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방송통제 눈감은 대통령의 사과, 못 믿겠다

[게릴라칼럼] 알맹이 빠진 사과와 눈물, 직후에 해외순방

등록 2014.05.20 12:44수정 2014.05.20 1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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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릴라칼럼은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들이 쓰는 칼럼입니다. [편집자말]
"그것(방송장악)을 할 의도도 전혀 없고 법적으로도 불가능하다. 그 문제는 이 자리에서 국민 앞에서 약속드릴 수 있다."

2013년 3월 4일. 청와대 춘추관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대국민 담화를 통해 밝힌 내용이다. 대통령 취임 일주일 만의 일이었다. 정부 조직개편 문제에 대해 더 이상의 타협은 있을 수 없다는 확고한 입장을 밝힌 자리였지만 방송장악에 대한 야당과 시민단체들의 우려에 대해 대통령이 "이미 수많은 소셜 미디어들과 인터넷 언론이 넘치는 세상에 정부가 방송을 장악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라고 확신에 가득찬 반문까지 했을 정도다.

그래서 많은 국민들은 믿었다. 이명박 정부에서 자행된 무지막지한 방송장악은 이제 덜할 것이라고. 대선 과정에서도 박근혜 후보는 '공영방송 지배구조 개선'을 공약으로 제시해 많은 유권자들의 표심을 자극시켰다.       

그런데 웬걸. 방송장악은 없을 것이라며 국민들 앞에 호언장담해 놓고 불과 두 달여 만에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2013년 5월 7일. 박 대통령의 미국 공식 방문기간 중 동행했던 윤창중 청와대 당시 대변인이 주미 한국대사관 인턴 여직원을 호텔에서 성추행한 전대미문의 사건이 벌어졌다. 한·미 두 나라를 발칵 뒤집어놓을 정도로 굵직한 사건이었다.

'윤창중 사건',  KBS 뉴스에서 작아진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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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기자협회 총회에 참석한 김시곤 전 보도국장이 재임 시절 청와대로부터 수시로 외압을 받았다고 폭로했다. (자료사진) ⓒ 권우성


그런데 이때 희한한 일이 공영방송사 내부에서 발생했다. 이로 말미암아 국민의 방송, KBS에 대한 곱지 않은 시선이 다시 확산되기 시작했다. 이유는 사건이 발생한 이후 국내는 물론 미국 언론사들까지 큼지막한 의제로 연일 보도되고 있는 '윤창중 사건'이 유독 KBS에선 거의 언급되지 않거나 축소됐기 때문이다.

특히 시건 발생 일주일 후인 5월 14일 다른 방송사들이 '윤창중 사건'을 속보로 그것도 머리기사로 배치할 무렵, KBS <뉴스9>는 정부가 박근혜 대통령의 지시로 북한에 회담을 제의했다는 내용을 헤드라인 뉴스로 보도했다. "개성공단 입주기업들이 놓고 나온 자재와 완제품을 남한으로 반출하자는 논의를 하자"는 정부의 제의를 톱뉴스로 다뤘지만, 이는 당시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윤창중 사건'을 올리지 말라고 길환영 사장이 지시했기 때문으로 밝혀졌다.  


KBS 김시곤 전 보도국장이 지난 16일 기자협회 총회에서 청와대의 보도 간섭형태를 낱낱이 폭로하면서 당시에 생각했던 의구심과 궁금증이 해소됐다. 김 전 보도국장은 "길환영 사장이 '윤창중 사건'을 톱뉴스로 올리지 말라고 지시했다"고 밝힘으로써 SBS와 MBC가 미국발 '윤창중 성추문 사건'을 머리기사로 보도할 때 KBS가 '개성공단 판문점 실무회담 전격 제안'이란 제목과 영상으로 '윤창중 사건'을 가려준 내막을 확인시켜 준 것이다.

