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지 몇 번 만에 만난 그녀..."사모님이 알면 어쩌려고"

[홀로 배낭여행 초보자의 인도 여행기20] 바라나시에서 만난 그녀, '달려라 하니'

등록 2015.01.13 10:47수정 2015.01.13 1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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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아침 바라나시 골목길에서 인도의 전통 종교의식 중에 하나인 랑골리를 그리고 있는 할머니. ⓒ 송성영


화장터로 가기 위해 매일 아침 해 뜨기 전에 숙소를 나섰는데 오늘은 조금 늦었다. 숙소 밖으로 나서자 벌써 아침 해가 떠올라 있었다. 비좁은 골목길에 누군가 쪼그려 앉아 그림을 그리고 있다. 인도 여인, 60대 초반 할머니다. 사람들이 자신이 그린 그림을 밟고 지나가거나 말거나 아랑곳 하지 않고 그림 그리기에 몰두하고 있다.

"이게 무슨 그림이죠?"


할머니는 영어를 알아듣지 못했다. 내가 다시 손짓으로 그림을 가리키자 그때서야 알아듣겠다는 듯이 조용히 입을 뗀다.

"랑골리.. 랑골리..."
"아, 이게 랑골리라는 거구나."

할머니가 그리고 있는 것은 인도의 종교 미술이라 할 수 있는, '랑골리'(Rangoli)라는 그림이다. 랑골리는 어떤 이야기가 담긴 그림이라기보다는 신에게 가족의 안녕과 복을 기원하는 종교적인 의미가 담겨져 있는 힌두교 문양이다.

전통적으로 쌀가루나 돌가루를 이용하여 그리는 랑골리. 하루가 지나면 사람들의 발길에 사라져 버릴 것을 무얼 그리 정성을 쏟고 있을까. 문득 우리가 살아가는 삶이 그러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명을 가진 모든 것들은 언젠가는 사라지기 마련이다. 다만 죽음에 이르기까지 나름대로 생에 의미를 부여해 가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하루가 지나면 사라져 버릴 것을 빤히 알면서 매일 아침, 정성을 다해 랑골리를 그리고 있는 저 할머니처럼. 하지만 사진을 찍고 돌아서면서 문득 할머니에게 있어서 랑골리를 그리는 과정은 할머니가 믿고 있는 힌두신을 만나는 과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할머니는 삶을 풍요롭게 해주는 힌두신을 만나고 있었고 나는 죽음의 신을 만나기 위해 화장터로 향하고 있었다.


힌두신을 만나는 할머니, 죽음의 신을 만나는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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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나시 갠지스강 ⓒ 송성영


어제처럼 화장터에 앉아 있는데 그녀에게서 바라나시 역에 도착했다는 메시지를 날아왔다.

"릭샤 타고 메인가트에서 내려 달라고 하세요. 거기서 봬요."

그녀에게 메시지를 날리고 메인가트 쪽으로 이동하는데 자꾸만 눈 주변이 근질거린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날 때부터 그랬다. 별거 아니라 여겼는데 아무래도 눈병이 났나 보다. 원인이 무엇일까. 사흘 내내 화장터 코앞에서 앉아 있었기에 화장터의 잿가루가 날려 눈에 들어간 것일까. 어제 만났던 나무 그늘 밑에 외떨어져 있던 병든 강아지가 떠올랐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그 병든 강아지를 어루만지고 나서 곧 바로 손을 씻지 않았다.

다행히 라이방, 검은 안경이 있었다. 안경을 쓰고 나니 눈에 손이 덜 간다. 사실 눈병에 대한 걱정보다는 그녀가 궁금했다. 어떤 여자일까. 인도 여행 인터넷 카페를 통해 알게 된 여자였다. 카톡 메시지를 통해 인도 배낭여행은 고사하고 영어는 물론이고 비행기조차 제대로 탈 줄 모르는 초보여행자임을 실명으로 솔직하게 밝혔는데 메시지가 날아왔다.

"혹시 <오마이뉴스>에 글 쓰는 송성영, 그 분 아니세요."

