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차돈 순교비뒷면에는 순교 상황이 자세히 적혀있다.비의 건립연대는 817년(헌덕왕 9)으로 추정된다.
경주박물관
어쩌면 귀족들은 신라왕실에 협력하지 않으면 고립되는 상황을 앞두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때 이차돈의 순교가 벌여졌고, 그것은 그들을 벌벌 떨게 한 것입니다. 왕이 기꺼이 자기 측근을 벌 줄 정도로 엄하고 엄한 법률의 정의. 그 매서운 칼날을 보면서 최후의 방어막을 스스로 끌어내린 것입니다.
이차돈이 순교 후 신라에는 상대등이 설치되었는데요, 상대등은 귀족이 추대하고 왕이 임명하는 재상입니다. 과거 이 역할은 왕의 몫이었습니다. 귀족회의의 수장일 뿐이었던 마립간시대는 상대등의 설치와 함께 실질적으로 왕의 시대로 접어든 것입니다. 그래서 김부식은 지증왕이 스스로 왕이라 칭했지만 그를 지증마립간이라 불렀습니다.
이후 성스러운 숲 천경림의 나무를 베어서 그곳에다 흥륜사라는 절을 지었습니다만 이 절에 기거한 승려들은 대부분 천경림에서 산신령에게 예배하던 무속인들이었습니다. 기묘한 절충이라고 해야 할까요? 이차돈은 왕과 귀족간의 절묘한 타협을 이끌어낸 촉매제 구실을 한 것이지요. 흥륜사는 오래도록 무속의 본거지이고, 도깨비들의 놀이터가 됩니다. 일부 귀족들과 들은 여전히 불교와 거리를 두었습니다. 여전히 불교는 왕실불교였던 셈이지요.
그렇지만 이차돈의 순교가 가져 온 변화는 결코 작지 않았습니다. 뭐니뭐니해도 가장 큰 변화는 이때부터 신라가 '중고기'로 접어들었다는 데 있을 것입니다. '신성한 혈통'의 시대. 중고기는 바로 그런 신성한 혈통의 시대입니다.
이 혈통은 하늘이 부여한 것이 아니라, 바로 불교가 부여한 혈통, 즉 부처가 될 수 있는 혈통인 '성골'의 시대인 것이지요. 그래서 중고기 신라왕들의 왕호는 불교식이며, 신라 역사상 유일하게 독자적인 연호를 썼던 시대입니다. 부처의 혈통을 가진 가문이 중국이나 고구려의 연호를 쓸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혈통의 신성함을 보여주기 위하여 상징물 제작에 열을 올렸던 때가 중고기이기도 합니다. 신라 3보라고 일컬어지는 장육존상, 옥대, 황룡사 9층석탑은 물론이고 아름다운 분황사의 모전석탑과 첨성대까지 만들어지게 됩니다. 혈통이 위기에 빠지면 빠질수록 아름다운 건축물은 거듭거듭 만들어집니다. '위기는 건축을 낳는 법'인가 봅니다.
(일연은 삼국유사에서 신라를 전통식 왕명의 시대인 상고기, 불교식 왕호의 시대인 중고기, 중국식 시호의 시대인 하고기로 나눕니다. 중고기는 법흥왕부터 진덕여왕때까지로 성골왕의 시대입니다.)
원광의 대승불교왕실불교는 오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권력과 유착한 종교는 내부비판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그래서 아래로부터의 목소리를 외면한 채 오만과 독선에 빠지게 됩니다. 그것이 원광이 살던 시대 신라의 모습이었습니다.
원광은 어릴적부터 지적호기심이 남달리 강했습니다. 노자, 장자, 석가 등 수많은 사상들을 두루 섭렵하며 공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원광이 머물던 삼기산에 어느 승려가 암자를 짓고 공부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반가운 마음에 찾아갔지만 그 승려는 원광을 거들떠도 보지 않고 수행만 할 뿐이었습니다. 참으로 오만한 모습에 실망하여 돌아왔지요.
