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 않은 노래

어느 중년 월급쟁이의 3월 일기

등록 2004.03.31 09:48수정 2004.03.31 1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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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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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12일 밤 대통령 탄핵에 반대하여 여의도에 모인 성난 군중 ⓒ 정상택


“이 나라 국민으로 산다는 것이 힘들다기보다 차라리 서글프다는 생각이 드네.”

정오가 가까운 시각, 근무 중인 아내가 보낸 문자메시지를 보는 순간 나는 가슴이 쿵 울리는 소리를 들었다. 결국 벌어지고 말았구나!

설마하며 지켜보던 '대통령 탄핵'이라는 전대미문의 날치기.

그들은 끝내 자신들이 꾸민 음모와 야합의 예정된 수순을 밟았을 뿐 결정에 이르는 과정 어디에서도 70%가 넘는 탄핵반대의 국민 여론은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텔레비전을 보지 않았지만‘표결’이라는 절차의‘합법성’을 앵무새처럼 반복하고 있을 저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거기에 그들은 자신들의 행동이‘국민의 여망’을 반영하여 고뇌 끝에 선택한‘구국의 결단’이라는 식의 황당한 궤변을 덧붙이고, 있을 것이다.

'말의 성찬’이 뒤따르지 않는 쿠데타가 있었던가? 60년대 박정희의 오일육이 그랬고, 80년의 전두환 오일칠이 그랬다.

오후의 업무는 엉망이 되어버렸다. 이건 아니다. 정말 이것만은 아니다. 답답함과 치밀어 오르는 분노로 눈에 들어오지 않는 서류들을 뒤적일 수밖에 없었다. 무엇인가 해야하겠는데, 그저 어제와 다름없이 업무에 매여 있어야하는 월급쟁이인 자신이 자꾸 무기력하고 한심하게 생각되었다.

돌이켜보면 저들은 우리의 일상에 대한 자부심까지 짓밟아 왔다.

달마다 박봉을 쪼갠 깨알같은 글씨로 가계부를 채워도 중년이 되도록 생활은 좀처럼 피지 않지만 아내는 늘 작은 일에 감사할 줄 알았고, 다가오는 미래와 딸아이를 위해서 무엇인가 소담스런 꿈을 담아 둘 줄도 알았다. 그런데 저들은 사과상자와 트럭에 실린 검은 돈의 음습하고 추잡한 굴레를 우리의 떳떳한 자부심과 앞날에 거는 작은 꿈 위에 덮어씌우지 않았던가.

저들이 그렇게 우리들에게 강요한 한숨과 절망의 끝에서 어떤 이웃은 아이들과 함께 높은 아파트에서 몸을 던지고, 어떤 노동자는 스스로의 몸에 불을 붙였던 것이다.

무엇인가를 하고 싶었고, 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더 많은 날을 우리는 비탄 속에서 지내게 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머리 속은 어지럽고 퇴근시간은 더디게 다가왔다. 일과를 마치고 아내와 함께 강변도로로 차를 몰아 달려간 곳은 여의도 국회 앞이었다.

국회 주변은 온통 경찰버스가 에워싸고 있었다. 골목 어귀에 차를 주차시키고 마이크 소리가 울려나오는 집회 장소를 찾아 갔다. 그리고 사람들 사이에 자리를 잡고 오래도록 부르지 않았던 옛 노래들을 목청을 가다듬어 부르기 시작했다.

언제였던가. 아마 87년 6월이었을 것이다. 그 해 6월을 겪은 사람이라면 두려워 웅크리던 마음을 벗어던지고 마침내 거리로 뛰쳐나갔을 때의 벅찬 감동을 잊지 못할 것이다. 나는 촛불을 들지 않은 손으로 아내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리고 마음 속으로 속삭여 주었다.

아내여! 당신 말대로 이 땅에서 사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결코 서글퍼 하지 말기로 하자. 서글프다니! 여기 질식과 분노의 가슴들은 이렇게 모여 함성으로 슬픔과 눈물을 다시 걷어내고 있지 않는가. 그해 6월처럼.

3월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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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13일 종로를 가득 메운 집회 참가 시민들의 모습 ⓒ 정상택


광화문으로 나가는 나와 아내에게 관절염으로 무릎이 불편한 탓에 동행을 할 수 없는 장모님은 당신 몫까지 힘껏 소리쳐달라고 당부를 하셨다.

