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 전 경험 하나를 소개한다. 교과세부능력특기사항에 기재해달라며 찾아온 아이에게 대놓고 면박을 준 사건이다. '생기부 작성하느라 고생하시는 선생님을 위해서 정리해왔다'고 눙치는 그의 표정에 순간 모멸감이 들어, 아이 앞에서 해서는 안 될 짓을 해버렸다.
언뜻 봐도 스스로 쓴 게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의 글쓰기 능력을 익히 봐온 터라 의심을 할 수밖에 없었다. 적어낸 내용을 숙지하고 있을 테니, 네가 쓴 것 맞느냐고 묻는 건 사실관계를 확인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게 분명했다.
아이가 보는 앞에서 건넨 출력물을 찢어버렸다. 그런 후 놀란 눈을 하고 서 있는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무리 힘들어도 생기부는 학생이 아니라 교사가 쓰는 것이라고. 이튿날 그의 부모로부터 거센 항의를 받았음은 물론이다. 어린아이에게 상처를 주었다는 이유에서다.
이른바 '셀프 생기부'를 막는 건, 오로지 교사들의 손에 달렸다. 아이들의 입에서 생기부라는 말이 아예 나오지 않도록 해야 한다. 생기부는 아이들의 학교생활에 대한 담임 및 교과 교사들의 관찰기록이다. 학부모 서비스로 제공되는 정보공시나 중간, 기말 성적 외엔 졸업하기 전까지 영역별 기록은 접근은커녕 열람하는 것조차 차단해야 한다고 본다.
수능은 교실 수업을 온통 문제 풀이 시간으로 만들어버렸고, 멀쩡한 교과서는 참고서와 문제집으로 대체됐다. 이젠 생기부가 대학입시의 당락을 결정하게 되면서 아이들의 학교생활 전반을 빠르게 형식화하고 있다. 꼬리가 몸통을 흔들어대는 건, 학벌구조가 온존한 우리 교육의 불치병인지도 모른다.
소논문이 도움이 된다는 소문이 돌자 학교마다 소논문 쓰기가 유행처럼 번졌고, 1년짜리 자율동아리가 기존의 동아리 활동을 압도하기도 했다. 진로 희망과의 내러티브가 중요하다면서 맞춤형 자율활동과 봉사활동 컨설팅이 진학 담당 교사의 신규 업무로 등장했다. 학교생활의 가치는 오로지 생기부 기재와 반영 여부에 의해 결정됐다.
다만 둘 사이에는 간과할 수 없는 차이가 있다. 수능은 교사가 어찌 손써 볼 수 없지만, 생기부는 교사의 양심과 소신에 따라 얼마든지 신뢰를 되찾을 수 있다. 적어도 수능 체제에서는 교사에게 왜 사교육 강사처럼 하지 못하느냐는 비난이 쏟아지지만, 생기부는 교사가 마음먹기에 따라 사교육의 바람을 잠재울 수 있기 때문이다.
'정말' 교사 마음 먹기에 달렸다
학교와 교사들이 아이들을 한 명이라도 더 명문대에 진학시켜야 한다는 맹목적인 의무감에서 벗어나면 된다. 지금 가르치고 있는 아이보다 더 역량 있는 아이가 다른 학교에 있다고 여긴다면, 그의 자리를 내 아이가 빼앗는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도 가능하다. 내남없이 우리 아이들이라는 인식이 필요하다.
요컨대 열쇠는 교사들이 쥐고 있다. 일부 학교와 교사들의 비리가 생기부와의 직접적 연관성이 없다고 해도 모두 생기부의 불신으로 수렴되는 건 우리 사회의 교사에 대한 신뢰가 허물어졌다는 분명한 신호다. '가짜 생기부'라는 세간의 신랄한 비판에는 교사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이 자리하고 있다.
교사들 대부분이 수능보다는 학생부종합전형(학종)이 교육적 가치에 부합한다고 말한다. 생기부를 작성해야 하는 부담이 수능에 비할 바 없이 크고 개선해야 할 게 적지 않지만, 학종의 취지만큼은 반드시 살려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생기부는 대학입시를 위해 잠깐 쓰고 버리는 게 아니라, 꿈 많은 이팔청춘 시절을 담은 소중한 앨범이라는 생각에서다.
모두가 한 번쯤 들어봤을 이런 우스갯소리가 있다. 세상엔 믿지 못할 세 가지가 있는데, 거짓말과 새빨간 거짓말, 그리고 통계라는 그 이야기. 본디 필요에 따라 왜곡되기 쉽다는 의미로 통계를 비아냥거리는 표현인데, 그 위에 대한민국 고등학생들의 생기부가 있다고 아이들마저 조롱하는 참담한 지경이다.
동료 교사들에게 감히 부탁드린다. 아이들 스스로도 민망해하는 허황된 근거 자료에 의존하지 말고, 학년 말 생기부를 보고 겪은 그대로 소신껏 작성하자. '원칙을 지키면 나만 바보가 된다'는 생각은 교사 집단의 공멸을 부를 뿐이다. 생기부가 살면, 교사도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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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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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이 된 '생기부'... 나는 그만 모멸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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