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패배

또 울었네요

등록 2010.02.11 09:41수정 2010.02.11 0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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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월 노동조합 임원선거에 떨어지고 벌써 3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지고 나서 우리

쪽 후보들과 지지자들이 모여서 "3년 뒤에 꼭 이기자. 다음에 기회가 또 있지 않겠냐."면서 눈물 반, 결의 반인 쓴 소주를 마신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2004년부터 2006년까지 3년간 노동조합 사무국장을 하면서 같이 일했던 전 노조 간부들, 현장에서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들 중 40여명이 따로 두 달에 한 번씩 정기모임을 했다. 한 달에 만 원씩 회비를 모아서 3년 뒤에 쓸 선거자금 마련을 위해 적금도 부었다.

 

그동안 회사 건물 일부를 포함해서 주변의 주택 재개발이 시작되면서 공장이전 문제도 어떻게든 가닥이 잡힐 줄 알았는데 아직까지도 노·사 모두 이렇다 할 대책이 없는 실정에 이번에도 노조임원선거에 나갈 수밖에 없었다.

 

출근유세 후 모두 화장실로 달려간 사연

 

위원장, 수석부위원장, 사무국장까지 6명이 한 팀을 이뤘다. 두 팀이 붙는 경선이었다. 네 명은 본동, 두 명은 아랫동에서 아침 출근하는 사람들한테 인사하는 일부터 시작한다. 공식 선거운동 첫날 아침, 수도권에 눈이 가장 많이 내렸다. 양 팀 다 아침인사는 제쳐두고 눈 치우는 것부터 하자고 해서 합판과 삽 들고 눈을 치웠다.

 

저녁 퇴근시간에 후보를 알리는 1차 선전물을 사람들한테 나눠주고 3년 만에 같은 자리에 서서 조합원들한테 첫 인사를 했다.

 

기호 1번 후보인 현 집행부와 기호 2번 후보인 우리는 서로 한두 번 선거를 치러본 것도 아니고, 조합원 350명 되는 현장에서 15년 이상 함께 일한 사람들이라 서로 알거 다 아는 사이다. 한 쪽에서 "기호1번" 하면 2번인 우리가 "열심히 하겠습니다." 하고 대신 맞장구를 쳐주기도 하고 아랫동에서 윗동으로 올라가는 조합원이 정문 앞을 지나가면 그 사람 이름을 크게 불러가면서 서로 한바탕 웃기도 하고 그랬다.

 

다음날 아침, 전날 내린 눈이 얼어서 길은 미끄럽고 날씨는 여전히 영하 15도가 넘어 무척 추웠다. 어깨띠를 하고 귀 덮개와 장갑을 끼고 있는데도 손발이 시리고 얼굴은 얼얼했다. 아침 일찍 출근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한 시간 전부터 아침 유세를 하는데 경비아저씨가 보온병에 율무차를 타 오셔서 한 잔씩 마시라고 따라 주신다. "고맙습니다." 하고 조금 있으니 한 아줌마 조합원이 추운데 고생한다고 하면서 시골에서 가져온 복분자주를 따뜻하게 데워 와서 한잔씩 따라 주고 가신다. 추운 때 빈속에 마셔서 그런지 약간 취하는 것 같기도 하고 기분이 좋았다.

 

한 오 분이나 지났을까. 다른 아줌마가 오더니 생강차를 마시라고 따라 주시고, 또 다른 아줌마가 더 찐한 생강차를 주시고, 그 다음 아줌마는 유자차를 따라주고 가신다. 야! 이거 너무 많이 마셨다고 안 마신다고 할 수도 없고 웃으면서 다 받아 마셨는데 또 아줌마 한 분이 "아침에 일찍 나와서 밥도 못 드셨죠?" 하면서 후보들 먹으라고 김밥에다 꿀물까지 경비실에다 맡겨 놓고 가셨다. 한 시간 조금 넘은 출근시간 인사가 끝나고, 다들 화장실에 가서 오줌을 누고 나왔다.

 

부천에서 정년까지

 

"부천에서 정년까지 평생직장 책임지겠습니다." 이번 선거에서 우리 2번 후보들이 내세운 구호다. 수도권 재개발 바람으로 우리 공장 주변에 사업장들은 오래전에 다 지방으로 이사를 갔다. 우리 회사도 머지않아 그렇게 되리란 것을 회사에서 일하는 우리보다 회사 부근에 사는 사람들이 더 많이 알고 있다. 회사가 이전하더라도 부천에서 일하는 400여 명의 사람들이 통근버스로 출, 퇴근 가능한 곳으로 옮길 수 있도록 해서 사람들의 고용을 책임지고 걱정 없이 일할 수 있게끔 하겠다는 얘기다.