이에 앞선 지난 9일 김 전 보도국장은 "길 사장이 사사건건 보도본부의 독립성을 침해해왔다"고 주장하면서 "길 사장은 대통령만 보고 가는 사람"이라고 폭로한 것은 그간 KBS와 청와대의 유착관계가 얼마나 심화됐는지를 방증한다. 대통령이 외국에만 나갔다 하면 유독 기사 꼭지 수가 많은 것도 다 이유가 있었다. 외국에서 박 대통령이 입을 열었다 하면 마이크와 카메라를 고정시키며 생중계를 하는 것도 모자라 관련 기사 수를 늘려 국정원 대선개입 의혹과 국정원 간첩 증거조작 사건 등 국내 대형 이슈들이 영상에서 슬그머니 사라진 데는 모두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이는 "대통령 관련 뉴스는 뉴스 시작 20분 내로 소화하라는 원칙이 있었다"며 "대통령 순방 때마다 꼭지 늘리기 고민으로 몸살을 앓았다"고 실토한 김 전 보도국장의 폭로 발언이 뒷받침해 준다. 어디 이런 사례뿐이었겠는가. 이명박 정부 시절, 낙하산으로 사장자리에 오른 김인규 전 사장 시절부터 국민의 방송은 청와대의 '심기 경호'와 '홍보 전위대'로 전락하기 시작했다.

재난주관방송사, '해경'보다 '선원'들 맹비판...청와대 지시였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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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환영 사장 차량 온 몸으로 막는 KBS 새노조 19일 오전 서울 여의도 KBS 본관 앞에서 길환영 KBS 사장이 차량을 타고 출근하자, 전국언론노동조합 KBS본부 새노조 조합원들이 이를 저지하며 길 사장의 사퇴를 요구하고 있다. ⓒ 유성호


지난 정권 5년 내내 망가질 대로 망가진 KBS가 이 정부 들어서도 권력의 극심한 눈치를 살피거나 청와대 지시를 그 어떤 뉴스의 가치보다 우선 순위를 두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세월호 참사로 온 나라가 비통에 잠겨 있을 때도 KBS가 청와대의 눈치를 살피거나 지시를 받았다는 전 보도국장의 발언은 차마 입에 담기조차 부끄럽고 민망할 정도의 이야기다.

길 사장이 "직접 해경을 비판하지 말라"고 지시했다는 김 전 보도국장은 "이는 청와대 지시가 내려왔기 때문"이라고 말할 정도다. 상업방송인 SBS도 '빠져나온 승객만 구한 해경'이라며 해경의 안이한 초기 대응을 비판할 때, 국민의 방송 KBS는 '구조 안간힘 해경 뒤로 줄행랑 선원들'이란 교묘한 제목으로 해경을 두둔하거나 물 타기하기에 바빴다.

겉으로는 "방송장악을 할 의도도 전혀 없고 법적으로도 불가능하다"던 박근혜 정부가 속으로는 방송을, 그것도 국민의 방송을 장악하며 정권유지와 권력의 홍보수단으로 이용해 왔음을 여실히 드러난 이상, 국민들 앞에서 입버릇처럼 행한 거짓을 이제는 고백하고, 사죄해야 마땅하다.         
 
"방송의 공공성을 실질적으로 구현하고, 공영방송의 지배구조 개선을 심도 있게 논의할 공론의 장을 마련하고, 그 결과를 받아들여 실천하겠다"던 박 대통령의 공약도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방송의 공공성과 지배구조 개선을 국민들에게 굳게 약속해 놓고 불과 1년 사이에 공영방송을 권력방송도 모자라 '청 바라기' 또는 '박 바라기', 심지어는 '청영방송(청와대방송)'이란 소릴 듣게 만든 대통령이 되고 말았으니 방송사 내부는 물론 세간의 조롱을 받아도 할말이 없을 것 같다.

KBS 기자들과 PD 등 내부 구성원들이 청와대 눈치만 살피는 사장의 즉각 사퇴를 요구하며 제작거부에 돌입키로 한 것도, 공영방송이 최고 권력의 시녀로 전락한데 대한 치부를 보도국장이 폭로한 것도 사필귀정이다. 대통령의 즉각적인 사과와 진상조사, 책임자 처벌, 공영방송 지배구조 개선 공약 이행, 방송 편성의 독립, 방송장악 진상규명을 위한 국정조사와 청문회 실시, 길 사장의 즉각 퇴진 요구 등이 봇물처럼 터져 나오게 된 것도 권언유착이 빚은 자업자득의 결과다.  

