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바꾼' 박근혜, 급소는 '세월호 7시간'

정권을 옥죌 결정적인 아킬레스건 '세월호 7시간'에 집중해야

등록 2016.11.22 14:46수정 2016.11.22 1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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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이 20일 미르·K스포츠 재단 비리와 대기업으로부터의 자금강탈, 청와대 문건유출 사건의 실질적 주범으로 박근혜 대통령을 지목했다. 검찰은 또 박 대통령이 최순실, 안종범 전 청와대 정책조정수석, 정호성 전 청와대 부속비서관 등과 공범관계에 있다고 보고 피의자로 입건하겠다고 밝혔다. 현직 대통령의 피의자 입건은 헌정 사상 초유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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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만이 넘는 시민들은 19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 모여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촉구했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버티기에 들어간 모양새다. ⓒ 지유석


그러나 박 대통령은 버티기에 들어간 모양새다. 검찰 수사발표가 있던 당일, 청와대 정연국 대변인은 "수사팀의 오늘 발표는 전혀 사실이 아니며 객관적인 증거는 무시한 채 상상과 추측을 거듭해서 지은 사상누각일 뿐"이라며 유감을 표시했다.

청와대는 다음 날인 21일엔 "조건이 좀 달라졌으니까 지켜봐야 할 것 같다"며 국회추천 총리도 거부할 뜻임을 시사했다. 애초 이 방안은 박 대통령이 지난 8일 정세균 국회의장을 만난 자리에서 먼저 "국회가 총리를 추천해 준다면 총리로 임명해서 내각을 통할하도록 하겠다"고 제안한 것이다. 따라서 청와대 입장은 박 대통령이 말을 바꾼 것 아니냐는 의문을 품게 한다.

박 대통령의 퇴진을 촉구하는 목소리는 날로 높아가고 있다. 게다가 검찰이 박 대통령을 입건하겠다고 발표했으니 퇴진 여론은 더욱 거세질 공산이 크다. 그러나 박 대통령과 청와대의 대응을 보고 있노라면 2선 후퇴 의사가 전혀 없어 보인다. '피의자' 박 대통령은 지금의 어려움을 잘 버티고 '명예롭게' 퇴진할 수 있을까?

박근혜 게이트 vs. 워터게이트

박 대통령의 대응은 워터게이트 스캔들 당시 닉슨과 여러모로 닮은꼴이다. 1972년 6월 미국 워싱턴 워터게이트 빌딩 6층의 민주당 전국위원회 본부에 5명의 남자가 침입해 도청장치를 설치하려다가 절도범으로 체포되는 일이 발생했다.

사건 초기, 경찰은 단순 절도사건으로 결론 내리고 수사를 종결했다. 백악관은 연관성을 부인했다. 그러나 <워싱턴포스트>의 폭로로 닉슨 진영이 개입한 정황이 드러나면서 사건은 대통령의 음모로 발전했다.


이 스캔들에는 두 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한 명은 닉슨 대통령이고 다른 한 명은 존 에드가 후버 미 연방수사국(FBI) 국장이다. 닉슨이 공식 대통령이었다면 후버 FBI국장은 어둠의 대통령이었다. 그는 1924년 FBI의 전신인 수사국 국장으로 임명돼 1935년 지금의 FBI를 창설하는데 산파역을 수행했다.

후버는 초대 수사국 국장으로 취임한 뒤부터 어둠의 제국 구축에 나섰다. 이때 그가 사용한 방법은 사찰이었다. 그는 수사국을 활용해 대통령은 물론 사회 저명인사를 집중 감시했다. 이 과정에서 도청, 미행, 불법침입, 협박 등 온갖 비합법적 수단이 동원됐다.

존 F. 케네디, 마틴 루서 킹, 존 스타인벡,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등 미국 내 주요인사는 물론 샤를르 드골 프랑스 대통령 등 동맹국 국가원수마저 그의 감시망에 걸려들었다. 특히 마틴 루서 킹은 그에게 치명적인 약점을 잡혔다는 설이 파다했다. 그는 1972년 타계할 때까지 어둠의 권력으로 군림하며 어느 누구에게도 도전받지 않는 정보세계를 구축했다.

