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연남과 교통사고도... '전화 한통'이 문제였다

[게릴라칼럼] 드라마 <추적자>에 투영된 엽기적인 대한민국

등록 2012.07.03 14:58수정 2012.07.03 2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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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신문에 가끔 글 한번 올리는 것이 그리 대단한 일은 아니지만 억울한 마음에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상당히 큰 권력으로 보이는 모양인지, 나에게 개인 송사를 좀 기사화해달라는 '청탁'이 가끔 들어오곤 한다(물론 나는 그런 청탁을 기사회한 적이 한 번도 없다). 몇 년 전 지인을 통해 들어 온 그런 청탁 중에는 영남 출신의 당시 현직 국회의원이 자신의 부동산을 가로챘다는 사연이 있었다. 법조인 출신의 그 국회의원이 법을 잘 모르는 청탁인을 속여 서류를 조작했고, 그 과정에서 인감을 위조했으며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도 압력을 넣었다는 것이 청탁인의 주장이었다.

이런 부류의 일은 별로 경험도 없는데다 법률도 전혀 모르는 터라 나는 그저 좋은 변호사를 선택해 자문을 구해 보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도 내심 속으로는 어떻게 대명천지에 법치국가인 대한민국에서 이런 일이 가능할까 하는 의구심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때는 새파란 검사들이 대통령에게도 막 대어들던 2003년이었다.

한동안 잊고 지냈던 사건이 떠오른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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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드라마 <추적자>의 한 장면. 주인공 백홍석(손현주 분) 법정에서 총을 겨누는 모습이 충격적이다. ⓒ SBS



한동안 잊고 지냈던 그 사건이 다시 떠올랐던 것은 최근 화제의 SBS 월화드라마 <추적자>를 보기 시작했을 때였다. <추적자>는 유력한 대권후보가 연루된 살인사건의 피해자 아버지 백홍석(손현주 분) 형사가, 그 사건을 덮기 위한 사회 권력층에 맞서 진실을 파헤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드라마 <추적자>가 방송을 시작한 뒤 연일 화제가 되는 이유는 한국 사회의 드러내고 싶지 않은 현실이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이다.

유력한 대선후보 강동윤(김상중 분)은 자신의 대권을 위해 살인교사도 서슴지 않는다. 사실 강동윤 후보에는 현실 정치인의 여러 모습이 상당히 중첩돼 있다. 어려운 성장환경과 정의를 내세우는 모습은 노무현을 닮았고, 압도적인 지지율의 대세론은 박근혜를 닮았고, 재벌집 사위라는 '마름'으로서 그 주인자리를 넘보는 모습은 현대가 CEO 출신으로 스스로 재벌이 되려는 듯이 보이는 현재의 이명박 대통령을 닮았다. 그리고 그 모든 언행이 거짓과 위선으로 가득 차 있음은 대다수의 보편적인 한국 정치인을 닮았다.

그에 맞서 자신의 재벌그룹을 지키려는 한오그룹의 서 회장(박근형 분)은 아들에게 그룹을 물려주기 위해 온갖 편법을 다 동원한다. 뿐만 아니라 그룹을 위해서는 사위는 물론 딸까지 내치는 모습은, 편법적인 3대 세습과 형제간 상속다툼으로 얼룩진 삼성그룹을 연상시키기에 충분하다. 서 회장은 정계와 검찰은 물론 한국사회를 움직이는 요인들을 장기판의 말 다루듯이 다룬다. "권력은 이미 시장으로 넘어갔다"는 말을 드라마로 옮기면 딱 서 회장의 모습이 나올 것이다.


특히 드라마 앞부분에서 선보인 백홍석의 딸 백수정 사망사건과 관련된 재판과정은 영화 <도가니>나 <부러진 화살>을 연상시키며 "법 앞에 만 명만 평등"한 한국사회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고발했다. 대법관이 유력대선후보와 코드를 맞추더니 그 직을 버리고 가해자의 변호인으로 나서 재판을 뒤집는다. 증거조작이나 증인매수는 다반사이고 언론을 동원한 상대방 인신공격 등 전방위적인 노력 덕분에 가해자에게는 벌금형만 선고된다. 피해자 백수정의 아버지 백홍석이 총기를 들고 법정에 뛰어든 것은 그 때문이었다.

물론 드라마는 현실이 아니다. 대개 이 말은 드라마적 상상력이 현실을 초월한다는 뜻이지만, '다이내믹 코리아'의 현실은 그와 반대로 작가들의 상상력을 훨씬 초월하는 듯하다. 지난 2005년 황우석 사태가 발생했을 때 이 사건을 나중에 영화로 만들자는 누리꾼들의 의견이 있었는데, 너무나 '비현실적인' 이야기라 흥행참패가 예상된다는 의견이 나돌았던 적이 있었다.