반가웠다. 누군가가 날 알아준다는 것은 고맙고 반가운 일임에 틀림없다. 그녀도 인도 여행 초보자라고 했다. 그래도 영어는 좀 하겠지, 나하고는 달리 기차표 정도는 끊을 수 있겠지 싶어 며칠 정도 서로 의지하면 좋겠다 싶어 시간 맞춰 캘커타에서 만나기로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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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나시 골목길에는 더러 앉아서 쉴 공간이 있다. 병든 개처럼 혼자 떠돌아 다니다가 바라나시에서 내 글을 읽었다는 한 여성 독자를 만났다. ⓒ 송성영


내 애초 계획은 델리에서 캘커타에 있는 마더 테레사 죽음의 집에 들러, 케랄라 주와 함께 인도 공산당(맑스주의) 주 정부가 들어서 있던 서벵골, 산티니케탄을 둘러보고 바라나시로 향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델리에서 홀리 축제로 기차표 예매를 할 수 없는 바람에 캘커타로 갈 수 없었다. 그녀가 캘커타 마더 테레사 죽음의 집에서 자원봉사를 하는 동안 나는 한국인 처녀 총각들과 함께 다람살라와 암리차르를 돌아 다시 델리에서 바라나시로 왔던 것이다. 그 중간 중간에 그녀와 몇 차례의 카톡 메시지를 통해 바라나시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그게 바로 오늘이었다.

내가 두어 시간을 헤맨 끝에 겨우 찾았던 강가 메인가트를 그녀는 단박에 찾아 왔다. 그녀는 아주 당차 보였다. 이 너른 인도 땅에서 메시지 몇 차례로 생면부지의 낯선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 생소하면서 신기했다. 그녀는 캘커타에서 만났다는 중국 청년을 메인가트에서 우연히 재회했다며 몇 마디 대화를 나누고 깊은 포옹으로 헤어진다. 아주 자연스럽게 보였지만 내게는 익숙지 않은 장면이다. 저런 스스럼없는 몸짓들이 부러울 때가 있다.

내게도 남녀 간의 이성을 초월해 만나고 헤어질 때 간단한 포옹으로 애정을 나누고 싶은 마음이 있다. 하지만 나는 그런 애정 표현에는 몸이 잔뜩 굳어있다. 어려서부터 몸에 밴 남녀칠세부동석 따위의 유교적인 관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머릿속에서는 그 관습이 깨져 있다고 여기고 있지만 막상 그런 상황이 닥치면 쉽게 몸이 따라가지 않는다.

그녀는 크고 작은 배낭을 두 개씩이나 가지고 다녔다. 손에 들려 있는 가방을 챙겨주려 했는데 한사코 거부한다. 해외 배낭 여행자들은 남녀 구분 없이 자신의 짐은 자신이 챙기는 게 불문율이라는 것이다. 나는 이런 것이 잘 이해가 가질 않았다. 히말라야를 등반하는 것도 아니고, 형편에 따라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지 않겠는가. 내가 똑같이 무거운 배낭을 짊어지고 있다면 그럴 만도 한데 내 짐은 이미 숙소에 있기 때문에 얼마든지 도움을 줄 수 있었다.

메시지 몇 번 만에 만난 그녀, '달려라 하니'

우리는 곧장 숙소로 향했다. 때마침 내가 묵고 있는 숙소에 원룸이 한 칸 비어 있었다. 원룸은 3층 건물에 있었는데 그동안 나와 프랑스 청년이 3층 건물을 독차지 하다시피 쓰고 있었다. 3층에 자리한 원룸은 저렴한 숙비만큼이나 비좁고 낡았지만 그녀는 거리낌 없이 그 방을 사용하겠다고 한다.

나는 그녀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지만 그녀는 이미 내 생활 글을 통해 나를 파악하고 있었다. 내 글을 읽고 그녀가 갖고 있을 어떤 편견을 깨주고 싶었다. 우리 가족은 더 이상 책 속에서처럼 행복하지 않다. 책 속에서처럼 소박한 삶을 살아내던 아내가 더 이상 소박한 삶을 살지 않겠다며 내게 이혼을 요구하고 있다고 솔직하게 말해줬다.

