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괴산의 숲속작은책방
김건숙
싱글의 청산은 정신적 안정을 주는 대신 몸의 노동을 요구했다. 가사와 출산, 육아에 이르기까지 일은 점점 많아지고 힘들어졌다. 현재의 젊은 친구들하고는 비교가 안 되겠지만 그래도 남편은 우리 세대에서는 드물게 가사에 많이 참여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회사 일로 늦는 날이 많아서 집안일은 대부분 내 차지였다.
특히 연년생으로 아이들을 낳아 키우고 있을 때 남편은 국내외 출장이 잦았다. 그래서 많이 힘들었다. 아이들이 어느 정도 큰 뒤에는 독서 관련 일을 하였는데 점차 일이 많아지면서 몸이 지쳐갔다. 숨구멍이 필요했으나 일을 안 할 수는 없었다.
이처럼 힘들고 지칠 때에는 배낭에 책을 가득 넣어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아무 것도 안 하고 그저 책만 읽으며 휴식을 취하고 싶었던 것이다. 다큐멘터리 TV 프로그램에서 법정 스님의 암자를 본 적이 있다.
대나무 숲길을 지나 방으로 들어가니 가사 한 벌, 앉은뱅이책상, 다구, 책만 있었다. 그때에도 많이 지쳐 있었는지 그 곳에 내가 있는 상상을 했고 그 암자의 모습은 아직도 강하게 각인되어 있다. 누구한테도 방해받지 않는 한적한 곳에서 단 사흘만이라도 책만 읽다가 오면 좋겠다는 마음이 간절했다.
그런데 바로 그런 공간이 생겼다고 했다. 내가 그토록 원하던 시기에는 없었지만 최근 몇 군데 북스테이 공간이 생겼다. 이들도 처음부터 민박을 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다.
아들이 대학생이 되어 집을 떠나 있게 되면서 아들 방이었던 2층 다락방이 손님방이 되었다가 민박으로 바뀌었다. 프랑스에서 경험한 행복했던 시골 민박이 자연스럽게 그 일을 하도록 했다고 한다. 지금 이곳은 예약이 많아서 바로는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인기가 많다.
그런데 나처럼 힘들 때 책과 함께 푹 쉬고 싶어 한 사람이 있었다고 해서 반갑고도 놀랐다. 한 직장 여성이 1년 중 유일하게 허락되는 3일의 휴가를 이 <숲속작은책방>에서 보냈다고 한다. 어렵게 얻은 휴가라 아무 것도 안 하고 책만 보면서 조용히 쉬고 싶다면서 간단한 산책을 제외하곤 집을 떠나지 않았다고 한다.
"하루 종일 볕을 쬐거나 다락방에 머물며 잠을 자거나 책을 읽었다"고 주인장의 책에 나와 있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나처럼 그런 공간과 시간을 간절히 원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그럴 것이다.
서점의 안주인인 백창화씨도 그런 경험이 있었다고 한다. 과로와 스트레스로 마음이 지치자 몸이 많이 아팠던 때라고 한다. 하던 일을 당장 그만 둘 수가 없어 단 며칠이라도 몸과 마음을 달래면서 조용히 쉬고 싶었단다. 일상과 떨어져 온전히 자신만의 시간을 갖고 싶어서 책이 가득한 곳을 열심히 찾았지만 대개 수련원이나 명상센터여서 결국 포기했다고 한다.
자연 속에서 아름다운 정원과 책으로 가득한 집을 만들고 살면서 그때 생각이 많이 났다. 그때 내가 원하던 곳이 바로 이런 집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나는 몇 해가 흘러서 그때 간절히 원하던 집을 스스로 만들고야 말았구나 하는 생각. - <작은 책방, 우리 책 쫌 팝니다!>, 백창화·김병록, 남해의 봄날그랬던 것이다. 꽃들의 향기가 가득한 정원에 책 한권 들고 앉아 있으면 문득 과거 자신의 모습이 떠올라서 민박의 문을 열게 된 것이다. 자신이 누리는 편안함과 행복감을 지친 이들과 함께 나누고 싶은 따스하고 아름다운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가능했던 것이다. 숙박업이라는 것이 돈벌이로 생각한다면 하기 힘든 일이다. 예약에서부터 침구 세탁, 청소, 손님맞이 등 손이 많은 가는 일이다.