세월호 참사로 온 국민이 황망한 슬픔에 잠겨 있는 사이에도 대통령과 청와대의 눈치부터 살피며 왜곡보도와 오보를 일삼는 것도 모자라 유족들 가슴에 대못을 박는 망언을 쏟아낸 방송사가 다름 아닌 국민의 방송이란 점, 또 국가 재난 주관방송사란 사실이 더욱 공분을 자극하고 있다. 

KBS 사태엔 일언반구도 없는 대통령, 진정성 안 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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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 흘리는 박근혜 대통령 박근혜 대통령이 19일 오전 청와대 춘추관에서 세월호 참사 관련 대국민담화 발표 도중 의로운 희생자 이름을 부르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 ⓒ 연합뉴스


"세월호 참사 시국에서 언론이 보여준 편파, 왜곡보도의 배후에 청와대가 있었다는 의혹에 대해 철저한 진상규명이 이뤄져야 한다"는 주장이 동시에 터져나오는 것과 때를 같이해서, 박 대통령은 이번에도 타이밍을 놓치지 않았다. 신문과 방송을 통해 그동안 수차례 대국민담화문이 있을 것이란 예고편을 내보내더니 마침내 대통령은 세월호 참사 발생 한 달여 만(34일째)인 19일에서야 청와대 춘추관에서 대국민담화를 통해 "이번 사고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최종 책임은 대통령인 저에게 있다"며 처음으로 국민을 향해 사과를 했다.

세월호 참사 발생 초기만 해도 정부의 최고 책임자인 자신은 제외한 채 관료들과 선원들만 질타하다 민심이 들끓고, 거기에다 KBS 사태까지 불거지자 궁여지책으로 사과를 하긴 했지만 여전히 진정성에 의문이 제기된다. 이번에도 박 대통령은 일방적으로 담화문을 읽었을 뿐, 기자들의 질문을 받지 않았다. 게다가 세월호 참사에 대한 책임과 사과, 재발방지 대책에 이어 관심이 증폭됐던 중대한 문제가 빠졌다. 그것은 바로 담화문을 발표하던 날 동시에 예고됐던 KBS 사장 퇴진요구와 맞물린 종사자들의 제작거부 등 일련의 KBS 사태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었기 때문이다.

순방 뒤에 개각이 있을 것이란 무성한 소문만 가득할 뿐, 그토록 자신 있게 약속했던 공영방송 지배구조 개선과 세월호 참사기간에 불거진 국민의 방송에 대한 청와대 개입에 관해서는 어떠한 입장도 내놓지 않아 의구심만 더욱 키워 놓았다. 이번 대국민담화 말미에서 보여준 대통령의 눈물이 진정성 없는, 꾸며진 의사사건(pseudo event)으로 보여진 이유다. 일말의 양심이 있는 대통령이었으면 거세게 확산되고 있는 '청와대의 공영방송사 장악 논란'에 관해 한 구절이라도 언급을 했어야 했다.

가뜩이나 청와대가 국가 재난주관방송사인 KBS 사장을 통해 세월호 참사기간 뿐 아니라 일상적으로 보도를 통제해 왔다는 전 보도국장의 폭로로 책임 있는 해명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은데도 담화문만 읽어 내리고 황급히 외국으로 떠난 모습은 또다른 물타기 이슈를 만들기 위한 처세로 보이기에 충분하다.

대통령이 외국 순방길에 올랐으니 또 얼마나 많은 보도꼭지를 방송사들이 만들어 낼지, 이를 위해 보도국장 등 간부들은 또 얼마나 깊은 고민에 휩싸일지, 그러는 사이에 지방선거 등 국내 주요의제들은 어디로 사라질지, 걱정이 앞선다.
#대국민담화문발표 #KBS사태 #길환영사장 토진요구 #방송장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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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가 패배하고, 거짓이 이겼다고 해서 정의가 불의가 되고, 거짓이 진실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성의 빛과 공기가 존재하는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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