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아침 이상한 사람과 인사합니다

한강 자전거길... 요즘, 자출보다 자퇴가 좋습니다

등록 2008.10.03 18:44수정 2008.10.07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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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출길 전경 한강도 하늘빛을 닮았다. 앞에 보이는 다리가 성수대교 ⓒ 안호덕


자전거 출퇴근(자출)길. 한강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있습니다. 뚝섬 치안 센터에 걸린 태극기를 쳐다보는 일이지요.

자출에 앞서 애국의례 하느냐고요? 아닙니다. 태극기 날리는 방향을 보고 그 날 흘릴 땀을 계산하는 것입니다. 자전거 라이더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이 바람. 수년째 자출을 하는 나에게도 바람은 적응하기 힘든 상대입니다.


오늘은 다행히 여의도 쪽으로 바람이 붑니다. 전형적인 가을 바람. 등 뒤에서 살랑살랑 떠밀 듯 가는 바람. 자전거가 가볍게 느껴집니다. 하늘도 푸르고 한강 물빛은 하늘빛을 닮아 갑니다. 서둘러 가지 않아도 좋을 자출길입니다.

한강엔 나팔꽃이 한창입니다

성수대교 밑을 지납니다. 중랑천을 넘기 위해 90도로 돌아가는 급커브. 최고 멋진 경치가 펼쳐진 곳이라 할 수 있습니다. 중랑천과 한강물이 합강되는 곳. 동호대교에서 잠수대교까지 겹겹이 다리들이 보이고 유람선이 한가롭습니다. 겨울이면 철새 수천 마리의 보금자리가 되기도 하고, 저녁에는 붉은 노을 그림자가 길게 늘어지기도 하는 곳입니다.

긴 나무 벤치가 드문드문 놓여 있습니다. 나무 벤치 뒤로는 억새밭. 갓 피어난 갈대의 은빛 향연. 아, 출근이고 뭐고 팍 눌러앉아 저 강물 저 하늘 하염없이 쳐다보고 있었으면 정말 좋겠다는 생각이 절로 나네요. 갈대 흔들리는 소리. 옆 나무벤치에서 알 듯 모를 듯 들리는 산책 나온 노부부의 말소리. 벤치에 누워 한잠 자고 갔으면 정말 좋겠습니다. 

중랑천을 넘어 옥수역쪽으로 가는 길. 나팔꽃이 지천입니다. 꽃잎 색깔에서 크기까지 이렇게 다양한 꽃이 또 있을까요? 진보랏빛 손바닥만한 나팔꽃. 막내 놈 입술 같은 분홍빛. 봉숭아꽃 물들인 손톱 같이 앙증맞은 연두색까지… 해마다 그 때 그 자리는 똑같은 꽃이 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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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에 핀 나팔꽃 혼자서는 설 수 없는 꽃. 아이의 입술처럼 갸날프다. ⓒ 안호덕



혹시 나팔꽃의 전설을 아시나요? 화공의 아름다운 아내가 원님의 수청을 거부하고 높은 감옥에 갇혔답니다. 아내를 빼앗긴 화공은 그림을 그려 감옥 옆에 묻고 그 자리에서 죽었습니다. 죽은 자리에 꽃이 펴서 감옥 담벼락을 타고 올라 아내에게 이르렀다는 꽃.

슬픈 전설이 있어서 그런지, 나팔(나발)이라는 어감 때문에 그런지, 이 꽃을 볼 때마다 기륭 노동자, KTX 여승무원들이 생각납니다. 옥상에서 죽음의 단식을 하고, 고공 철탑에 올라 목이 터져라 절규하는 사람들.

혼자서는 일어설 수 없는 무게를 가진 그 사람들에게 내 몸이라도 감고 올라오라고 그래서 같이 살자고 이렇게 해야 되는데… 나팔꽃 같은 절규만 자꾸 늘어갑니다.

할아버지 라이더 피빨며 갑니다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멋쟁이 아저씨가 지나갑니다. 자전거에 태극기를 달고 바람개비도 몇 개씩 달아 놓았습니다. 헬멧에도 반짝이가 붙어 있습니다. 자전거에 달린 스피커를 통해 항상 '뽕짝' 노래 소리가 나옵니다. 만나는 사람 누구에게나 먼저 인사를 합니다. 처음에는 이상한(?) 사람인 줄 알았습니다. 이제는 내가 먼저 인사를 합니다.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벌써 몇 년째 이렇게 스쳐갑니다. 잠수대교를 지나 거북선 나룻터 오기 전에 매일 만나는 분입니다.

이런 분이 몇 명이나 됩니다. 아침마다 승복을 입고 인라인을 타는 비구니 노스님이 있습니다. 바랑을 지고 승복 위에 무릎 보호대를 하고 헬멧을 쓰고 느릿느릿 인라인을 즐기시는 노 스님. 한번쯤 인사를 드려야 하는데 아직 그럴 기회를 얻지 못했습니다.

할아버지 라이더들도 있습니다. 일곱, 여덟 분이 매일 똑같이 한 줄로 늘어서서 나와 마주칩니다. 잠수대교 밑에서 쉬어서 돌아갑니다. 어떤 날은 되돌아가는 할아버지 라이더들의 뒷꽁무니를 따라 갑니다. 라이더들이 말하는 일명 '피빨기 모드'로 가는 것이지요. 맞바람 부는 날 이렇게 하면 한결 수월합니다. 꼭 철새들이 이동하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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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무슨 열매인가요? 꽃은 그렇게 요란스럽지 않았는데 열매는 빨간 구슬이 달린 듯하다. ⓒ 안호덕


자출보다야 자퇴가 낫지요

자출보다는 자퇴가 좋습니다. 출근보다 퇴근이 기다려지는 것과 같은 이치지요. 여유가 있고 기다리는 사람이 있고 쉴 보금자리가 있으니까요.