며칠 내내 갠지스 강가 화장터에서 주검들과 마주하고 있어서 그랬을까. 요 며칠 존재감이 한 줄기 바람처럼 가볍게 다가왔다. 그동안 아내의 이혼 요구라는 무거운 짐을 지고 있었다. 내 안에 무겁게 자리 잡고 있는 그 고통의 짐들을 훌훌 벗어던지고 싶었다. 그래서 그런지 생전 처음 보는 그녀에게 글로는 쓸 수 없는 온갖 얘기들을 하소연하듯 시시콜콜 늘어놓았다.

글을 쓴다는 것은 끊임없이 업을 쌓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생이란 어디로 튈지 모르는 탁구공처럼 정해진 것이 없다. 하지만 책은 인쇄가 되어 나오는 순간 고정화된다. 과거에 그대로 갇혀 때로는 그 삶이 현재와 미래까지 고정시켜 놓기도 한다. 나는 때로 내 책 속에 갇혀 살아왔다.

책 속에서 말한 것처럼 농사를 지으며 최소한의 돈벌이로 돈을 벌어 최소한으로 소비하고 살아가는 소박한 삶에 대한 원칙들을 계율처럼 지키며 살고자 했다. 수행자들이 계율 속에서 깨달음이라는 자유를 찾아가듯 나 또한 그 소박한 생활을 통해 자본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자유를 찾고자 했다. 돌이켜 보면 아내는 그 계율에 숨이 막혔을 것이었다.

그런 면에서 소설 쓰기는 얼마나 편리한가. 자신의 속마음을 화자를 빌려 풀어낼 수 있고 차마 말할 수 없는 진실들을 소설이라는 장치를 빌려 쓸 수 있다. 거기다가 그럴듯한 구성이나 문장으로 좀 더 비밀스럽고 은밀하게 부풀려 쓸 수 있지 않은가.

소설 속 이야기들은 그 누구도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살아가는 이야기는 다르다. 글쓴이의 소박한 삶을 따르고 존중해 주는 독자가 있다. 글쓴이는 그 독자들에게 일정한 책임을 져야 한다. 또한 그런 책임감 때문에 사실 그대로 기록하는 일이 쉽지 않다. 사실 그대로 기록하게 되면 누군가에게 큰 상처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내 글을 통해 소박한 생활 속에서 행복을 찾아가는 우리 가족의 살아온 얘기들을 대충 알고 있었다. 내가 아내와 별거 중이며 이혼을 앞두고 있다는 사실을 털어 놓자 그녀는 예상보다 그리 크게 놀라지 않았다. 그녀는 무덤덤하게 듣고 있다가 한마디 툭 던진다.

"그동안 욕 많이 보셨네요."

나는 솔직담백한 그녀가 맘에 들었다. 내가 속에 있는 것을 털어 놓자 그녀 역시 살아온 얘기들을 쉽지 않게 꺼내 놓았다. 누구나 말 못한 사정들이 있다. 누군가에게 그 얘기를 털어 놓게 되면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이틀 전 갠지스 강가 화장터에서 만난 사내처럼, 만난 지 불과 한나절도 채 되지 않아 그녀와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온 친구처럼 가까워졌다. 한국이 아닌 인도라는 지역과 공간이 속내를 쉽게 풀어 놓을 수 있는 마법을 지니고 있었다. 그녀는 당차고 쾌활했지만, 보헤미안 흉내를 내가며 줄 담배를 뻑뻑 품어대는 자기도취에 빠진 자유분방한 여자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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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안내서를 옆에 끼고 다니는 바지런한 그녀 덕분에 새콤 달콤한 바라나시의 유명한 음료 라씨를 비롯해 저렴하고 맛난 인도 전통음식을 먹을수 있었다. ⓒ 송성영


그녀와 죽이 잘 맞는 것은 먹거리에서였다. 그녀 또한 나처럼 먹는 것에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우리는 식당에서 하루에 한두 끼의 식사를 하고 나머지는 과일이나 라씨(새콤 달콤 시원한 요구르트 맛 나는 인도 전통 음료수)로 해결했다.

그렇게 함께 마시고 먹고 같은 숙소에서 보내면서 서로 공생관계를 유지했다. 그녀는 영어도 제대로 구사하지 못해 대화 상대가 거의 없이 홀로 떠도는 내게 즐거운 말동무가 돼 주었다. 현지인 닮은 나는 여자 혼자 다니기 위험하다는 인도에서 그녀의 방패막이가 돼주었다.

