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아, 하늘도 때로는 배신한단다

수능성적표를 받아든 모든 아이들에게

등록 2007.12.10 13:59수정 2007.12.10 1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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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년 이맘 때쯤이었지.
 그때 넌 이제부터 공부 좀 해봐야겠다고 새삼 얘기했었지.
 그전까지 우리는 사실 포기하고 있었지.
 네 엄마는 "저 녀석 전문대학 가면 잘 갈 거다"하고 나는 "공부는 못해도 심성은 더없이 착하잖아"하고 대답했지.
 

"그래도 공부를 저렇게 안 하는 녀석은 처음 봤어요."
"어허, 당신이 키운 애는 고작 꽃실이와 쟤뿐이면서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다른 집 애들 얘기 들으면 늘 공부한다고 하던데, 저 녀석은 도대체 인문계 다니는지, 실업계 다니는지…"
"그만해. 늦게 붙은 장작이 오래 탄다고 언젠가는 불이 붙겠지."

 

엄마와 얘길 주고받으며 너를 비호하면서도 솔직히 이 아빠도 포기하고 있었다, 공부에 대해서만은. 그러던 네가 공부하겠다고 말한 그 다음날부터 달라지대. 변화는 선생님들로부터 들려오는 소리에서 느껴지더라.
'샛빛이 완전히 변했어요.', '애 눈빛이 달라졌어요.', '그렇게 산만한 애가 저렇게 진지하게 변하다니 ….'
 

우리는 설마했지. 그리고 작심삼일이란 말로 평가절하했지. 그런데 넌 일취월장(日就月將), 욱일승천(旭日昇天),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 괄목상대(刮目相對) 등등 온갖 문자를 써도 모자랄 만큼 달라졌지. 어느 선생님에게선 가장 모범적인 변화를 가져온 애를 예로 들 때 너를 든다는 얘기까지 들었지.

 

 며칠 전부터 넌 대박을 터뜨려 모든 이들을 놀라게 하겠다고 말했지. 나도 어쩜 기적이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지. 그리고 오늘 넌 자신만만하게 시험장에 갔지. 네 엄마가 안심이 안 되는지 "차근차근하게, 너무 긴장하지 말고" 하자 "걱정 마세요. 전 큰 시합에 강하잖아요"하고 넌 대답했지.

난 그때 알아야 했지. 네 자신만만함 뒤에 담긴 엄청난 초조와 긴장감을.  그것을 감추려고 반대로 행동했다는 것을. 그래서 그걸 풀어주는데 힘썼어야 했는데, 한때는 입시 베테랑이었던 내가 그걸 간과하다니.

 

아침부터 라디오에 귀기울였지. 그런데 말이야, 첫 시간 시험문제에 처음 보는 지문이 많이 나왔고, 수험생들이 다소 어려울 것이라는 뉴스를 듣는 순간 불길함이 언뜻 스쳐갔지.
그리고 둘째 시간 문제가 쉽게 출제되었다는 뉴스에 절망스런 네 얼굴을 떠올렸지. 하늘이 도와준다면 첫시간은 쉽고 둘째시간은 어렵게 출제될 것이라는 기대가 정반대로 나타났던 거지. 결과는 뻔한 것.

 

아들아, 하늘도 가끔 배신할 때가 있단다. 그런데 하늘은 넘어뜨리기만 하는 게 아니라 다시 그 사람이 일어날 방법을 알려주기도 한단다. 이번 시험에 실패한 건 그냥 시험에 한 번 실패한 것일 뿐 네 인생이 실패한 건 아니란다. 어쩌면 하늘이 네가 세상을 살 때 교만함을 버리라고 경고하면서, 오늘 이 실패를 다음에 더 큰 축복으로 남기려는 거라고 이 아빠는 믿는다.

 

흔히들 인생을 마라톤에 비유하지. 만약 단거리라면 출발이 빨라야 승리할 수 있지만, 장거리에선 출발이 빨라야 할 이유가 없지. 마라톤에서 우승의 월계관을 쓴 선수치고 출발선에서부터 1등으로 나선 이는 없지. 조금 늦게 시작했을 뿐이지, 늦게 도착하는다는 건 아니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점수에 '죽고 싶다'는 심정이 들 수도 있지. 너보다 훨씬 못하다고 생각했던 애보다 더 떨어진 점수에 모든 걸 다 포기하고 싶기도 하겠지. 그러나 넌 최선을 다했잖아. 그것을 난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네 인생에서 이만큼 최선을 다할 기회는 그리 많지 않을 거야.

결과까지 좋다면 금상첨화겠지만, 운이 나빴다고 돌리자. 확률적으로 이번에 운이 나빴으면 다음 번에는 운이 좋을 수 있잖니.

 

다시 시작하는 거야. 잊어버려야 할 것은 빨리 잊어버릴수록 좋은 거야. 작년으로 시계바늘을 돌린다면 어차피 전문대학 갈 성적이었으니 그렇게 해도 될 것이고, 다시 한 번 더 도전하고 싶다면 그래도 좋아.

지금은 믿어지지 않는 결과에 망연자실할 따름이겠지만, 지나고 나면 정말 좋은 경험이었다고 그렇게 소리칠 날이 오리라고 믿는다. 또 한 번 기회를 줘서 고맙다고 그렇게 외칠 때가 분명히 올 거야.

 

사랑하는 내 아들아, 다시 시작하자!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정확히 5년 전 2002년 12월 10일, 수능성적표를 받아들고는 '죽고 싶다'고 울부짖는 아들에게 써 준 글입니다. 그때 우리집은 초상집이나 다를 바 없었죠. 특히 아들이 얼마나 방황하던지. 다행히 그때를 이겨내고 희망하던 대학은 아니지만 저가 원하는 전공을 찾아 대학교에 잘 다니고 있습니다. 이번 수능시험에서 낮은 점수를 받아 충격을 받은 아이들에게 이 글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2007.12.10 13:59 ⓒ 2007 OhmyNews
덧붙이는 글 이 글은 정확히 5년 전 2002년 12월 10일, 수능성적표를 받아들고는 '죽고 싶다'고 울부짖는 아들에게 써 준 글입니다. 그때 우리집은 초상집이나 다를 바 없었죠. 특히 아들이 얼마나 방황하던지. 다행히 그때를 이겨내고 희망하던 대학은 아니지만 저가 원하는 전공을 찾아 대학교에 잘 다니고 있습니다. 이번 수능시험에서 낮은 점수를 받아 충격을 받은 아이들에게 이 글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수능 #자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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