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순이를 처음 보았던 순간. 정자 앞에서 스님을 기다리는 듯이 보였다.
김어진
봉순이를 처음 보았던 순간을 기억한다. 스님 차를 타고 봉순이가 있는 농경지에 들어서는 길이었다. 봉순이를 찾기 위해 논밭을 살펴보는데, 뜻밖에도 봉순이는 스님이 항상 계시던 정자 옆의 차도 위로 올라와 우두커니 서 있었다. 스님이 오기를 기다리는 듯했다. 처음에는 황새가 정말로 여름에도 있다는 게 그저 놀랍고 신기해서 입을 다물지 못 했다.
봉순이는 주변의 다른 새들과 눈에 띄게 비교되는 크기와 밝은 색을 가진 새였다. 곧 친구 없이 혼자서만 있는 것이 외로워 보였다.
"봉순아!"스님은 창문을 열고 친구 대하듯 봉순이 이름을 외치며 인사를 건넸다. 물론 사람이 큰 소리를 내니까 쳐다봤겠지만, 봉순이는 우리가 차를 살살 몰고 가자 그 큰 걸음걸이로 조금 씩 거리를 벌리며 걸어갔다. 다른 새들 같았으면 사람 비슷한 모양만 봐도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도망갔을 텐데, 녀석의 반응을 보니 스님을 알아보는 듯했다. 그게 아니면 적어도 스님으로 인해서 사람에 대한 경계심이 많이 사그라 들었나 보다.
앞서 말했듯이 봉순이가 처음 발견되었을 당시 여러 신문사와 방송사는 앞다퉈 보도했다. 하지만 천연기념물이자 한국에서 유일하게 야생 황새가 된 이 봉순이를 지자체에서나 문화재청, 조류보호협회, 황새생태연구원 등 당연히 나서야 할 곳에서 아무도 지키려고 나서지 않았다. 오히려 황새에게 먹이도 주지 말고 가만히 자유롭게 내버려 두어야 한다고 조언하는 전문기관도 있었다.
그러나 만약 한국에서 복원된 황새가 일본으로 날아갔다면 일본 사람들은 어떻게 대했을까. 만약 봉하마을에 노무현 전 대통령이 아직 살아계셨다면 봉순이를 이렇게 가만히 방치했을까? '살아생전 마을 자연을 살리는 데 힘쓰셨던 분이 황새로 나타나 그 뜻을 전하려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에서 도연 스님은 봉순이를 관찰하기로 나섰다고 한다.
한국에는 여름철 황새에 관한 자료가 없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봉순이에 대해서 알려진 것이 하나도 없었다. 어디서 지내고, 뭘 얼마나 먹는지, 잠은 또 어디서 자는지, 천적은 없는지, 왜 이곳에 온 왔는지... 궁금한 것이 너무나 많았다.
게다가 5월 말쯤에는 일 주일 동안 봉순이가 어디에 있는지 위치파악조차 어려움을 겪으면서 스님은 김해평야, 주남저수지, 우포늪 등 봉순이가 있을 만한 경상남도 주요 철새 도래지들을 찾아다니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으셨다. (나도 이때 어렵게 시간을 내어 갔으나 비만 맞고 돌아왔다.) 결국 화포천 인근의 낙산마을과 퇴은마을의 농경지에서 녀석을 찾아내었고 지금은 이곳에서 매일 관찰되고 있다.
이 농경지 한가운데에는 농민들을 위한 작은 정자가 있다. 그 주변을 영역으로 삼은 봉순이를 관찰하기에 최적의 장소였다. 우리는 종일 접이식 의자를 펼치고 봉순이를 지켜보면서 반경 5m밖으로 벗어날 일이 없었다. 여유가 있을 때는 독서도 하고 배고프면 빵을 먹거나 오가는 마을 주민분들과 얘기도 나누고 봉순이가 잠 자러 가면 텐트를 펼치고 스님과 나도 잠들었다.
봉순이가 잠에서 깨어나는 새벽부터 잠을 자러 전봇대 위로 돌아가는 저녁까지 일거수일투족 봉순이를 지켜보면서 생활패턴도 녀석에게 맞춰갔다. 이렇게 봉순이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 살아가는지 생태적인 정보를 알 수 있기까지 스님의 많은 노력과 수고가 있었다. 나는 겨우 며칠간 봉순이를 보았을 뿐이지만 도연스님은 이곳에서 봉순이를 지켜본 지 70여 일이 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