그녀는 쾌활하고 활동적이었다. 이것저것 찾아 볼 것이 많아 보이는 그녀는 늘 달리는 폼으로 걷는다. 앞장서서 걷는 단발머리의 뒷모습이 마치 만화영화 <달려라 하니>를 연상케 한다. 그래서 나는 그녀에게 달려라 하니라는 별명을 지어 주었다. 그녀는 그 별명이 분에 넘친다며 좋아라 했다.

나는 달려라 하니, 그녀의 뒤를 정신없이 따라 다녔다. 엄마 치맛자락을 붙잡고 도시에 나온 촌놈처럼 어리바리 뒤따라 다녔다. 그녀는 안내서를 옆구리에 끼고 다니며 바라나시 주변의 음식점이나 가볼 만한 곳을 상세하게 찾아 다녔다. 나는 바라나시에서 사흘째 머무는 동안 가본 곳이라고는 갠지스 강가와 화장터가 전부였는데 그녀는 하루 이틀 사이에 주변 맛 집이며 라씨 집 등을 찾아냈다. 그 덕분에 저렴한 인도 식당에서 맛있는 인도 전통 음식을 배불리 맛 볼 수도 있었다.

다음날 이른 새벽, 두 눈이 부어오르고 눈곱이 끼기 시작했다. 눈병이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어김없이 화장터로 향했다. 그녀는 거리낌 없이 화장터로 따라 나섰다. 그리고 불에 타서 재가 되어 가고 있는 주검을 오랫동안 직시했다.

화장터에서 나와 메인가트을 중심으로 오른쪽 강줄기를 따라 한참을 걸었다. 가트가 끝나는 지점에서 릭샤를 타고 사르나트로 향했다. 부처님 최초의 설법지인 사르나트는 바라나시에서 10킬로미터도 채 안 되는 거리에 있다. 부처의 깨달음이 있기 이전부터 바라나시 갠지스 강가 주변에는 오늘날처럼 요가 수행자들과 힌두교의 베다 의식을 치르는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이미 부처님 이전 시기부터 바라나시는 힌두교 성지였던 것이다.

부처님 최초의 설법지인 사르나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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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 최초의 설법지에 우뚝 서 있는 사르나트의 스투파(탑). 부다가야에서 깨달음을 얻은 고타마 싯다르타는 이곳까지 250킬로미터를 맨발로 걸어와 함께 고행했던 다섯 수행자에게 최초로 설법을 했다. ⓒ 송성영


사르나트 녹야원에 들어서면 멀리 거대한 탑, 다메크 스투파(Dhamekh Stupa 직경 28.5m, 높이 43.6m의 탑. 다메크는 산스크리트어로 법(法)의 중계라는 의미이고, 스투파는 '흙으로 쌓아올린 탑'을 뜻한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부다가야 보리수 밑에서 깨달음을 얻은 고타마 싯다르타는 중생구제의 마음으로 사르나트로 향한다. 부다가야에서 사르나트까지는 장장 250킬로미터에 이르는 거리다. 바라나시 인근의 작은 마을, 사르나트 녹야원(사슴동산)에는 싯다르타와 함께 고행의 길을 걸었던 다섯 명의 수행자들이 머물고 있었다. 그렇게 고타마 싯다르타,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고 나서 이들에게 최초로 법을 펼쳤다. 하여 이곳 사르나트를 초전법륜지(初轉法輪, 처음으로 법의 수레를 굴렸다)라 이른다.

여전히 자신들의 몸을 혹사 시켜 고행을 하고 있는 다섯 명의 수행자들에게 부처님은 "악기의 줄을 너무 팽팽하게 조이면 줄이 끊어지고 줄을 너무 느슨하게 풀어 놓으면 음악을 연주할 수 없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수행자들이여 세상에 두 가지 극단이 있다. 수행자는 그 어느 한쪽도 기울어서는 안 된다. 두 가지 극단이란 무엇인가? 하나는 욕망이 이끄는 대로 관능의 쾌락에 빠지는 것이다. 그것은 천박하고 저속하며 어리석고 무익하다. 또 하나는 자기 자신을 괴롭히는데 열중하는 것이다. 그것은 피로와 고통만 남길 뿐 아무런 이익이 없다. 수행자들이여 이 두 가지 극단을 떠난 중도가 있다. 그것은 눈을 밝게 하고 지혜를 증진시키며 번뇌를 쉬고 고요하게 한다......"