지난 MB 치하의 세월들을 돌아보면 인간의 상상력으로는 도저히 써내기 어려운 '비현실적인' 현실들이 우리 눈앞에 펼쳐졌다. 최근의 예만 몇 가지 들자면 멀쩡한 인천공항이나 KTX 매각추진도 그렇고, 4대강이 가뭄을 막았다는 말도 그렇고 수질을 감시하는 로봇물고기도 그렇다. 청와대의 민간인 불법사찰과 증거인멸 과정을 들여다보면 그 자체로 <추적자>보다 더한 막장 드라마가 한 편 나올 법하다. 마크 트웨인의 말마따나 "자연의 상상력은 인간의 상상력보다 위대하다. (Truth is stranger than fiction.)"

SBS드라마 <추적자>는 한국사회 지배권력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 SBS



<추적자>를 보면서 뭔가 비현실적이라는 느낌이 들었다면 그것은 실로 엽기적인 한국의 현실을 겨우 16부작 미니시리즈에 다 담기 어려운 물리적 한계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예컨대 <추적자>에는 피의사실을 공표하며 여론 재판하는 검찰도 없고 그것을 받아쓰며 사실을 왜곡하는 황색언론도 없다. 겨우 이 정도의 현실고발만으로도 시청자들의 반응이 폭발적인 것은 그만큼 답답한 현실의 '비현실성'을 반영한 결과가 아닐까? 권력의 나팔수로 변해버린 방송사 뉴스들은 오히려 드라마를 쓰고 있고, 온가족의 오락거리인 드라마가 되레 현실을 고발하는 이 기막힌 2012년 한국의 '비현실적인 현실'이 바로 <추적자>의 힘이다. 그리고 한국사회의 그런 비현실적 현실성을 생각해 본다면, 9년 전의 내게 기사를 부탁했던 소설 같은 그 사건도 실제 일어났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사건의 블랙박스, 전화 한 통

한편, <추적자>는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했던 '어떻게'의 문제를 해결해 주었다. BBK 사건이나 천안함 사건, 혹은 10.26 선거 디도스 공격 사건처럼 굵직한 사건들이 터질 때마다 사람들은 갖가지 의혹을 제기하며 자기들만의 그럴싸한 '소설'을 써서 사건의 실체적 진실을 재구성해보려고 한다. (<나는 꼼수다>가 인기를 얻은 중요한 이유도 그 때문이고 생각한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그 모두를 음모론으로 일축한다. 음모론이 실체적 진실이 아닌 하나의 가설로만 남게 되는 가장 큰 이유는 많은 경우 그것이 '어떻게'에 대한 답을 제시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이건희가 법조계를 움직여 법정에 서지 않았다는 '음모론'에는 항상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의문이 따라다닌다. MB 정부가 들어선 뒤에 국세청과 검찰과 국정원 등 온갖 권력기관을 다 동원해 반대파를 부당하게 제거했다는 '음모론'에도 "어떻게 법치국가에서 그것이 가능한가?"라는 의문이 생긴다(두 경우 모두 '왜?'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오히려 쉽다. 이건희와 MB가 직접적인 이익을 보기 때문이다).

드라마 <추적자>는 여기에 놀랄만한 대답을 제공한다. 바로 '전화 한 통'이다. 서 회장은 전화 한 통으로 검찰총수와 정계 거물과 언론을 움직인다. 강동윤도 비서관을 통한 전화 한 통이면 못 하는 일이 없다. 경찰과 국세청이 움직이고 대법관도 머리를 조아린다. 보통 사람들은 도저히 알 길이 없는, 모든 사건의 그 블랙박스는 수사기관이 철저하게 실체적 진실을 밝혀 공개하지 않는 이상 그들만의 블랙박스로 남을 뿐이다. 그래서 눈에 보이지 않는 그 블랙박스의 내용물을 상상할 수밖에 없다. <추적자>는 그 블랙박스를 매우 단순한 과정으로 처리해버렸다. 어쩌면 그것이 가장 현실적인, 아니 가장 비현실적인 현실성을 반영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가장 최근에 공개된 그런 부류의 '블랙박스'에 따르면 한일군사정보협정이 체결되기 불과 한 시간쯤 전 새누리당의 이한구 원내대표가 김성환 외교부장관에게 '전화 한 통'을 넣은 뒤에 협정체결이 무기한 연기되었다. 국가의 중대지사가 이런 식으로 처리되는 과정도 놀랍지만, 나는 <추적자>의 선견지명이 더욱 놀라울 따름이다. 상황이 이렇게 되고 보니 그 협정을 의결하기 위해 비밀리에 국무회의를 연 것도 누군가의 '전화 한 통'이었을 것이라고 짐작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 수 있다.

"구두, 영상, 전자, 자기 또는 문서의 형태이거나 장비 또는 기술의 형태"인 군사기밀을 나눠주고 그 사후통제까지 상대국에게 일임하는, 상당히 높은 수준의 정보협정임에도 (관련기사: http://bit.ly/P0Dzbe) 대통령 몰래 처리되었다는 거짓말을 모르는 척 믿어주는 모양새도 어이가 없지만, 이명박 대통령이 나중에 절차상에 문제가 있었다고 '격노'했다는 뉴스는 드라마 작가의 상상력이 현실에 비하면 얼마나 우스운 수준인가 새삼 깨닫게 해 준다. 그런 국무회의가 '전화 한 통' 이상의 복잡한 과정을 통해 군사정보협정을 의결했을까? 나중에 대통령의 '격노'가 뻔히 예상되는데도?

