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新 새로울 신(新)은 왼쪽의 나무(木)와 오른쪽의 도끼(斤)가 결합된 형태로 새로움을 나무, 도끼와 결부시켜 인식한 것으로 보인다. ⓒ 漢典
새로움은 휘발성이 강하다. 하얗게 쌓인 눈 위에 첫 발자국을 남기는 희열의 순간처럼, 혹은 새로운 휴대전화를 샀을 때 기쁨의 며칠처럼 잠시 신선함으로 머물다 이내 사라지고 만다. 산업자본이 지배하는 시대, 새로움의 증발속도는 더 빨라지고 있는 듯하다. 새로움으로 포장되어 소비되고, 어느새 낡은 것이 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리듬은 갈수록 빨라진다.
새로움은 모던한 현대인만이 누리는 특권도, 빠른 템포의 변화를 추구하는 산업사회의 전유물도 아니다. BC 1600년경, 상(商)나라를 세운 탕(湯)왕은 자신의 세숫대야에 "구일신, 일일신, 우일신(苟日新, 日日新, 又日新)"이라는 아홉 글자를 새기고, 자신의 몸에 묻은 떼를 씻듯 매일 정신을 씻고 가다듬어 제도를 새롭게 혁신해가겠다는 의지를 다졌다고 한다.
우리가 그토록 갈망하는 새로움이나 혁신의 가치가 이미 3600년 전에 이리도 간절하게 추구되었다고 생각하니 새로움이라는 것이 이미 참 늙고 오래된 화두처럼 다가와 조금은 맥이 빠지는 느낌이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 없다(天下無新事)"는 말이 어쩌면 딱 맞는 말인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이미 누군가가 생각하고 고민했던 문제 앞에서 새로울 것도 없는 고뇌를 해야 하다니 말이다.
고대인들은 새롭다는 것을 무엇을 통해, 또 어떻게 느꼈을까. 새로울 신(新, xīn)은 갑골문에서 보듯 왼쪽의 나무(木)와 오른쪽의 도끼(斤)가 결합된 형태로 원래는 땔감을 나타내는 글자였으나, 점차 새롭다는 의미로 널리 쓰이자 그 뜻을 보존하기 위해 땔감 신(薪)자를 새로 만들었다. 어쨌든 새로움의 느낌을 나무, 도끼와 결부시켜 인식한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겨우내 죽은 듯 서 있다가도 봄이 되면 새로운 잎을 틔우고, 또 새 꽃을 피워내는 나무야말로 고대인들에게 거대한 아우라가 느껴지는 새로움의 화신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그 변덕 심하고 휘발성 강한 새로움은 어쩌면 도끼질이나 고문의 도구인 신(辛)으로 살을 도려내는 아픔을 통해서만 거듭나고 유지될 수 있다는 함의를 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새로움은 그것을 고집하는 순간 어느새 증발하고, 낡은 껍질로 남기 마련이다. 때문에 예술이든 철학이든 새로움은 부단히 새로워야 겨우 그 이름을 유지할 수 있는 지난한 명제이다. 그래서 탕왕도 '날마다 새롭게'에 머물지 않고, '날마다 날마다 새롭게'에도 그치지 않고 '그리고 또 날마다 새롭게'까지 이야기하고 있는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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