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0월 31일 오후 서울 용산구 이태원 압사 참사 현장에 경찰통제선이 설치되어 일반인들의 출입이 통제된 가운데, 참사 현장 인근 한 상인이 희생자들을 추모하며 촛불, 배, 감, 밥, 국 등으로 차려진 제사상을 내놓았다.
권우성
참사가 발생한 골목은 외딴섬이 아니다. 누구든 쉽게 드나들 수 있고, 그만큼 쉽게 휩쓸릴 수 있는 개방된 공간이다. 희생자와 생존자, 구조자, 목격자 사이의 경계는 뚜렷하지 않다. 밀집한 인파 속에서 어린 자녀의 손을 붙잡고 겨우 빠져나왔던 민희씨와 원기씨 부부는 생각한다. 만약 계속 떠밀렸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이를 잃을 뻔한 상황에 아찔해지는 한편, 그날 같이 사진을 찍은 사람들의 안부가 걱정이다. 또한 죽어가는 사람들을 옆에 두고 즐거워한 게 죄스럽다. 보영씨의 사정도 비슷하다. 가로막힌 도로 위에서 차량에 갇힌 채 구조 현장을 지켜보아야 했던 보영씨는 사람들이 들것에 실려 나가고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장면을 잊지 못한다. 그리고 그런 괴로움 이면에는 자책감이 존재한다. 심폐소생술이 가능한 인원을 찾는 요청에 응답하지 못하고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고 말았던 자신을 탓하는 것이다.
참사는 그날 이태원에 머무른 사람들을 관통한다. 동시에 직간접적으로 소식을 접한 모두가 참사의 영향 아래 놓인다. 무엇보다 '왜'라는 질문이 앞선다. 이태원의 핼러윈이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더욱 충격적이다. 아직 꿈인 것 같다고, 생각지 못한 일이라고, 왜 이렇게 되었는지 모르겠다고, 여태 그런 적 없었다고. 클럽 DJ H씨는 일상에 도사리던 죽음을 체감하고, 모하메드씨는 희생자들의 면면을 보며 미안할 뿐이다. 자신과 당신, 둘의 운명을 가른 데에는 한 끗 차이밖에 없으므로. 그렇게 '나' 역시 희생될 수 있었다는 공포가 각자에게 새겨졌지만, 결국 살아남았기 때문에 그 마음을 온전히 드러내기란 편치 않다. 그런 점에서, '당사자를 폭넓게 상상해야 한다'는 정임씨의 뜻과 '당사자가 아니라도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는 나연씨의 뜻은 서로 통한다. 분명 참사는 훨씬 많은 사람들의 문제로서 다뤄져야 한다.
그날 이후 잃어버린 것들
이태원은 참사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하지만 누군가는 여전히 그곳을 삶의 터전으로 삼기에 회복을 고민해야 한다. 과연 무엇을 잃어버리고 있는지 헤아려야 한다. 당연하게도, 그날 이후의 상실은 희생자의 총합을 넘어선다. 가령, 삼대 째 이태원에 거주 중인 원기씨에게 핼러윈의 의미는 각별하다. 유년 시절부터 함께한 축제인 만큼 아득한 추억이 거기 쌓여 있다. 그 문화가 위태로워질수록 원기씨의 뿌리도 흔들릴 수밖에 없다. 이태원을 중심으로 드랙퀸 활동을 하는 샤인씨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성소수자로서 샤인씨가 가진 연대감은 이곳에 모인 이방인들을 향한 것이다. 이태원의 위기를 두고, 샤인씨는 왠지 악착같다. 떳떳하다고, 잘 이겨 낼 거라고. 그렇듯 '커다란 장례식장'을 닮은 풍경 속에서 피해는 연쇄적이다. 참사의 여파는 실존 깊숙이 미치고, 이태원의 침체는 대체할 수 없는 공동체에 치명적이다.
또한 참사는 지난 팬데믹의 연장선에 위치한다. 이태원에서 칵테일 바를 운영하는 범조씨는 매출이 이전 수준까지 올라오더라도 가게를 정리할 참이다. 과거 언론에서 코로나 확산지로 이태원을 선정적으로 지목했을 때, 그 일대는 이미 한 차례 타격을 입은 바 있다. 개인이 통제하기 어려운 사건이 연달아 터지면서, 언제든 생계가 위협 받을 수 있다는 불안정성도 커졌다. 그런 감각은 단기적인 지표로 포착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경제적인 관점만으로 상인들이 겪는 곤란을 설명할 수도 없다. 이를테면, 범조씨가 이태원에 자리 잡은 데에는 한때 자신이 즐겨 찾던 놀이터를 물려주고 싶은 이유가 있다. 따라서 상권의 회복이란 다시 놀고 싶은 이태원을 만드는 일이다. 이태원이 이전처럼 놀 만한 공간으로 인식되어야 상권도 회복될 수 있다. 그리고 저마다 알고 있는 이태원의 모습에 그 단서가 조각조각 남아 있다.
'이태원'과 '핼러윈'을 알기
이태원의 핼러윈은 고유하고 다채롭다. 클럽이나 술집에서만 기념하는 것도, 청년들만 즐기는 것도, 유흥만을 위한 것도 아니다. 흔히 폄하되듯 '외국 귀신 놀이'에 불과하지도 않다. 민희씨에 따르면, 이태원의 핼러윈은 온 동네 온 가족이 참여하는 지역 잔치다. 주택가 곳곳 호박 장식과 사탕 바구니가 걸리고, 어린이집에서부터 공원 놀이터에서까지 행사가 열린다. 사람들은 거리를 구경하며 다양한 문화를 익힌다. 또한 낯가림이 심한 승연씨에게 핼러윈 코스튬은 곧 일탈이다. 캐릭터 분장이 부끄럽기도 잠시, 이태원에서만큼은 금세 자신감이 솟는다. 나중에는 낯선 행인에게 먼저 손을 흔들 만큼 적극적이 되는데, 그건 아마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워진 덕분일 것이다. 평상시 이태원이 간직한 분위기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무슨 차림이든 어떤 사람이든, 있는 그대로의 서로를 환대하려는 노력이 이태원을 구성한다.
반면, 모르는 영역은 곧잘 편견으로 메워진다. 특히 이태원과 핼러윈을 둘러싼 혐오는 참사를 해석하는 데 강력하게 작용한다. 일각에서는 "놀러가서 죽은 것"이라며 그 사회적 해결을 부정하고, "거길 왜 갔냐"라며 피해자에게 책임을 전가한다. 보영씨는 지적한다. 이태원과 핼러윈을 몸소 경험한 주민들은 그런 말을 하지 못할 거라고. 그런데 그런 이해가 드물어 침묵에 잠기는 건 오히려 주민들이다. 누군가의 고통은 그렇게 가중된다는 점에서 참사는 현재진행형이다. 그렇다면, 지자체의 대응은 어떨까. 일주기를 앞두고 "오버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원기씨의 바람이 무색하게, 마포구는 핼러윈을 금지한다는 현수막을 내걸었다. 또한 이태원은 경찰 병력과 철제 펜스로 채워졌고, 우측 보행과 이동이 강제되었다. 과연 그런 통제만이 안전을 보장하는 걸까. 사람들이 마주치고 멈춰 설 수 없는 축제는 괜찮은 걸까.
새로운 추모 방식의 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