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길 옆 은행, 청와대 역사가 숨어 있었네

[백운동천을 따라 서촌을 걷다 15] 현대사가 펼쳐진 옥류동천 물길

등록 2016.03.25 11:34수정 2016.03.25 1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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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운동천의 지류인 옥류동천은 소위 소위 서촌관광을 위해 종로구에서 가장 핵심적으로 개발해 놓은 공간이다.
백운동천의 지류인 옥류동천은 소위 소위 서촌관광을 위해 종로구에서 가장 핵심적으로 개발해 놓은 공간이다.유영호

이곳 서촌여행을 떠나며 줄곧 백운동천의 물길을 따라 올라왔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백운동천의 지류인 '옥류동천'을 따라 걸어보고자 한다. 옥류동천은 인왕산 자락 옥인동의 수성동 계곡에서 흘러내려 우리은행 효자동지점에서 합류하는 물길이다. 이 옥류동천 물길이 현재 종로구에서 개발한 소위 '서촌여행'의 하이라이트다.

옥류동천이 흐르던 물길 주변에는 시인 이상의 거주지를 필두로 조선시대의 안평대군·겸재 정선 등이 머물던 곳일 뿐만 아니라 노천명·윤동주 등 일제시대의 문학가는 물론 현재도 활동하고 있는 김광규 등 문학가들의 집들이 즐비해 있다. 또 미술가 이상범·천경자·이중섭·구본웅·박노수의 집도 곳곳에 위치해 있다. 더욱이 을사오적에 경술역적으로 불리는 이완용과 조선의 마타하리로 불리는 이중간첩 김수임과 엘리스 현이 살았던 곳이다. 이제 그럼 옥류동천의 물길을 따라 격동의 한국현대사 속으로 들어가보도록 하자.


권력과 화폐의 궁합, 청와대 주거래 은행

 정부 수립 이래 가장 오랜 동안 청와대 주거래 은행의 역할을 해왔던 우리은행 효자동지점.
정부 수립 이래 가장 오랜 동안 청와대 주거래 은행의 역할을 해왔던 우리은행 효자동지점.유영호

옥류동천 물길에 접어들면서 첫 번째 만나는 건물은 '우리은행 효자동지점'이다. 본래 우리은행은 1899년 '대한천일은행'으로 출범한 이래 1911년부터 1999년까지 '상업은행'으로 불렸다.

그런데 일개 지점치고는 그 건물의 형태와 규모부터 일반 동네 지점과는 다르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왜냐하면 1968년 설립된 이래 이 효자동지점은 2003년 노무현 정부가 출범하기까지 청와대 주거래 은행이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과거 '청와대 금고'라는 명성을 얻었다. 이곳은 자동식 금고 약 100개와 수동식 금고 400개 등 총 500개의 개인금고를 보유하고 있다. 우리은행 효자동지점의 대여 금고가 최초로 언론의 조명을 받은 것은 지난1995년 노태우 전 대통령 비자금 사건 때다.

그후 노무현 정부 때 주거래 은행을 국민은행 청운동지점으로 변경했지만, 당시 성곡미술관 신정아 교수의 학력 위조 사건 때에도 이곳의 신정아 명의 개인금고에 전 김석원 쌍용그룹 회장 부인의 비자금이 보관돼 있던 것으로 드러나 세간의 이목을 끌었다.

한편, 이명박 정부 초기까지도 청와대와 거래를 유지하던 국민은행 청운동지점 역시 특혜 대출로 비판이 쏟아졌고, 결국 청와대는 2008년 이명박 대통령의 동지상고 동문인 최원병 회장이 버틴 농협으로 주거래 은행을 변경했다. 하지만 이곳 역시 이명박 대통령의 내곡동 사저 신축과 관련한 아들 이시형씨에 대한 불법대출로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이처럼 이곳에 서 있는 은행 건물은 비록 일개 지점에 불과하지만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권력과 화폐가 공생하는 모습을 상상하게 만든 곳이기도 하다.