한강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끌바(자전거를 끌고 가는 것)'를 해서 고가도로를 넘어야 합니다. 고가에 올라서면 여의도 63빌딩이 보이고 순복음교회 십자가가 보이고 국회의사당 지붕이 보입니다. 여의도. 큰물만 나면 오갈 수 없었던 모래땅.

그래서 옛날 사람들이 '그 땅 너 가져라'고 한 농담에서 지명이 유래되었다 합니다. 이제는 권력과 부의 상징이 된 땅. 이런 걸 상전벽해라 하지 않을까요? 자출길과 마찬가지로 자퇴길도 바람의 방향을 가늠해 보아야 합니다. 여기서는 강물이 물결지는 방향을 봅니다. 동남풍이 부네요. 퇴근길도 수월하겠습니다.

자퇴길은 자출길보다 빠릅니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지요. 우선 집에 빨리 가고 싶은 마음입니다. 주변에 불빛과 흑백의 사물들뿐이고 사람들도 아침보다는 많지 않지요. 그래서 자연스레 속도가 납니다.

반대로 위험한 길이기도 합니다. 어둠에서 튀어나오는, 경고등도 없이 내달리는 자전거들, 역방향 차선을 달리면서 비켜달라고 딸랑이를 울리는 사람들, 뒤도 안 돌아보고 유턴을 하는 사람들까지…. 2년 전 오토바이 피하느라 급브레이크 잡고 곤두박질 친 일이 있습니다. 손목이 접질리고, 무릎에 피가 나고, 일어나지도 못하는데 오토바이가 옆을 지나면서 한마디 하더군요.

"속도 좀 줄이고 다니세요."
"아저씨. 여기 오토바이 못 다니거던요!"

내가 지르는 소리에 아랑곳없이 휙 지나가 버리더군요. 그 때문에 보름이나 자출을 못했습니다. 이후 밤에는 절대 시속 30㎞ 이상 달리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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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의 저녁 에어로빅 시간 8시에서 8시 30분 사이 한강 곳곳에서 에어로빅이 펼쳐진다. ⓒ 안호덕


자퇴길은 눈보다는 귀가 맑아지는 시간입니다. 보이지 않는 풀벌레 소리는 가을을 재촉합니다. 지나가는 유람선 뱃고동 소리는 아련한 향수를 만들어냅니다.

잠수대교 밑에는 저녁시간이면 신디사이저를 연주하는 할아버지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 둘레에서 물을 마시고 노래도 따라 부르고 쉬어 갑니다.

한남대교 못 미치는 곳에는 한강을 마주보며 트럼펫 연주를 하는 악사들도 가끔 보입니다. 옥수역 밑과 몇 군데에서는 하루를 마감하는 에어로빅 난장이 펼쳐집니다. 쿵짝거리는 음악을 틀어 놓고 강사의 율동에 맞추어 열심히 흔들어댑니다. 살 빠지는 소리뿐만 아니라 스트레스 날아가는 소리까지 들리는 듯합니다. 자전거를 세워 놓고 맨 뒤에서 어색하게 따라 하는 아저씨들 몇 명은 꼭 보입니다.

자퇴길은 빛을 통해서 사물을 보는 게 아니라 빛 자체를 보게 됩니다. 화려하게 치장된 유람선. 높은 아파트의 조명들. 기업들의 홍보용 네온사인. 높은 건물이 많을수록, 개발이 많이 된 곳일수록 화려합니다. 한강의 다리들은 절전을 이유로 설치된 조명을 많이 켜지 않습니다.

성수대교 밑을 지나 뚝섬 유원지로 접어 듭니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인공암벽을 타느라 여념이 없습니다. 로프를 걸고 아찔한 높이를 오르는 사람들이 멋있어 보입니다. 도전해 보고 싶은데 기회를 못 얻었습니다.

따르릉 따르릉, 아빠 왔어요~

이제 한강을 벗어나야 할 시간입니다. 토끼굴이라는 육갑문을 나옵니다. 시장에 들러 계란빵 3천원어치를 삽니다. 집 앞에서 자전거를 내립니다.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초인종 대신 자전거 딸랑이를 울립니다. '딸랑딸랑' '딸랑딸랑' 몇 번 울리면 어김없이 아이들이 문을 엽니다. "와, 아빠다." "아빠 다녀 오셨어요." 막내 놈은 벌써 사온 빵봉지를 빼앗아 들고 둘째 놈과 큰 놈은 헬멧과 배낭을 넘겨 받습니다. 아내가 뒤에서 웃고 있습니다. 힘든 하루를 마치고 보금자리로 귀소합니다.

저번 달도 교통카드에 9100원이 찍혔네요. 3~4일 전철 타고 나머지는 자출·자퇴를 한 것 같습니다. 한 달에 교통비 4만~5만원 절약, 36만원 주고 산 중고 MTB 충분히 본전을 뽑았습니다.

덧붙이는 글 | '2008 자출도 여행이다' 응모


덧붙이는 글 '2008 자출도 여행이다' 응모
#한강 #자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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