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당 앞에서 짝사랑하는 마리아와 뭔가 얘기를 나누고 있는 티베트 소년 승려.
송성영
점심 무렵, 다른 음식에 비해 값이 저렴한 만두 종류인 모모와 국수 종류인 자오민을 즐겨 먹던 식당 앞에서 두 사람을 보았다. 마리아는 스케치북에 소년이 얘기하는 뭔가를 부지런히 받아 적고 있었다. 마리아가 소년에게 내일 아침 라다크로 떠난다는 사실을 얘기한 것일까. 소년의 표정은 그리 밝아 보이지 않는다.
다음날 아침 마리아는 배낭을 꾸려 버스 시간에 맞춰 라다크로 떠났다. 그녀가 나와 시크교인에게 작별 인사를 나누고 떠날 무렵 티베트 소년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떠나고 나서 한 시간 쯤 지나서야 소년이 찾아왔다. 공연히 숙소 앞을 오락가락한다. 그녀가 떠났다는 사실을 알고나 있는 것일까. 소년의 얼굴이 무겁다. 그녀가 떠났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모양이다. 소년은 살포시 열려 있는 마리아가 사용했던 방문을 열어본다. 소년의 마음처럼 텅 비어 있을 것이다. 소년의 아픔이 내 먼 전생에 있었던 아픔처럼 다가온다.
그녀와 만난 시간은 나흘에 불과한 짧은 시간이었지만 소년에겐 평생 잊지 못할 시간일 것이었다. 첫 사랑을 그것도 짝사랑을 경험한 소년에게 처음 만났을 때의 그녀는 사랑과 자비가 담긴 불교 경전이나 다름없을 것이었다.
'잘 가시게 사랑하는 친구' 라는 인사말도 건네지 못했을 소년은 이제 이성간의 사랑에는 고통이 뒤 따른다는 말씀이 담긴 경전을 접하게 될 것이었다. 한동안 소년은 그 경전을 멀리하고 고통으로 몸부림 칠 것이었다. 그 견딜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승복을 벗게 될지도 모른다. 도시로 나가 사원으로 다시 돌아오지 않겠노라 작심할지도 모른다.
세파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 사랑의 상처가 치유될 무렵에는 고통의 원인이 어디서부터 오는 지를 체득하게 될 것이었다. 그리고는 부처님의 말씀에 한 걸음 다가가게 될 것이고 다시 사원으로 돌아와 진정한 수행자의 길을 걷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 날 밤, 천둥 번개가 내리치고 비가 억수같이 퍼부어 댔다. 나는 딱딱한 침대에 손을 놓고 앉아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리왈샤의 첫날밤에 마주쳤던 천둥번개는 공포 그 자체였다. 하지만 공포심이나 두려움도 익숙해지면 더 이상 공포와 두려움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다만 세상에 홀로 존재하고 있는 듯 숨 막히는 외로움이 밀물처럼 몰려왔다. 래미와 마리아 그리고 시크교인과 티베트 순례객들, 리왈샤에서 일주일을 보내며 하루 이틀 사흘 안면을 익힌 숙소 친구들은 하나 둘 본래 없었던 존재들처럼 천둥 번개 속으로 사라져 버린 것 같았다.
인도에 온 지 얼마나 되었을까. 족히 4개월 쯤 된 것 같은데 내가 걸어왔던 시간들, 가야할 길이 점점 오리무중이다. 어디로 갈 것인가. 어느 순간 백치가 된 기분이 든다. 머릿속이 텅텅 비어 간다. 내가 가야할 곳이며 내가 아는 것이 무엇일까?. 자문하고 또 자문해 보지만 아무런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다. 천둥소리와 번개가 우르릉 번쩍 들리고 보일 뿐이다.
얼마나 지났을까. 반가부좌를 풀고 침대에 몸뚱이를 뉘일 무렵 비 그치고 천둥 번개가 사라졌다. 좀 더 예민하게 열린 내 귓속으로 영역 다툼을 하는 개 짖는 소리 뿐 아니라 수면 위로 뛰어 올라 근질근질한 비닐을 비벼대는 물고기들의 자맥질 소리까지 선명하게 들려온다. 머릿속이 근질거려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는 내 존재감처럼.
그 근질거리는 존재감은 이곳 리왈샤에서 부터 좀 더 깊숙한 북인도 어디론가 떠나야 한다는 것을 감지하고 있었다. 익숙해져 가는 것들로부터 이별하고 좀 더 낯선 곳으로 떠나야 한다는 것을 감지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