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이상평생도 중 좌의정 장면/김홍도
국립중앙박물관
네 번째 그림부터 일곱 번째 그림은 관직에 있을 때의 그림입니다. 네 번째 그림은 첫 벼슬이었던 한림 겸 수찬으로 부임을 하는 장면이며, 다섯 번째 그림은 송도 유수 부임식, 여섯 번째 그림과 일곱 번째 그림은 병조판서와 좌의정으로 있을 때의 모습입니다.
위의 그림은 일곱 번째인 좌의정일 때의 모습인데요. 재밌는 것은 부임이나 궁궐로 출근하는 모습이 아니라 퇴근하는 모습입니다. 여러 사람들이 앞서 불을 밝히고 있는 것으로 보아 늦은 시간까지 일을 하고 퇴근하는 것 같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출근만큼이나 퇴근이 중요한가 봅니다.
더 재밌는 것은 홍이상이 병조판서나 좌의정의 벼슬을 한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 평생도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그렸다기보다는 한 사람의 일생을 이상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보니 높은 벼슬을 한 장면을 그렸습니다. 홍이상이 죽은 이후 영의정으로 추증되었으니 꼭 거짓말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여덟 번째 그림인 회혼례는 혼인 60주년을 축하하여 다시 혼인식을 올리는 장면입니다. 회혼례를 할 수 있다는 것은 부부가 장수하였다는 것이며, 회혼례 때 자손들이 아이들이 있는 색동옷을 입고 춤추며 축하를 하니 자손이 번성하였다는 것이며, 벼슬을 하는 사람이 회혼례를 할 경우 임금이 선물을 하였으니 사회적으로 성공하였다는 것입니다.
홍이상은 21세에 정경부인 안동 김씨와 1569년에 혼인하였는데, 안동 김씨는 1616년에 돌아가셨으니 47년간 함께 살았습니다. 이 역시 부부가 60년 동안 함께 사는 것이 이상적인 모습이라 생각하여 실제와 다르게 그린 것입니다.
정약용과 강세황의 <성공과 행복의 조건>
홍이상의 평생도를 보면 태어나 건강하게 자라는 것, 학문을 쌓아 높은 벼슬과 명예를 얻는 것, 혼인하여 부부 간에 화목하게 지내며 장수하는 것을 '성공과 행복'의 조건으로 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 '성공과 행복'의 조건과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18년간이나 유배생활을 했던 정약용이 스스로 지은 <자찬묘지명>과 강세황이 그린 자화상에 쓴 글에서 <홍이상평생도>에 표현되어 있지 않은 '성공과 행복'의 또 다른 조건을 찾을 수 있습니다.
정약용은 18년간의 유배생활을 했으며, 유배생활 이후에도 벼슬을 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는 직접 쓴 <자찬묘지명>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하늘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아
어리석은 마음을 깨우쳤네
육경을 정밀하게 연구해
미묘한 이치를 깨치고 통했네
간사한 무리들이 기세를 떨쳤지만
하늘이 너를 사랑해 쓰셨으니
잘 거두어 간직하면
장차 멀리까지 날래고 사납게 떨치리라
지금은 비록 간사한 무리들에 의해 자신의 뜻과 자신의 뜻이 담긴 책이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지만, 언젠가 자신의 학문을 인정하고 크게 쓰임이 되는 세상이 올 것이라는 확신이 담겨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