그 승려에게 실망하고 분개한 사람이 원광만은 아니었나봅니다. 암자가 사람들의 통행을 버젓이 막고 있어서 항의했는데도 승려는 못들은 척했습니다. 밤이고 낮이고 불경을 외우며 소리를 질러대는 통에 시끄러워 마을 사람들이 다시 항의했습니다만 여전히 안하무인이었습니다.
결국 어느 날 성난 마을사람들에 의해 암자는 파괴되었습니다. 원광은 처참하게 무너져 내린 암자 속에서 왕실의 보호아래 오만해진 불교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신라는 삼국 중 유일하게 국립학교가 없었기 때문에 왕실은 정책적으로 승려들을 유학시켜 지식인으로 키웠습니다. 승려들은 지적인 독선과 권력을 등에 업은 오만으로 백성들을 불편하게 하는 줄도 몰랐습니다. 결국 그들은 백성들에 의해 배척당하고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삼국유사>에 나오는 '원광법사와 검은여우'이야기입니다. 여우는 귀신이 타고 다니는 동물이며, 죽을 때는 반드시 머리를 자기가 태어난 곳을 향하고 죽음으로써 근본을 잊지 않는다는 조상숭배의 상징적 동물입니다. 설화에서 여우는 일반 백성들의 대변자입니다.)
이후 원광은 중국으로 떠납니다. 더 넓은 세상에서 학문을 닦아 지적인 욕구를 충족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당시 중국은 수나라에 의한 통일전쟁시기였습니다. 전쟁은 인간성을 파괴하고 삶을 피폐하게 만듭니다. 그 고통을 바라보며 출가를 결심하고 승려가 됩니다. 학문은 자신의 구원보다 다른 사람들을 고통에서 구해주는데 그 목적이 있어야 한다고 여긴 것입니다. 그 후 원광은 수나라에서도 인정받는 이름난 승려가 되었습니다.
600년, 원광은 신라로 돌아왔습니다. 원광은 다른 승려들과 확실하게 달랐습니다. 그는 모든 학문을 다 존중했습니다. 유교,불교,도교를 아울렀으며 심지어 전통신앙도 받아들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 대승불교입니다.
그가 삼기산에서 본 것은 전통신앙과 불교의 갈등이었던 것입니다. 신라의 지방은 여전히 전통신앙을 믿고 있었는데 승려들은 경주출신이거나 유학파들이 많아서 굉장히 자부심이 강해 둘은 융합하지 못했습니다. 원광은 하늘에서 내려다보며 백성을 무릎 꿇리는 불교를 버리고, 아래로 내려와 백성들이 모시는 신령님의 이야기까지 들어주었습니다.
삼국 중 가장 뒤떨어진 나라였던 신라가 중고기 국가적 위기속에서도 똘똘 뭉쳐 삼국통일전쟁의 최후의 승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이렇게 스스로 낮은 데로 내려온 원광의 불교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백제와 고구려가 불교를 더 일찍 받아들였다고는 하나, 사찰이나 탑이 남아있는 곳은 딸랑 수도뿐입니다. 그들의 불교는 귀족불교로 왕실과 돈 많은 귀족의 영원한 번영을 빌어줬습니다. 그에 비해 신라의 불교가 마을마다 풍성했던 것은 이렇게 스스로 낮은 데로 내려왔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모든 사람들에게서 칭찬과 부러움을 사고 있는 북유럽의 복지제도의 바탕에는 기독교적 사랑이 있었습니다. 신라불교가 절대적으로 강력했던 것도 이런 사랑을 폈기 때문입니다. 신라는 삼국 중 사원을 중심으로 한 민간 의료와 교육, 구휼에 앞장섰던 유일한 나라였습니다. 신라의 진흥왕은 직접 수레위에 약과 의사를 데리고 먼 변방에 소외된 백성들을 찾아가기도 했습니다. 불교의 신성한 혈통을 가진 사람으로서의 신성한 의무를 다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대통령을 무릎 꿇리게 한 조찬기도회 때문에 시끄럽습니다. 그래서인지 원광의 이야기가 더욱 새롭습니다. 그는 자신을 낮출 줄 알았기 때문에 사회통합의 중심이 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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