 

2년 전에 노·사는 단체협약을 통해 55세에서 57세로 2년의 정년연장을 합의했다. 며칠 전 정부에서 60세까지 정년연장을 추진한다는 이야기도 있고, 우리도 조합원 구성으로 보면나이 드신 50대 분들이 많아 정년하고 나서 국민연금까지 받을 수 있게끔 하는 것도 필요하겠다고 해서 이번에 공약도 걸고 나왔다.

 

그렇다 해도 요즘처럼 새로운 사람을 뽑지 않는 상황에서는 젊은 사람 한 명이 아쉬운 것이 현장이기도 하다. 젊은 사람들이 새로 들어와서 일을 하고 정년까지 일하신 분들은 나가고 그렇게 돌고 도는 게 맞다 생각하지만 우리 후보들 처지에서 보면 어느 하나만 택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아줌마도 형님도 나도 울었네

 

선거공약도, 선거 당일 날 전체조합원 앞에서 하는 연설도 누가 봐도 우리 2번 후보들이 훨씬 잘했다. 현 집행부와 경선이라 그동안 하고 싶었던 말을 정리해서 더 큰 목소리로 소신껏 알려냈다. 그래도 선거는 정책과 공약만으로 이길 수 없다는 것 역시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투표 결과, 47표 차이로 우리가 졌다. 후보들과 현장을 쭉 돌면서 우리가 졌다고 알렸다. 솔직히 우리를 찍지 않은 사람들이 밉기도 하고 맘이 상해 일부러 오기가 나서 더 크게 소리를 질렀다. "덕분에 우리가 졌습니다. 앞으로 기호 1번 열심히 밀어주세요..." 한 명 한 명에게 이야기하고 돌아서는데, 우리를 지지했던 아줌마, 형님들의 얼굴은 차마 볼 수가 없었다. 선풍기를 조립하고 있는 아줌마는 우리를 쳐다보지도 못하고 고개를 푹 숙이고 일하는데 가까이 가서 보니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나까지 눈물이 나오려고 해서 긴 말 않고 그냥 빨리 나와 버렸다. 다 돌아보고 나온 후엔 도저히 일을 못할 것 같아 여섯 명 모두 그냥 퇴근하기로 했다.

 

낮술 한잔 하면서 왜 졌는지 곱씹어 보고, 믿었던 사람들이 왜 우리를 찍지 않았는지 원망도 하면서 패자들의 슬픔을 같이 나눴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김밥까지 싸 와서 따뜻한 차를 따라주신 우리 아주머니들이 계속 아른거렸다. 술 마시면서 그 분들에게 문자를 보냈다. '우리보다 마음 졸이고 고생했는데 죄송하고 고맙습니다...' 우리 지지자들이 일 끝나고 우리가 있는 식당으로 하나둘 모였다.

 

어제 저녁만 해도 이 시간에 여기서 당선 축하주를 마시자고, 후보들끼리 약한 모습 보이지 말자고 했는데, 사람들을 보니 속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우리는 우리대로 미안하고 아줌마와 형님들은 또 자신들이 열심히 못 해서 더 미안하다면서 같이 울고 말았다. 

 

12년 전 34표, 9년 전 88표, 6년 전 3차까지 가서 1표 차이로 당선, 3년 전 43표 차이로 떨어지고 나서 이번에 또 졌으니 노조임원선거만 다섯 번 치러서 네 번 떨어졌다. "우리가 선거에 한두 번 져 봤냐." 하면서 서로 위로해 보지만 3년 전보다 상처가 더 크다. 다음 선거를 기다려보자고는 하지만, 솔직히 만만치 않은 게 현실이다.

 

"부천에서 정년까지 평생직장 책임지겠습니다." 공약이 아니라 꼭 할 수 있었는데... 그래도 이제는 한 조합원으로서 노조가 힘을 받을 수 있도록, 승자를 도와주는 것이 패자의 할 일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덧붙이는 글 | 노동세상 2월호에 실린 글 입니다. 

2010.02.11 09:41 ⓒ 2010 OhmyNews
덧붙이는 글 노동세상 2월호에 실린 글 입니다. 
#노동조합 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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