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묘 내부의 영녕전에 모셔진 단종 신주의 위치. 영녕전 7번 방에 있다.
김종성
이렇게 된 데는 단종에 대한 대중의 동정심과 더불어 크게 두 가지 원동력이 밑바탕이 됐다. 그중 하나는 16세기 후반의 지배층 교체였다. '정권' 교체가 아니라 '지배층' 교체였다.
16세기 중후반인 1567년, 선조 임금이 즉위했다. 그 이전 지배층은 흔히 훈구파로 통칭된다. 주로 한양에 거주하고 대규모 부동산을 소유했으며, 정상적인 승진보다는 쿠데타나 정변으로 권력 핵심부에 진입한 정치인들이었다.
반면, 1567년 이후의 신(新)지배층인 사림파(유림파)는 상대적으로 건전했다. 나중에는 부패해졌지만, 당시만 해도 이들은 건전하고 싱싱했다. 주로 지방에 거점을 둔 중소 규모의 부동산 소유자들이었으며, 대개 경우에 정상적인 승진 절차를 걸쳐 권력 핵심부에 진입했다. 이들은 훗날 동인·서인당으로 갈라졌다가, 다시 남인·북인당 및 노론·소론당으로 분해된다.
바로 이 사림파가 단종 복권의 원동력 중 하나가 됐다. 단종의 비극은 사림파가 집권하기 전에 있었던 일이다. 훈구파 시대의 일이다. 수양대군이 조카의 왕위를 빼앗은 일은 일반 대중의 정서에 배치됐을 뿐 아니라, 사림파의 이념인 왕도(王道) 정치에도 위반됐다. 왕도 정치는 덕과 도덕에 기초하며 공식 절차에 입각한 시스템 정치다.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은 이에 위배됐다.
사림파는 중앙 정계에서 세력을 이룬 15세기 후반부터 여러 형태의 단종 복권운동을 전개했다. 이런 움직임에 관해 2010년에 <사학 연구> 제98권에 실린 국사편찬위원회 김영두 편사연구사의 논문 '단종 충신 추복(追復, 지위 회복) 논의와 세조의 사육신 인식'은 이렇게 정리한다.
"멀게는 생육신을 비롯한 여러 인물들이 세조 집권의 부당성과 단종 폐위의 억울함을 소극적으로나마 드러낸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성종 때의 소릉(단종 어머니 지칭) 복위 주장, 중종 때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세력의 사육신 절의 현창(표창) 노력, 후손들을 중심으로 전개된 복권과 추존 노력, 조선 후기에 국왕 주도로 이루어진 국가적인 복권과 현창 사업에 이르기까지, 단종과 단종 충신들을 복권하고 추존하기 위해 오랜 시간 동안 다양한 방식의 행동이 있었다."1567년 이전만 해도 사림파는 야당이거나 재야 세력이었다. 그래서 이들의 단종 복권운동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1567년 선조의 즉위와 함께 사림파가 집권에 성공했다. 이때부터는 단종 복권 운동이 이전보다 활발하게 전개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오래도록 성과가 없었다. 단종에 대한 국가의 예우가 조금씩 달라지기는 했지만, 단종을 왕으로 복권시키는 조치는 쉽게 나오지 않았다. 그것은 사림파가 집권한 뒤에도 왕들은 여전히 수양대군의 후손들이었기 때문이다. 왕들의 소극적 태도가 단종의 복권을 방해했다.
결정적 계기, 숙종결정적 전기가 마련된 것은 1674년에 숙종이 등극한 이후였다. 이 시대에는 당쟁이 유별나게 극심했다. 사림파의 두 분파인 남인당과 서인당이 치열하게 대결했다. 그 향배에 따라 사약 사발이 이쪽 당에서 저쪽 당으로 옮겨지곤 했다.
이런 정국 속에서도 사림파 내 다수파인 서인당 중심으로 단종 복권운동이 끊임없이 전개됐다. 그리고 숙종은 이전 임금들과 달리 이 문제를 색다른 각도에서 바라봤다. 단종을 복권시킴으로써 생기는 손실(수양대군 이미지의 흠집)보다 이익(왕권 강화에 도움)이 더 크다고 그는 판단했다. 단종과 그에게 충성을 바친 사육신의 이미지를 활용하면, 극심한 당쟁의 소용돌이에 놓인 숙종 자신에 대한 신하들의 충성심을 높일 수 있다고 계산한 것이다.
그는 단종이 수양대군에 의해 상왕으로 추대된 적이 있다는 점과, 수양대군이 상왕이 된 단종을 한동안 보호했다는 점을 부각시키면, 단종을 격상시키더라도 수양대군 이미지에 큰 흠집이 나지 않을 수 있다는 계산도 했다. 그런 점을 부각시키면 단종 복권을 수양대군의 뜻으로도 포장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앞에서, 단종 복권이 성사된 데에 대중의 동정심과 더불어 두 가지 요인이 작용했다고 말했다. 하나는 사림파의 집권였다. 또 하나가 바로, 숙종의 이해관계였다. 단종 복권을 활용하고자 한 '숙종의 정치적 계산'이 오래 전부터 단종 복권운동을 벌인 서인당(사림파 분파)의 입장과 맞아떨어졌다. 그러면서 200년 넘게 '군'으로 격하돼 있었던 단종의 위상이 급속히 격상되기 시작했다.
숙종 즉위 7년 뒤인 1681년에는 단종이 노산군에서 노산대군으로 격상됐다. 17년 뒤인 1698년에는 노산대군에서 주상으로 한층 더 격상됐다. 이에 따라 단종이라는 묘호도 부여받게 됐다. 이렇게, 대중의 동정심과 더불어 사림파의 집권 및 숙종의 결단이 어우러지면서, 단종은 죽은 지 232년 만에 왕의 지위를 회복하게 됐다.
232년 걸린 지위 회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