무릎 때문에 올해는 투표를 하지 않으려고 했으나‘국민을 우습게 아는 불한당 놈들’때문에 기어서라도 가셔야겠단다. 평소 정치에 무심했던 노인에게 저토록 전투적인(?) 의지를 불어 넣은 사람들은 바로 저들이다. 부정한 시대는‘가장 온순한 인간들 중에서 가장 열렬한 투사를 만들어낸다'고 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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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13일 집회에서 젊은이들이 경쾌한 율동으로 집회에 생기를 불어넣었다. ⓒ 정상택


광화문에 도착했을 땐 교보빌딩에서 시작된 인파가 종로 쪽으로 이미 거대한 대열을 이루고 있었다. 아내는 좀더 일찍 나왔어야 했다며 가벼운 투정을 했다. 하루 만에 사람들은 놀라울 정도로 평상심을 회복하고 있는 듯 했다.

어제 충격과 격앙이 진정된 자리엔 차라리 축제라고 불러도 좋을 흥겨움까지 넘쳐났다. 이곳저곳에서 젊은 대학생들이 노래 <바위처럼>이 나올 때마다 흥겨운 율동을 보여 주었다. 그 자유분방함과 재기발랄함은 80년대의 비장함이 시대상황에 걸맞게 변화된 것이 아닐까?

아내와 내가 젊은 시절을 80년대의 긴급조치와 신군부란 폭압적인 분위기에서 보냈다면 우리의 젊은 세대는 좀더 많은 자유로움 속에서 월드컵 응원이란 경이로움을 직접 주도하고 체험한 세대이니까. 각종 구호와 주장들이 쓰인 현수막이나 피켓을 보는 것은 또 다른 즐거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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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13일 집회에 등장한 재미있는 피켓 ⓒ 정상택


70년대 초 시인 김지하는 다시의 권력형 부패 특권층을 통렬하게 풍자한 담시(譚詩) 오적(五賊)을 발표했다. 재벌, 국회의원, 고급공무원, 장성, 장차관 등이 그가 말했던‘다섯 명의 도적놈’이다. 그 중 국회의원의 모습은 이렇게 그려진다.


“국회의원 나온다 / 곱사같이 굽은 허리, 조조같이 가는 실눈, / 가래끓는 목소리로
응승거리며 나온다 / 털투성이 몽둥이에 혁명공약 휘휘감고 / 혁명공약 모자쓰고
혁명공약 배지차고 / 가래를 퉤퉤, 골프채 번쩍, 깃발을 높이들고 대갈일성,쪽 째진
배암 샛바닥에 구호가 와그르르 / 혁명이닷, 구악(舊惡)은 신악(新惡)으로!
개조(改造)닷, 부정축재는 축재부정으로! / 근대화닷, 부정선거는 선거부정으로!
중농(重農)이닷, 빈농(貧農)은 이농(離農)으로! / 건설이닷, 모든 집은 와우식(臥牛式)으
로! 사회정화(社會淨化)닷, 정인숙(鄭仁淑)을, 정인숙을 철저히 본받아랏! / 궐기하랏,
궐기하랏! 한국은행권아, 막걸리야, 주먹들아, 빈대표야, 곰보표야, 째보표야, /
올빼미야, 쪽재비야, 사꾸라야, 유령(幽靈)들아, 표도둑질 성전(聖戰)에로 총궐기하랏!
/ 손자(孫子)에도 兵不厭邪(병불염사), 治者卽 盜子요 公約卽 空約이니 愚昧국민 그리
알고 저리멀찍 비켜서랏, 냄새난다 퉤- / 골프 좀 쳐야것다”


시가 발표된 이래 30여년이 지났건만 해마다 식상할 정도로 터져 나오는 온갖 비리와 부정부패의 소식과 함께 오늘 우리는 우리 사회가 그들의 추한 놀음에서 아직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새삼 확인한다.

집으로 돌아와 TV를 보니 탄핵의 후폭풍이 거세게 불고 있었다. 탄핵을 주도한 정당의 지지도가 급락하였다. 그런데 한 방송 인터뷰에서 저들은 뜻밖에도 정당 지지율 저하에 개의치 않는다고 했다.