'전화 한통'의 힘은 어디까지인가. 전화를 걸어 연평도 등에서 근무 중인 군인들을 격려하는 이명박 대통령. ⓒ 청와대


법이 있어야 하는 이유는 강자를 위해서라기보다 약자를 위해서이다. 강자는 법이 없어도 스스로를 보호할 수단이 많다(아니, 그런 수단이 많은 사람을 강자라고 부른다). 반면에 사회적 약자는 법의 보호가 없으면 스스로를 지키기 어렵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는 오히려 '법 자체'를 위해 약자가 억압되는 세상이 돼 버렸다. 제 보금자리를 지켜 달라는 용산의 철거민들은 '법질서 수호'의 미명 아래 특공대의 진압으로 목숨을 잃고도 테러리스트라는 멍에를 뒤집어썼다. 안전한 먹거리를 제공해 달라고 촛불을 든 국민들의 요구에는 집시법을 지키라는 강변만이 돌아왔다.

그렇게 따지고 보면 시민들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 법질서를 수호하는 것이 아니라, 법질서 자체를 수호하기 위해 시민들의 생명과 재산이 희생된다. 그런 법질서는 대개 최상위 권력층의 이익을 위해서만, '전화 한 통'으로 작동할 뿐이다.

우리 모두는 MB의 추적자였다

"나요, 이제 법 같은 거 안 믿습니다. 나만 믿습니다." (백홍석)

그런 모순 속에서 억울하게 딸아이를 잃은 백홍석이 달리 무슨 말을 할 수 있었겠는가. 총과 촛불의 차이만 있을 뿐, 지난 2008년 미국산 쇠고기수입 파동의 경우를 보자면 우리 모두는 사실상 MB의 추적자였다(MB는 당시 겉으로는 대국민 사과를 했지만 속으로는 자신에 반대하는 인사들을 색출하기 위해 본격적으로 청와대 주도의 민간인 사찰팀을 만들었다). 아니, 그 이듬해에 노무현 전 대통령을 그렇게 떠나보낼 때는 우리 모두가 백홍석이었는지도 모른다. 법과 정의의 수호자라는 검찰이 오히려 앞장서서 전직 대통령을 죽음으로 내몰았으니, '이제 법 같은 거' 믿고 싶은 사람이 얼마나 있었으랴.

"폭탄이라도 짊어지고 청와대에 뛰어들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SBS <추적자>의 주인공 백홍석. 그는 법을 믿지 않는다. ⓒ SBS

어느 명문대학의 교수가 했다는 이 말을 떠올려 보면 겨우 총 한 자루 들고 법정에 뛰어든 드라마 속의 백홍석은 얼마나 얌전했던가 싶다. 역시나 드라마(fiction)는 아직 현실(truth)을 따라가기에 역부족인가 보다.

세상이 아직 우리가 원하는 대로 변하지 않더라도, 한때 우리 모두가 그렇게 백홍석 같은 추적자였던 기억을 잊지만 않는다면, 적어도 그 아름다운 추억을 간직하고 있는 동안만큼은 추적자에게도 희망이 있다.

"저 사람들이 강동윤한테 속고 있는 거잖아요. 나처럼요." (백홍석)

백홍석은 자신의 딸을 죽게 한 강동윤에게 딸아이의 저금통을 모두 후원금으로 보낼 만큼 강동윤을 믿었다. 지금 우리는 누군가에게 속고 있지 않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왜 우리는 시간이 지날수록 "MB에게 속았다"는 말을 많이 듣게 되는 것일까? 이번 대선에서는 누군가에게 다시 속지 않을 자신이 있는 것일까? 또 다시 몇 년 뒤에 누구에게 속았다고 뒤늦게 한탄하지 않으려면, 적어도 <추적자>의 강동윤과 백홍석을 잘 지켜보는 것도 약간은 도움이 될 것이다.

아 참, 강동윤이 자기 부인과 함께 사고를 낸 내연남인 슈퍼스타 연예인과 거래를 하는 동영상은 강동윤의 아킬레스건이긴 하지만, 그것이 공개되더라도 강동윤 후보에게 큰 해를 끼치지는 못할 듯싶다. 누구의 BBK 동영상처럼 말이다.

"그날 밤 교통사고, 집사람하고 있었던 일, 영원히 입 닫는 대가야. (강동윤)"

설마 드라마에서까지 "주어가 없다"는 논리가 나오지는 않겠지만, 그렇게까지 드라마를 막장으로 만들지 않으려면 아마도 작가나 연출가는 어마어마한 상상력을 발휘해야만 할 것 같다. 자연의 상상력은 언제나 훨씬 더 위대했으니까.
#추적자 #이명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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