닉슨과 후버의 힘겨루기

닉슨은 후버의 제국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닉슨은 재임 당시 친정체제 구축에 집착했다. 특히 FBI, 미 중앙정보부(CIA), 국방정보부(DIA) 등 정보기관을 끊임없이 감시하고 견제하며 호시탐탐 조직 장악을 노렸다.

그는 자신의 정책에 비판적인 세력들을 적으로 간주하는 경향도 강했다. 워터게이트 특별조사위원회의 조사결과 닉슨은 1969년부터 1971년까지 정부관계자 13명, 저널리스트 4명에 대한 불법적인 도청을 명령했으며, 1973년 여름까지 반대파 3천 개 단체 8000여 명의 회원 리스트를 작성해 세무조사 등 갖가지 압력을 행사했음이 드러났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워터게이트 스캔들은 닉슨 정권에겐 통상적인 업무인 셈이었다.

후버 국장은 워터게이트 스캔들이 있기 1개월 전 세상을 떠났다. FBI 장악을 노리던 닉슨은 후버의 부고가 전해지기 무섭게 측근을 국장 대리로 앉힌 데 이어 후버 국장이 확보한 사찰자료 제출을 요구했다. FBI로선 조직의 존립이 위기에 처한 순간이었다. 이러던 차 워터게이트 스캔들이 터졌다. FBI는 발 빠르게 움직였다. 이에 맞서 닉슨은 미 중앙정보부(CIA)를 동원하라는 지시까지 내렸다.

이런 와중에 <워싱턴포스트>의 보도로 닉슨이 워터게이트 사건의 배후임이 드러났다. 이 신문에 결정적인 제보를 한 이른바 '딥 스로트'는 당시 FBI 부국장이던 마크 펠트였다. 즉 FBI는 닉슨의 조직장악 시도에 맞서 그의 치부를 언론에 제공해 반격을 가한 것이다.

그러나 닉슨은 호락호락 물러나지 않았다. 워터게이트 스캔들이 불거진 지 1년이 넘도록 닉슨은 워터게이트 침입을 언론 보도를 통해 알았다고 주장했다. 그러다 1973년 7월 결정타를 얻어맞고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당시 상원 특별조사위원회가 개최한 청문회에 닉슨의 보좌관인 알렉산더 버터필드가 출석했다. 그는 청문회 석상에서 폭탄선언을 했다. 닉슨이 집무실에서 주고받은 모든 대화가 비밀 녹음테이프에 녹음돼 있다는 말이었다. 만약 이게 사실이라면 닉슨이 워터게이트 도청을 사주했는지 여부와 이 사건을 은폐하라고 지시 했는지 명명백백히 밝혀질 터였다.

비밀 녹음테이프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지면서 닉슨은 걷잡을 수 없이 흔들렸다. 사실 이 순간은 닉슨이 후버에게 허를 찔리는 순간이기도 했다.

닉슨이 집무실에 비밀 녹음테이프를 둔 이유에 대해 요미우리 신문사가 엮은 책 <20세기의 드라마>(이종주 역, 새로운 사람들)은 이렇게 설명했다.

"68년 11월 첫 번째 대통령 선거에서 막 승리한 닉슨을 뉴욕의 호텔로 찾아온 최초의 남자는 요인들의 급소를 틀어쥔 채 '정보왕국'에 군림하던 FBI국장 후버였다. 후버는 선거기간 동안 닉슨 진영이 모두 도청되고 있음을 밝힌 뒤 대통령 집무실에도 비밀녹음 테이프를 설치하라고 은근히 제안했다. 하지만 은밀하게 돌아가는 테이프는 닉슨을 지키는 최후의 무기가 되는 대신 파멸로 몰고간 흉기가 되고 말았다. 닉슨을 적대하던 후버가 시기심이 많은 그의 성격을 알아차리고 특별히 고안해 낸 덫이었을지도 모른다."