저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국민들이 탄핵의 충격을 잊을 것이며, 곧 지지도가 원래대로 돌아갈 것이라고 여유를 가지고 있었다. 마치 그 정도쯤은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한 태도였다.

단순히 정치적인 제스처라고 하기에는 국민을 건망증 환자로 매도하며 깔보는 뻔뻔한 논리였다. 오늘 저녁 촛불집회에 한 줄의 글귀로 응축되어 등장한 국민의 다짐이 저들의 오만한 눈에는 보이지 않았던 것일까?

“4월 15일. 우리는 너희를 잊지 않을 것이다.”

3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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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0일 , 집회가 거듭되면서 시민들은 다양한 내용과 방식으로 자신들의 의지를 표현했다. ⓒ 정상택


1960년 자유당의 3·15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민중들의 자연발생적인 시위가 전국을 휩쓸었다. 그때 한 관제 언론은 이런 사설을 썼다고 한다.


“......그 배후에는 악질적인 사주자들이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명백히 추단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그 사주자들은 누구인가. 더 말할 것도 없이 평온한 선거의 진행에 불이익을 느끼는 사이비 정치적 폭행자들일 것이니." - 서울신문 3월 17일자 -


40여년이 지난 지금 그 낡고 추한 망령이 아직도 우리 사회를 배회하고 있음을 본다.

저들은 촛불집회가 특정 정당의 배후 조종으로 이루어지는 불순한 목적의 정치집회라고 폄하하고 있는 것이다. 참가자들 자체도 ‘이태백’이니 ‘사오정’이니 하는 모욕적인 단어로 비하했다. 그러나 나는 바로 거기서 저들이 생각하는 정치의 수준과 저들이 행하는 정치의 본질을 읽는다.

먹고살기도 바쁜 판에 누가 누구의 지시를 받고 그 차디찬 도로 위에 앉아 너댓 시간이나 보낼 수 있단 말인가. 아내와 내가 오늘 또 광화문에 나간 것은 '무슨무슨 사모’니 ‘무슨 빠'니 하는 모임에 소속되었거나 아니면 어느 유명 글쟁이가 비아냥거린 대로 ‘정권의 홍위병'이어서가 아니다.

나는 늘 오르는 집값 마련하고 딸아이 가르치기에도 허겁지겁인지라 그런 곳에 얼굴 내밀 시간도 지식도 없는 '개털’일 뿐이다. 아내와 나는 다만 상식이 실현되고, 상식이 통하는 단순한 세상에 살고 싶을 뿐이고 나아가 사랑하는 우리 딸아이에게는 우리 세대가 겪었던 폭력과 폭압, 비상식과 비논리가 사라진 좀더 나은 사회를 물려주고 싶기에 거리로 나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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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20일. 이제 집회장은 단순히 탄핵철회를 요구하는 시위장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교실이자 축제의 장이었다. ⓒ 정상택


오늘은 광화문 사거리에서 시청 쪽으로 향하여 집회 대열이 이루어졌다. 지난 주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참석한 것 같았다. 자원봉사자들에 의한 통제도 조직적으로 보였고, 시민들도 그에 잘 따라 집회 대열은 바둑판 모양으로 통로를 확보한 채 정돈되었다.

지난 번에 집회에 늦게 참석한 것에 아쉬움이 많아 이번에는 좀더 시간을 당겨 갔음에도 무대에서 한참 밀려난 곳에 앉을 수 있었다. 앞사람에 가려 무대가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스피커도 멀티비전도 처음엔 무대 주변에만 작동이 되어 우리가 앉은 자리에선 사회자의 진행소리도 모습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그러나 그것이 큰 문제는 아니었다. 누구도 그런 것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아내와 나를 포함해서 참석한 시민들 모두가 단순히 공연을 보러온 관객이 아니라 공연을 만들러 온 배우라는 사실을 기쁘게 인식하고 있는 듯했다. 그렇게 우리는 스스로가 떳떳하고 자랑스러웠다. 우리들의 노래와 구호는 그 어떤 정치세력이나 이념에서도 자유로운, 민주를 향한 간절한 기도였던 것이다.