'박제가 된 천재 시인', 이상이 살던 공간


 몇 개의 필지로 분할되어 새로 지어진 건물이지만 이 일대가 이상 삶의 거의 대부분을 보낸 공간이다.
몇 개의 필지로 분할되어 새로 지어진 건물이지만 이 일대가 이상 삶의 거의 대부분을 보낸 공간이다.유영호

우리은행 효자동지점을 지나자마자 도로 우측의 한 가옥에 '이상의 집'이라고 적힌 간판이 걸려 있다. 이곳은 2009년 문화유산국민신탁이 첫 보존재산으로 매입해 현재 문화공간으로 일반인에게 개방된 곳이다. 그런데 이곳이 시인 이상(본명 김해경)이 살던 곳이기는 하지만 현재의 건물은 이상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이를 위해 이상의 삶에 대해 간단히 이야기해보자.

이상은 1910년 부친이 이발소를 운영하던 사직동에서 태어났으나 3살 때 백부의 양자로 이곳 통인동 154번지 옮겨 성장했다. 그후 이곳에서 1933년까지 거주했으니 학창시절은 물론 총독부 건축과 기사로 근무할 당시도 이곳에 머물렀다.

 이상이 살던 집은 1933년 매매된 이후 위와 같이 필지가 분할되었고, 그 일부가 현재 '이상의 집'으로 일반인들에게 공개되고 있다.
이상이 살던 집은 1933년 매매된 이후 위와 같이 필지가 분할되었고, 그 일부가 현재 '이상의 집'으로 일반인들에게 공개되고 있다.유영호

이 집은 필지가 꽤 컸지만 1933년 주택업자에게 팔린 뒤 지금은그 필지가 분할돼 여러 집들로 새로 지어졌고, 그 가운데 하나가 지금의 '이상의 집'일 뿐이다. 그러니 이상이 살던 집은 지번상 통인동에서 154번지를 쓰는 모든 필지였다. 이러한 사실을 정확히 모르고 성급하게 등록문화재로 지정됐다 해제하는 해프닝까지 벌어졌다.

이 집에 대한 이야기는 이 정도로 하고, 어쨌든 시인 고은이 인물시집 <만인보>에서 평했듯, 건축가·문인·화가였던 이상은 당대 문화판을 뒤흔든 기행들로 천재의 신화를 쌓았다. 여기에 평론가 장석주는 아예 이상의 등장 자체를 '한국 현대문학 사상 최고의 스캔들'이라고 평했다.

학창시절 국어시간에 나는 수없이 이상에 대해 배웠지만 그의 시 어디가 독자들을 사로잡는지 여전히 모르겠다. <오감도>처럼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암호화된 문구로 활자화돼 독자인 내게 그 해석까지 요구하는 것이 불쾌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는 또 기생 금홍 등 숱한 여인들과의 퇴폐적 연애로 염문을 뿌렸고, 다방을 룸펜 문인들의 아지트로 만들어버렸다.

어쩌면 그가 어린 시절 양자로 들어가 눈치를 봤던 불우한 경험과 페결핵으로 삭아 들어가고 있던 자신의 육체에 대한 원망을 누구도 알 수 없게 활자로 쏟아놓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평생 자신의 내면을 꺼낸 적이 없다. 그래서 그의 삶은 후대 사람들로 하여금 제각기 다르게 해석되며, 편집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의 소설 <날개>의 서두에서 "박제가 된 천재"라는 주인공의 독백은 어쩌면 자신의 이야기였기에 그의 별명이 됐을지도 모르겠다.
#서촌기행 #옥류동천 #이상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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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도성 걸어서 한바퀴』(2015), 『서촌을 걷는다』(2018) 등 서울역사에 관한 저술 및 서울관련 기사들을 《한겨레신문》에 약 2년간 연재하였다. 한편 남북의 자유왕래를 꿈꾸며 서울 뿐만 아니라 평양에 관하여서도 연구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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