특히 이 숙소는 주인 부부가 살고 있는 이층에 있다. 화장실도 1층에 하나여서 주인들과 같이 사용해야 한다. 주변에 식당이 있는 것도 아니다. 내가 숙소를 얻을 때 가장 염두에 두는 것이 화장실과 식당이다. 밖에 나가서 볼 일을 제대로 보지 못하면 여행이 아니라 고통이다. 그리고 나는 아무리 주방 시설이 잘 되어 있는 곳에서 묵는다 해도 음식을 싸 들고 다니지 않는 현지 조달형이다. 그래서 주변에 식당도 있어야 한다.
그래도 이곳은 한번 묵어보고 싶다. 이틀까지도 가능할 것 같다. 왜냐하면 주변 경관이 너무 좋아서 식당이 없어도 용서가 될 것 같다. 동네 자체도 멋지고 산책하기에 좋지만 조금만 나가면 멋진 계곡이나 호수가 있다. 나는 이곳에 갔을 때 묵지 않고 책만 사서 나왔다.
일본에서 온 남편과 함께였기 때문에 여러 가지 고려해 자는 것까지는 못했다. 다음엔 친구와 함께 가서 꼭 한번 자 보고 싶다. 지금은 지친 몸을 풀어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책방과 책방 주변의 자연을 흠뻑 느껴보고 싶다.
책방이 있는 미루 마을은 동화 속에 등장할 것 같은 집들이 모여 있다. 책방의 숙소 공간인 2층 다락방도 동화 나라 같다. 한켠에 책이 몇 권씩 놓여 있는 나무 계단을 올라가면 방 두 개가 마주보고 있다. 한 사람이든 두 사람이든 꼭 한 팀만 예약을 받는다고 하니 존중 받는 느낌을 받을 것 같다. 사선으로 내려 온 천장과 깔끔한 침대 그리고 책들이 편안한 분위기를 만들어 준다. 벽에 붙어 있는 나무 인테리어도 좋다.
다락방의 숨은 장치인 왼쪽 문은 아이들이 아주 좋아할 것 같다. 주인장이 "책아 책아 사랑해, 책아 책아 사랑해, 책아 책아 사랑해," 하고 세 번 외치면 스스로 열리지만 곧 들통 날 장난이라고 위트 넘치는 주인장님의 말에 웃음이 나온다. 이 마법의 문이 열리면 그 방은 한 마디로 보물창고이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좋아하는 안주인이 앨리스에 관한 자료들을 모아 놓았다. 토끼굴로 떨어진 앨리스처럼 눈에 비친 이상한 나라처럼 신기한 곳이어서 그렇게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그리고 안주인이 가산을 탕진(?)하며 수집하였다는 팝업북과 아트북이 500여 권이 있다.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할 것 같다. 아직 우리나라에는 팝업북이 다양하지 않아서 구경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만날 수 있다.
온갖 캐릭터 인형과 북아트 아이템이 모여 있고 수레 책장과 재미있는 모양의 책상 등이 있어 아이들과 함께 묵기에도 좋다. 아이가 어렸을 때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어주는 것은 최상의 선물이다. 성인이 되었을 때 그것이 어떤 영향을 미칠지 모르기 때문이다.
일상에 지친 도시인들에게 묻지 마 여행지로는 이 <숲속작은책방>이 최고일 것이다. 1박 2일 또는 2박 3일을 묻지도 말고, 따지지도 말고 그냥 지친 영혼을 자연 속에 푹 놓아주는 것이다. 직장도 집도 모두 잊고 말이다.
그러다가 누군가와 말이 하고 싶어질 때면 정원에 앉아 주인장과 이야기를 나누시라. 따스한 햇살 아래여도 좋고, 은은한 달빛 아래여도 좋을 것이다. 이미 당신과 같은 경험을 가진 자이기에 표정만 보고도 그 마음 다 헤아려 줄 것이다.
주소: 충청북도 괴산군 칠성면 명태재로 미루길 90(칠성면 사은리 768-5 미루마을 28호)전화번호: 043-834-7626 홈페이지 : http://blog.naver.com/supsokiz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댓글
빛살무늬의 세상 읽기라는 블로그를 운영하며 책과 동네 책방과 그림책에 대한 애정이 깊다.
<책 사랑꾼 이색 서점에서 무얼 보았나?>과 <책 사랑꾼 그림책에서 무얼 보았나?>를 지어 세상에 내놓았다.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이런 제목 어때요?>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