느닷없이 방송의 편파성을 들먹이며 방송사를 찾아가 항의를 하던 끝에 물도 내놓지 않는다고 호통을 쳤던 저들을 빗댄 “물은 셀프!”라는 피켓이 우리를 즐겁게 했다. 그 구호를 보며나는 문득 민주주의 역시 우리가 만들어 가야하는 즐거운 ‘셀프’라는 것을 깨닫는다.

시민들이 목소리를 내기만 하면 배후부터 들먹이는 저들은 이제 솔직히 인정해야 할 것이다. 아내와 나의 경우처럼 사람들을 거리로 나오게 한 배후는 다름이 아닌 상식과 순리가 지배하는 사회를 만들려는 시민들의 자발적인 의지라는 것을. 그리고 그들은 깨달아야 할 것이다.

사람들은 그날이 오기까지 증오해야 할 것들을 증오할 것이라는 사실을.

3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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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27일. 시민들은 변함없이 탄핵무효와 민주수호를 외쳤다. ⓒ 정상택


촛불집회는 불법으로 규정되었고, 행사를 주관했던 대표자들 몇 명에게는 구속영장까지 신청되었다는 뉴스가 나왔다. 그러나 아내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이럴 때 일수록 국민들이 더욱 단합된 모습으로 촛불시위의 정당성을 알려야한다고 강한 의지를 보였다.

나는 회사에서 돌아오자마자 아내에게 떠밀리다시피 광화문으로 나갔다. 아내 덕분에 무대를 설치하려는 시민들과 경찰의 작은 실랑이가 벌어져 처음부터 집회에 참가할 수 있었고, 무대에 가까운 로얄석(?)에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가벼운 실랑이였지만 경찰과의 마찰이 원만하게 끝난 것은 다행스런 일이었다. 시민들은 흥분하지 않고 침착한 태도로 자신들의 요구사항을 주장했고, 경찰 역시 냉정함을 견지하며 시민들의 요구를 들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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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흰 아니야'는 이제 2004년 3월의 주제가가 되었다. ⓒ 정상택


선관위가 4월 2일부터는 선거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어떠한 집회도 금지한다는 방침을 세워 어쩌면 당분간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르는 대규모 집회였다. 그러나 시민들의 승리에 대한 확신은 이미 거스를 수 없는 도도한 역사의 물결처럼 출렁이며 거리는 신명 넘치는 축제의 장이 되어 있었다.

새로운 세상이 새로운 상상력으로 세워진다면 국민의 자유로운 상상력과 주장을 제한하는 그런 식의 법률적 운영은 그리 합당해 보이지는 않았다. 선거는 국민이 주권을 행사하는 축제의 장이다.

주인은 손을 놓고 있어야하고 객들만이 설치는 잔치집은 더 이상 잔치집이 아니다. 더군다나 상대가 주인의 뜻을 무시하는 무뢰배들이라면 주인이 팔을 걷어붙이고 그들을 몰아내기 위해 '너희들은 아니야’라고 외치는 것은 당연한 노릇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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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들이 서로 손뼉을 부딪히며 집회를 마감하고 있다. ⓒ 정상택


우리는 낯선 옆 사람과 어깨를 걸고 노래를 불렀다. 한 목소리로 구호를 외쳤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우리는 음식과 음료수를 나누었다. 일상으로 돌아가면 혹 어디선가 인상 찌푸려야하는 악연으로 만날 수도 있겠지만 오늘 저녁 광화문에서 우리가 만든 만남은 평화롭고 아름다운 것이었다.

기억할 것이다. 다시 또 세상을 잘못 읽은 누군가 우리들의 삶에 두터운 굴레를 씌우고 무법자처럼 우리들의 아름다운 거리를 활보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함성이 배인 이 거리를 기억할 것이다. 우리의 노래는 아직 끝난 것이 아니다.


“아직도 길은 멀고 당신은 제자리에 있는데 모든 가치가
뒤범벅이 되고 먼저 가졌던 자들의 힘은 여전히 막강하답
니다. 그래두 나는 여기를 사랑하고 자랑스러워하겠어요.
요만큼이라두 이루어낸 사람들과 같은 시대에 살았으니까요.
이 초라하고 남루한 누더기 더미 속에서 보석같은 알맹이들을
골라내어 다시 빛나는 옷으로 지어낼 테니까요."

- 황석영, 오래된 정원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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