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라나시 골목길에는 더러 앉아서 쉴 공간이 있다. 병든 개처럼 혼자 떠돌아 다니다가 바라나시에서 내 글을 읽었다는 한 여성 독자를 만났다.
송성영
내 애초 계획은 델리에서 캘커타에 있는 마더 테레사 죽음의 집에 들러, 케랄라 주와 함께 인도 공산당(맑스주의) 주 정부가 들어서 있던 서벵골, 산티니케탄을 둘러보고 바라나시로 향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델리에서 홀리 축제로 기차표 예매를 할 수 없는 바람에 캘커타로 갈 수 없었다. 그녀가 캘커타 마더 테레사 죽음의 집에서 자원봉사를 하는 동안 나는 한국인 처녀 총각들과 함께 다람살라와 암리차르를 돌아 다시 델리에서 바라나시로 왔던 것이다. 그 중간 중간에 그녀와 몇 차례의 카톡 메시지를 통해 바라나시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그게 바로 오늘이었다.
내가 두어 시간을 헤맨 끝에 겨우 찾았던 강가 메인가트를 그녀는 단박에 찾아 왔다. 그녀는 아주 당차 보였다. 이 너른 인도 땅에서 메시지 몇 차례로 생면부지의 낯선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 생소하면서 신기했다. 그녀는 캘커타에서 만났다는 중국 청년을 메인가트에서 우연히 재회했다며 몇 마디 대화를 나누고 깊은 포옹으로 헤어진다. 아주 자연스럽게 보였지만 내게는 익숙지 않은 장면이다. 저런 스스럼없는 몸짓들이 부러울 때가 있다.
내게도 남녀 간의 이성을 초월해 만나고 헤어질 때 간단한 포옹으로 애정을 나누고 싶은 마음이 있다. 하지만 나는 그런 애정 표현에는 몸이 잔뜩 굳어있다. 어려서부터 몸에 밴 남녀칠세부동석 따위의 유교적인 관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머릿속에서는 그 관습이 깨져 있다고 여기고 있지만 막상 그런 상황이 닥치면 쉽게 몸이 따라가지 않는다.
그녀는 크고 작은 배낭을 두 개씩이나 가지고 다녔다. 손에 들려 있는 가방을 챙겨주려 했는데 한사코 거부한다. 해외 배낭 여행자들은 남녀 구분 없이 자신의 짐은 자신이 챙기는 게 불문율이라는 것이다. 나는 이런 것이 잘 이해가 가질 않았다. 히말라야를 등반하는 것도 아니고, 형편에 따라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지 않겠는가. 내가 똑같이 무거운 배낭을 짊어지고 있다면 그럴 만도 한데 내 짐은 이미 숙소에 있기 때문에 얼마든지 도움을 줄 수 있었다.
메시지 몇 번 만에 만난 그녀, '달려라 하니'우리는 곧장 숙소로 향했다. 때마침 내가 묵고 있는 숙소에 원룸이 한 칸 비어 있었다. 원룸은 3층 건물에 있었는데 그동안 나와 프랑스 청년이 3층 건물을 독차지 하다시피 쓰고 있었다. 3층에 자리한 원룸은 저렴한 숙비만큼이나 비좁고 낡았지만 그녀는 거리낌 없이 그 방을 사용하겠다고 한다.
나는 그녀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지만 그녀는 이미 내 생활 글을 통해 나를 파악하고 있었다. 내 글을 읽고 그녀가 갖고 있을 어떤 편견을 깨주고 싶었다. 우리 가족은 더 이상 책 속에서처럼 행복하지 않다. 책 속에서처럼 소박한 삶을 살아내던 아내가 더 이상 소박한 삶을 살지 않겠다며 내게 이혼을 요구하고 있다고 솔직하게 말해줬다.
며칠 내내 갠지스 강가 화장터에서 주검들과 마주하고 있어서 그랬을까. 요 며칠 존재감이 한 줄기 바람처럼 가볍게 다가왔다. 그동안 아내의 이혼 요구라는 무거운 짐을 지고 있었다. 내 안에 무겁게 자리 잡고 있는 그 고통의 짐들을 훌훌 벗어던지고 싶었다. 그래서 그런지 생전 처음 보는 그녀에게 글로는 쓸 수 없는 온갖 얘기들을 하소연하듯 시시콜콜 늘어놓았다.
글을 쓴다는 것은 끊임없이 업을 쌓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생이란 어디로 튈지 모르는 탁구공처럼 정해진 것이 없다. 하지만 책은 인쇄가 되어 나오는 순간 고정화된다. 과거에 그대로 갇혀 때로는 그 삶이 현재와 미래까지 고정시켜 놓기도 한다. 나는 때로 내 책 속에 갇혀 살아왔다.
책 속에서 말한 것처럼 농사를 지으며 최소한의 돈벌이로 돈을 벌어 최소한으로 소비하고 살아가는 소박한 삶에 대한 원칙들을 계율처럼 지키며 살고자 했다. 수행자들이 계율 속에서 깨달음이라는 자유를 찾아가듯 나 또한 그 소박한 생활을 통해 자본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자유를 찾고자 했다. 돌이켜 보면 아내는 그 계율에 숨이 막혔을 것이었다.
그런 면에서 소설 쓰기는 얼마나 편리한가. 자신의 속마음을 화자를 빌려 풀어낼 수 있고 차마 말할 수 없는 진실들을 소설이라는 장치를 빌려 쓸 수 있다. 거기다가 그럴듯한 구성이나 문장으로 좀 더 비밀스럽고 은밀하게 부풀려 쓸 수 있지 않은가.
소설 속 이야기들은 그 누구도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살아가는 이야기는 다르다. 글쓴이의 소박한 삶을 따르고 존중해 주는 독자가 있다. 글쓴이는 그 독자들에게 일정한 책임을 져야 한다. 또한 그런 책임감 때문에 사실 그대로 기록하는 일이 쉽지 않다. 사실 그대로 기록하게 되면 누군가에게 큰 상처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내 글을 통해 소박한 생활 속에서 행복을 찾아가는 우리 가족의 살아온 얘기들을 대충 알고 있었다. 내가 아내와 별거 중이며 이혼을 앞두고 있다는 사실을 털어 놓자 그녀는 예상보다 그리 크게 놀라지 않았다. 그녀는 무덤덤하게 듣고 있다가 한마디 툭 던진다.
"그동안 욕 많이 보셨네요."나는 솔직담백한 그녀가 맘에 들었다. 내가 속에 있는 것을 털어 놓자 그녀 역시 살아온 얘기들을 쉽지 않게 꺼내 놓았다. 누구나 말 못한 사정들이 있다. 누군가에게 그 얘기를 털어 놓게 되면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이틀 전 갠지스 강가 화장터에서 만난 사내처럼, 만난 지 불과 한나절도 채 되지 않아 그녀와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온 친구처럼 가까워졌다. 한국이 아닌 인도라는 지역과 공간이 속내를 쉽게 풀어 놓을 수 있는 마법을 지니고 있었다. 그녀는 당차고 쾌활했지만, 보헤미안 흉내를 내가며 줄 담배를 뻑뻑 품어대는 자기도취에 빠진 자유분방한 여자는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