인도 최초로 통일국가를 이루었던 아소카 대왕은 이곳 사르나트 녹야원이 초전법륜지임을 알리는 석주를 세웠다. 7세기에는 당나라 현장 스님은 이곳 사르나트를 찾아 '1500여 명의 스님, 높이 100미터 가까이 되는 불탑, 거대한 아소카 석주 등과 함께 수많은 불탑과 사원들이 즐비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후 이슬람교가 확산되면서 도시의 건물들은 파괴되었고 불교는 급속히 쇠퇴했다. 8세기 신라의 혜초 스님은 이곳을 순례하면서 '왕오천축국전'에 도시와 유적이 파괴되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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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나트 초전륜지. 부처님의 설법을 듣기 위해 구름떼 처럼 몰려온 수행자들이 공동체를 이루고 살았던 흔적이 남아 있다. ⓒ 송성영


탑 앞에는 동남아시아 스님들로 보이는 수행자들이 모여 앉아 명상에 잠겨 있다. 그 앞으로 개 몇 마리가 생각 없이 한가롭게 누워 있다. 한 옆에서는 탑돌이 하는 스님들도 보인다. 다메크 스투파 주변에는 옛 건물의 흔적들이 남아 있다. 현재 남아 있는 기단의 모양과 건물 배치를 통해 불상을 모신 자리며 수행자들이 머물렀을 승원터, 탑 자리 등을 대략 짐작해 본다. 이곳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기 위해 구름떼처럼 몰려온 수행자들의 공동체라고 할 수 있다.

부처님은 여기서 불교의 근본 핵심 사상인 사성제(四聖渧 네가지 성스러운 진리)와 팔정도를 설법했을 것이다. 사성제와 팔정도는 간단하게 말하자면 고집멸도(苦集滅道), 즉 고통이 있고 그 고통의 원인이 있으며 그 고통을 멸할 수 있다. 아울러 고통을 멸하는 방법이 있고 그 고통을 멸하는 방법인 여덟 가지의 도를 팔정도라 한다.

나는 그 옛날 부처님의 설법을 떠올리며 좀 더 오래 머물고 싶었지만 볼 것 많고 가고 싶은 곳 많은 그녀에게 먼저 가라 할 수는 없었다. 둘이 다니면 서로 관심사가 다르기 때문에 불편을 감수할 수밖에 없다.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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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나트 부처님 최초 설법지로 소풍나온 인도 아이들과 함께 사진을 찍었다. ⓒ 송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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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나시에 자리한 베나레스 힌두대학. 30분 이상을 걸어도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넓다. 숲속 캠퍼스에서 기타를 치고 한 옆에서는 토론을 벌이고 있는 학생들. 복잡한 바라나시 시가지와는 전혀 다른 세상이다. ⓒ 송성영


우리는 녹야원 주변에서 소풍 나온 인도 아이들을 만났다. 인도의 여느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녀석들 역시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한다. 인도 아이들과 함께 사진을 찍고 나서 인도에서 가장 큰 종교 대학이라 할 수 있는 바라나시 힌두대학을 찾아갔다. 하지만 아쉽게도 사르나트 박물관처럼 이곳 대학 박물관 역시 문을 닫는 날이었다.

바라나시에 자리한 베나레스 힌두대학은 릭샤나 자동차로 둘러 보아야 한다. 30분 이상을 걷고 또 걸어도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넓다. 더위를 식히기 위해 나무 그늘을 찾아 들어갔는데 숲속에서 한 남학생이 여학생에게 기타를 가르치고 있었고 그 옆에서 몇몇 학생들이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어지러울 정도로 복잡한 바라나시 시가지와는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지고 있었다.

다음날 바라나시까지 비행기를 타고 온 이 선생을 만났다. 오래 전 글을 통해 알게 된 이 선생은 몇 년에 한 번꼴로 어쩌다 만나는 사이다. 내가 알고 지내는 사람 중에 거의 유일하게 사업을 하는 사람이다. 한국에서 담배와 고추장을 공수해 온 이 선생에게 돈을 건네자 받지 않는다. 이 선생이 바라나시에 도착하고부터 그녀와 셋이서 함께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싸돌아 다녔다. 이 선생은 나와 그녀가 같은 숙소에서 함께 다니는 것을 보더니 야릇한 눈빛으로 말한다.

