리말처럼 입과 귀에 익숙해졌으니 어원과 상관없이 앞으로도 그렇게 쓰면 그만일 것이다.

바로 그 '트렁크'가 도시의 한 백화점에 다시 등장했다. '팬티'라는 친숙한 말을 두고 굳이 '트렁크'라고 쓴 게 요즘말로 좀 낯설고 생뚱맞다. 이렇게 쓴 이는 혹시 '팬티'나 '빤쓰'보다 '트렁크'가 백화점의 품격에 어울리는 말이라고 생각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덧글. 김득구 선수가 사망할 당시 약혼자의 뱃속에 있던 아이는 이미 서른 살을 훌쩍 넘긴 나이가 되었다. 그는 현재 치과의사가 되었다는데, 아버지 김득구 선수가 사망한 지 30년 만인 지난 2011년에 어머니 이영미 씨와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서 맨시니 선수를 직접 만났다고 한다. 세 사람은 식사를 함께하면서 그간의 마음고생에서 벗어나 따뜻하게 '화해'했다고 한다.
#팬티 #트렁크 #김득구 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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