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념공원 안 전통 가옥 사랑채에 봉안된 허균 영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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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균이 태어난 그의 외가, 강릉시 사천면 사천진리 하평마을에 들를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행운이었다. 이튿날, 강릉을 떠나 주문진으로 향하다가 얼핏 길가에서 '허균 시비'라 쓰인 이정표를 발견한 것이었다. 거기가 허균이 자호(自號)로 쓴 '교산(蛟山)' 언덕이었다는 건 나중에야 알았다.
사천의 하평마을은 허균의 외조부 강릉 김씨 애일당(愛日堂) 김광철의 옛터다. 부근 사천 바닷가에 큰 바위가 있었는데 그 밑에는 늙은 이무기가 엎드려 있었다. 때가 되자 이무기는 바위를 깨뜨리고 바다로 떠났다. 연산군 7년, 서기 1501년이었다. 이 바위는 '이무기가 떠난 문'이라 하여 '교문암(蛟門岩)이라 불리었다.
68년 뒤, 하평마을에서 '이무기 산[교산(蛟山)]'을 자호로 삼은 풍운아 허균이 태어났다. 완고한 중세 봉건사회를 살던, 마흔한 살에 당상관에 오를 만큼 출세가도를 달리던 이 명문거족 출신의 선비는 <홍길동전>을 쓰고, 서얼(庶孼)의 무리와 함께 반역을 꾀하다 처형되었다.
당대의 서얼들과 각별한 교유를 갖고 적서차별의 계급 모순에 저항해야 할 이유나 동기 따위는 애당초 없었던 교산은 "이름난 집안에서 정실의 소생으로 떳떳하게 태어났지만 스스로 시대의 서자가 되었다."(허경진, <허균평전>)
허균은 즐겨 교문암을 찾아 혁명을 꿈꾸었다던가. 용이 되어 승천하는 이무기를 그린 이 로맨티스트의 최후는 능지처참 형이었다. 홍길동전과 호민론(豪民論)과 유재론(遺才論) 등의 저술에 드러난 세계관과 민중관, 시대를 앞서간 정치적, 외교적 감각 등으로 교산은 중세 조선 사회를 혁명 직전의 상황으로 만들어 가긴 했지만 '그의 혁명'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현재까지 전해지는 내용만으로는 허균의 실패한 거사는 내용도 뚜렷하지 않으며, 거사 이후를 그린 정치, 사회적 전망도 모호하다. 그는 치밀한 계획으로 세상을 뒤엎을 만한 담대한 혁명가는 아니었다. 그러나 거사 실패 후의 동지들이나, 동조자들의 행동은 혁명의 진정성을 환기하면서 묘한 감동을 연출하고 있다.
이들은 주모자로 체포되어 압슬형을 당하면서도 자백을 거부했고, 허균이 하옥되자 심문을 제대로 못하도록 돌을 던져 국청의 문짝을 깨뜨리거나 형졸들의 머리를 깨뜨리기도 했다. 하급 아전과 노비들, 그리고 무사들 수십 명이 의금부 감옥 앞에서 시위를 벌이는 모습 등은 교산이 민중들의 좌절과 절망을 대변했던 지도자였다는 사실을 입증해 준다.
허균은 저잣거리에서 목이 떨어졌고, 그의 머리는 시장 바닥에 전시되었다. 막대 셋을 밧줄로 매고 '역적 허균'이라는 팻말을 달아 그 막대 가운데에 목을 매달았다. 역적으로 죽었기에 연좌적몰(連坐籍沒)의 법을 시행했으며 집은 헐려서 연못이 되었다. 그를 따르던 민중들은 장례를 치르기 위해 그의 머리를 가져가려다가 이를 말리는 수직(守直) 군사와 충돌하기도 했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