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일 오전 서울 중구 신당역 여성화장실 입구에 스토킹 살인사건의 희생자인 여성 역무원을 추모하는 국화꽃과 시민들이 작성해 붙인 메모가 붙어 있다.
권우성
정부와 국회는 부랴부랴 대책을 마련하고 있습니다. 법무부는 스토킹 범죄의 '반의사 불벌죄(피해자가 처벌 않을 시 기소할 수 없는 범죄)' 폐지를 추진하겠다고 밝혔고, 국회는 스토킹 피해자 보호법이 발의된 지 150일이 지나서야 논의를 시작했습니다. 관련 법 제·개정은 물론 꼭 필요한 일이지만, 그것만으로 모든 걸 해결할 순 없습니다. 이러한 범죄의 근본 원인이 무엇인지 살펴야 합니다.
불법 촬영과 스토킹 범죄는 대표적인 '젠더폭력' 중 하나이고, 이것은 "성차별적 의식이 많이 반영되며, 여성을 자신의 소유물로 여기고 지배하는 잘못된 통념이 작동하는 범죄"(9월 16일 권인숙 민주당 의원·여가위원장 발언)입니다. 즉, 젠더 폭력을 근절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사회의 성차별적 구조를 개선하기 위한 노력이 수반되어야 합니다.
여성을 억압·착취하는 행위들이 용인돼올 수 있었던 것은 결국 성차별적 구조가 강고하게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불법 촬영과 스토킹에 고통받는 여성들은 수도 없이 많았지만, 그것이 '중대 범죄'로 규정된 지는 채 5년도 되지 않았습니다. 어디 이것뿐이겠습니까? 남성 중심 사회의 성차별적 구조가 여성에 대한 차별과 억압을 관습화하고 정당화했고, 그 안에서 '젠더폭력 가해자'가 길러져 왔습니다.
남성중심적인, 동시에 여성착취적인 관성은 너무나 강력합니다. 법원만 봐도 그렇습니다. <시사저널>이 지난 5월 스토킹처벌법 관련 판결문(1심)을 분석한 결과, 스토킹 처벌법 시행 이후에도 징역형이 선고된 경우는 56건 중 9건에 불과했습니다. 징역 2년 이상이 내려진 경우는 단 2건이었습니다.
심지어 6개월간 이혼한 부인의 주거지와 직장을 90여회 찾아간 남성에 대해서도 결론은 '집행유예'였다고 합니다. 아직 대법원은 스토킹 범죄에 대해선 양형기준을 세우지 않은 상태입니다. 이는 법의 개정만큼이나, 그걸 다루는 '사람'의 인식도 바뀌어야만 한다는 걸 의미합니다.
하지만 세상은 거꾸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준석 전 국민의힘 대표는 2021년 5월 당시 한 언론 인터뷰에서 '여성이 안전하지 않은 걷기 환경'을 언급한 조남주 작가의 발언에 대해 "망상에 가까운 피해의식"이라고 비난했습니다. 지난 1월 <오마이뉴스> 인터뷰에서는 "여자라서 죽었다" 또는 '교제살인' '데이트폭력' 등 용어를 거론하며 "여성계가 단순히 감정적인 면만 계속 부각한다"는 취지로 지적하기도 했죠(관련 기사:
"20대 여성, 어젠다 형성 뒤처지고 구호만" http://omn.kr/1wz3l ).
그의 언행들은 윤석열 대통령의 당선과 더불어 "안전하게 살고 싶다"라는 여성들의 목소리를 사소하게 만들고 주변화하는, 동시에 젠더폭력을 한 개인의 일탈적 행위로만 치부하게 만드는 '백래시(변화에 대한 반발)'를 불러오게 됩니다.
대선까지만 하더라도 이 전 대표와 함께하던 윤 대통령은 선거 과정에서 여성가족부 폐지 공약을 내걸고, "구조적 성차별은 없다"라고 발언했습니다. 그리고 이후에도 '성차별'이 전혀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 듯한 정부·여당의 행보는 계속 됩니다.
일례로 김현숙 여가부 장관은 인하대 성폭력 사망 사건이 "여성에 대한 폭력이 아니다"라고 말했다가 뒤늦게 발언을 정정했고, 이번 신당역 스토킹 살인사건에 대해서도 '여성혐오 범죄는 아니다'라고 해 논란이 됐습니다. 온 세상이 젠더폭력 피해자 보호의 중요성을 강조하는데도, 정작 정부는 피해자 보호의 주무부처가 없어져야 한다고 말하는 서글픈 상황입니다.
누군가는 '성범죄는 성차별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고 말합니다. 누군가는 '이제 여성을 위한 정책은 그만해야 된다'고 말합니다. 그 와중에 성평등한 사회를 위해 싸우던 이들이 깨부수려고 했던 '관성'은, 언제 그랬냐는 듯 아주 자연스럽게 다시 작동하게 될 것입니다.
여성의 안전 문제를 '망상'이나 '피해의식'으로 치부하지 않는 사회였다면, 남성의 불법촬영과 스토킹을 엄중한 문제로 다뤘다면. 분명 피해자는 살 수 있었습니다. 때문에 이번 사건은 결코 단순한 '사고'가 아닙니다. 젠더폭력 방지와 여성 안전에 대해선 수 천 번, 수 만 번 문제제기하고 논의해도 부족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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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릴 수 있었던 세 번의 기회... 모두 놓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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