닉슨의 비밀을 담은 녹음테이프의 존재가 알려지자 하야 여론은 불붙기 시작했다. 특히 녹음 테이프를 공개하라는 여론이 들끓었고, 법원도 자료 제출을 명령했다. 닉슨은 하는 수 없이 750개를 내놓았다. 물론 4천 시간에 이르는 분량 중 극히 일부였고, 그마저도 자신에게 불리한 내용은 빠져 있었다. 워터게이트 사건이 불거진 지 2년째인 1974년 7월 미 연방대법원은 닉슨에게 나머지 테이프를 제출하라고 명령했다. 한편 미 하원 법사위는 3개 조항에 관한 탄핵안을 통과시켰다.

닉슨은 더 이상 버틸 힘을 잃었다. 그는 결국 1974년 8월7일 권좌에서 물러났다. 역대 미국 대통령 중 임기를 마치지 못하고 물러난 이는 그가 유일했다. 퇴임 이후에도 그의 생은 순탄치 못했다. 호시탐탐 정계복귀를 노렸으나 여의치 않았다. 무엇보다 그는 남은 생을 비밀 녹음테이프의 전면 공개를 막는 데 바쳤다.

닉슨의 비밀 녹음테이프, 그리고 세월호 7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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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정권 퇴진엔 종교인들도 동참하고 나섰다. 지난 19일 5대 종단 종교인들은 세종로 공원에서 시국기도회를 가졌다. ⓒ 지유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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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대통령의 세월호 참사 당시 7시간 행적은 비밀로 남을 가능성이 크다. 이에 세월호 유가족들은 19일 제4차 범국민대회에서 7시간 진상규명을 촉구하고 나섰다. ⓒ 지유석


제4차 범국민행동 촛불집회가 열렸던 19일 SBS시사고발프로그램 <그것이 알고싶다>에서는 세월호 참사 이후 논란이 끊이지 않았던 박 대통령의 7시간 행적을 추적했다. 방송을 앞두고 기대는 높았다. 그러나 제작진은 끝내 의혹을 풀어줄 퍼즐을 맞추지 못했다. 세월호참사 특조위 김동환 조사관은 이 방송에 출연해 이렇게 말했다.

"당사자들이 진정성 있게 그날에 대해 실체를 드러내지 않으면 영원히 묻혀 버릴 수 있는 사안입니다."

그동안 박 대통령과 김기춘 전 비서실장을 비롯한 친위세력들은 7시간 행적을 가리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총동원했다. 그런데 닉슨의 사례에 비추어 볼 때, 박 대통령의 7시간은 정권을 옥죌 결정적인 아킬레스건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청와대 국가안보실, 비서실, 국정원, 국무조정실 등 관련 정부부처는 한결같이 박 대통령의 7시간을 밝혀줄 자료 제출을 한사코 거부했다. 김기춘 전 실장은 "대통령 기록물이라 자료를 내줄 수 없다"고 버텼다.

버티기로 일관하는 상대를 눕힐 비책은 급소를 공략하는 것이다. 2년 동안 모르쇠로 일관했던 닉슨도 자신의 아킬레스건이 알려지고, 법원과 의회가 이걸 옥죄자 항복을 선언한 것처럼 말이다.

김종필 전 총리의 말대로 박 대통령은 온 국민이 외쳐도 권좌에서 내려오지 않을 것이다. 이런 상대를 때려눕히려면 급소 공략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급소는 '세월호 7시간'이라는 생각이다. 정치권과 시민사회가 현명한 방안을 마련해 주기를 기대해 본다.
덧붙이는 글 기사를 위해 볼프 슈나이더 지음, 박종대 역 <위대한 패배자>(을유문화사)와 요미우리신문사 엮음 <20세기의 드라마>(새로운 사람들)을 참고했습니다.
#워터게이트 #박근혜 #닉슨 #최순실 #청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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