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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서예를 처음 배우고 싶었던 때가 1979년 어느 날이었다. 그러니까 지금부터 약 29년 전의 일로 국가공무원으로 채용되어 타향인 충남 예산에서 사회에 첫발을 막 내딛었을 무렵이었다.
붓글씨를 배워보겠다는 신념 하나로 서예교본과 문방사우를 사들여 퇴근 후 집에 돌아오면 열심히 붓글씨 연습에 골몰 했었다. 그러나 붓글씨라는 게 그렇게 만만한 게 아니어서 하루 이틀 사이에 좋은 글씨를 쓸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더구나 선생도 없이 필법도 모른 채 글씨를 쓰니 힘들었던 것은 당연하다.
아무리 인내심을 가지고 책을 따라 열심히 비슷하게 써보아도 글씨 한자 제대로 쓰기가 쉽지 않았다. 그렇게 지지부진 하게 세월을 보내다 제풀에 지쳐 붓글씨에 대한 미련을 떨치고 오랜 세월동안 바쁜 직장생활에 파묻혀 살다 보니, 서예라는 걸 까맣게 있고 말았다.
그로부터 강산이 두 번도 더 바뀐 2005년 가을 어느 날, 직장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문뜩 머리를 들어보니 바로 집 앞 도로 건너편 건물에 서예학원 간판이 보이는 것이었다. 서예학원의 간판을 보자 내 마음 깊은 곳에 잠재되어 있던 서예에 대한 동경이 한 순간에 격랑이 되어 분출되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날부로 앞뒤 잴 것도 없이 학원에 수강신청을 함으로써 다시 한 번 서예와의 인연을 맺었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서예를 하고싶은 동기가 왕희지나 구양순처럼 붓글씨를 잘 써 서예가가 되겠다는 원대한 꿈 보다는 취미로 글쓰기를 하며 정년퇴임 후 노년에 소일이나 할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나의 스승은 정동영 선생님이시고, 선생은 소전 손재형 선생의 제자이시다. 서예계의 대부이신 소전 선생으로부터 사사한 나의 스승님은 오체(전서, 예서, 해서, 행서, 초서) 뿐 아니라 추사 김정희, 소치 허유, 소전 손재형으로 이어지는 정통 추사계보로 추사체도 탁월하다. 글씨뿐만 아니라 서예의 기본이 되는 서예이론에도 정통하여 국내에선 서예이론으로 선생님을 대적할 만한 인물이 없을 정도다.
정통서법 전수를 위해 서예에 관한 논문 '현대서예의 병폐 외 29편'과 서법서예학 도서 <해서법정요> 외 9편을 제자들이 펴냈는데 감수를 했다.
이렇듯 훌륭하신 스승을 모시고 공부하는 나는 얼마나 행복한가! 그러나 아무리 훌륭하신 선생님의 가르침 아래서 공부를 한다 해도 나 자신의 피나는 노력이 없다면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갈 것이다. 그래서 나는 몇 년간 여유시간을 몽땅 붓글씨 쓰는 일에 올인 했다. 남들이 보면 어리석을 만큼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붓글씨 쓰기에 전념한 것이다. 좋아하던 잡기를 모두 다 포기하고 말이다.
그러나, 무슨 일이든 다 마찬가지지만 아무리 내가 좋아 하는 일이라도 굴곡이 있기 마련이다. 노력한 만큼 글씨가 늘지 않는다 생각되면 붓글씨 쓰는 일에 염증을 느끼기도 하고, 운동이 부족하다 싶으면 때로는 등산이나 골프로 돌아가고 싶은 유혹을 강하게 느끼기도 했다.
특히 공모전에 출품하는 작품을 쓸 때면 돈 안 되는 일에 매달려 시간과 돈 낭비하며 왜 스트레스를 받아야 하나 하는 자괴감에 빠져 포기하고 싶기도 했다.
그때마다 나는 당나라의 시인 이백과 관련된 고사성어 '철저성침(鐵杵成針)'을 항상 떠 올리며 마음의 위안을 삶곤 했다. 이백이 어려서 학문을 포기하고 세상 밖으로 나왔는데, 우연히 한 노파가 철로 된 봉을 숫돌에 갈면서 "이 큰 쇠뭉치를 갈아서 바늘을 만들겠다"고 하는 말을 듣고, 이백이 깊은 감명을 받아 되돌아가서 편안한 마음으로 공부해 드디어 천고의 명가가 되었다는 고사 말이다.
신은 기도 보다 노력을 더 중요시 여기는 것인가. 지난 2월 말 아세아서화협회에서 주관하는 2008 대한민국서화대상전에 서예작품(추사체 행서)을 출품했었는데, 며칠 전(3월17일) 심사결과 내가 대상을 받게 되었다는 통보를 받았다. 남들은 평생동안 서예를 해도 타기 힘들 다는 대상을 서예에 입문한 지 불과 몇 년인 햇병아리가 받은 것이다. 이 세상에 노력 하면 안 되는 일이 없다는 말을 실감하며, 오늘만큼은 붓글씨 배우길 얼마나 잘 했는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진정한 서예가로서의 출발은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 작가라는 명성을 얻은 만큼, 서예 실력도 아마추어리즘의 임서(臨書) 위주에서 벗어나 프로답게 내 개성을 살린 창신(創新)의 길로 승화시켜야 한다.
나만의 개성이 듬뿍 담긴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서예작품을 만들어 내는 그날은 언제쯤이 될까. 지금은 꿈 같아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는 요원함 그 자체일 것이다. 그러나 난 서두르지 않을 것이다. 진정한 프로에겐 농익은 열매를 거두기 위해 고통을 참고 기다리는 미학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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