"사모님이 아시면 기분 안 좋겠네요."
"그런 눈으로 보지 말아요. 저 양반하고는 이 선생이 생각하는 그렇고 그런 사이가 아니니까. 그냥 내 글에 관심을 가졌던 독자일 뿐인데요 뭘. 그리고 애들 엄마는 내가 누구하고 다니든 전혀 관심이 없어요. 이혼에만 관심이 있지..."

보통 사람들은 남녀가 함께 다니면 뭔 일이라도 일어날 것처럼 보는 눈빛부터 달라진다. 특히 외국에서 남녀가 만나서 같은 숙소를 쓰고 함께 밥을 먹으러 다니고 있으니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의 말을 듣고 가만 생각해 보니 예전에 내가 그랬었다.

남녀가 함께 밥이라도 먹으면 뭔 일이라도 벌어질 사이처럼 공연히 곁눈질을 보냈다. 세상 물정 모르던 순진한 시절이었다. 하지만 이 선생의 눈빛은 그런 순진한 눈빛이 아니었다. 마치 바람피우는 현장을 목격한 사람처럼 같은 숙소에서 묵고 있다니까 한 방을 같이 쓰는 것이 아닐까 하는 불온한 생각을 하고 있는 듯했다.

이 선생의 말을 듣고 나는 내 자신을 냉정하게 들여다봤다. 나는 정말 그녀에게 이성적으로 아무런 감정이 없는 것일까. 아무런 감정이 없었다고 하면 그것은 거짓말일 것이다. 분명한 것은 그녀에게 점점 호감이 가고 있다는 것이었고 그게 내심 불안하게 작용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여자 몸으로 혼자 다니는 것이 위험한 인도에서 단지 나를 믿을 만한 방패막이로 삼았을 것이었다. 그녀에게 있어서 그 상대가 이 선생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나는 법적으로 배우자일 뿐인 아이들 엄마에게 몹시 지쳐 있었다. 그 누군가에게 하소연하고 지친 마음을 위로 받고 싶었는데 바라나시에서 그녀를 만났던 것이었다. 그녀에게 마음이 쏠리고 있을 무렵이었다. 우연의 일치였을까? 별거까지는 봐줄 만한데 이혼은 절대로 하지 말라며 신신당부를 했던 큰 아들 녀석이 내 페이스북에 자신이 어렸을 때 찍은 가족사진을 올려놓았다. 거기서 아내와 내가 웃고 있었다. 그날 밤 나는 눈병에 시달리면서 부처님의 말씀을 다시 한 번 떠올렸다.

"수행자들이여 세상에 두 가지 극단이 있다. 수행자는 그 어느 한쪽도 기울어서는 안 된다. 두 가지 극단이란 무엇인가? 하나는 욕망이 이끄는 대로 관능의 쾌락에 빠지는 것이다. 그것은 천박하고 저속하며 어리석고 무익하다. 또 하나는 자기 자신을 괴롭히는데 열중하는 것이다. 그것은 피로와 고통만 남길 뿐 아무런 이익이 없다."

나는 인도에 온 지 겨우 보름 만에 너무 느슨하게 마음의 줄을 풀어 놓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이 두 극단을 향해 가고 있었다. 눈병이 그냥 생긴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보이지 않는 그 어떤 기운이 내게 눈병을 통해 경고장을 내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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갠지스 강에 몸을 담궈 신에게 기도를 올리는 인도여인. 온갖 욕망을 씻어내고자 기도 하는 것일까?. 아니면 부의 욕망을 채워 달라고 기도 하는 것일까. ⓒ 송성영


#랑골리 #눈병 #달려라 하늬 #사르나트 #중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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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살리고 사람을 살릴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는 적게 벌어 적게 먹고 행복할 수 있는 길을 평생 화두로 삼고 있음. 수필집 '거봐,비우니까 채워지잖아' '촌놈, 쉼표를 찍다' '모두가 기적 같은 일' 인도여행기 '끈 풀린 개처럼 혼자서 가라' '여행자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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