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찾은 할아버지의 성돌석수 도변수 오유선은 아이의 할아버지!
사계절
그들에겐 무명씨, 그러나 지금도 빛나는 이름들한양을 재우는 종소리가 스물여덟 번 울리면 사대문과 사소문이 닫히고 아이는 성문 밖 외딴집으로 돌아온다.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함이라지만 성을 쌓아 성 안팎을 구분하며 살았던 그 옛날, 아이는 도성 안의 삶이 궁금하고 부러웠을 것이다.
그러나 도성 안의 높고 화려한 삶보다 제 이름에 부끄럽지 않게 정직하게 살아가는 민초의 후예가 자신임을, 그것이 한양 제일임을 깨달은 아이는 시대를 넘어 오늘의 촛불로 그 값진 유산을 남겨 주지 않았을까?
"한양도성에서 가장 멋진 건 바로 성벽을 쌓은 수많은 사람들이에요!"이 책의 주제와도 맞닿아 있는 아이의 외침과 함께 펼쳐지는 그림은 묵직하고도 뜨거운 감동으로 오래 머물 것 같다. 장장 18.6km에 이르는 길고 긴 성벽 길과 그 길을 쌓은 무명씨들의 이야기가 함께 새겨진 그 그림은 오늘도 타오르고 있는 촛불의 바다로 이어졌다. 이름이 있지만 기억하는 이 없는 그들은 무명씨로 통칭되다 '보통사람들'을 지나 '시민'이 되어 굳게 잠긴 푸른 지붕집을 향해 기꺼이 자신의 일상을 태워 빛을 내고 있다.
가을을 빼앗기고 겨울마저도 차가운 길 위에서 버티며 새해를 맞았다. 해가 바뀌었지만 오래 묵은 숙제는 펼쳐볼수록 상상 이상이다. 오직 진실을 바라며 바다를 이루었던 성숙한 시민들의 촛불은 오늘도 계속 타오르고 있지만, 저쪽에서 펄럭이는 '그들만의 태극기'도 가짜뉴스 바람을 타고 이쪽으로 몰아쳐 오고 있다.
오래 기다려온 봄, 그저 며칠 늦는 것일 뿐입춘이 지났다. 아이들의 졸업식이 동네 곳곳에서 연일 열리고 있다. 3월 입학식 전에 상식적으로 흘러가는 일상이 새롭게 시작되리라 기다렸는데, 아무래도 조금 더 시간이 걸리려나 보다. 괜찮다, 며칠 조금 더 걸리는 것일 뿐이다. 저 길고 긴 한양도성 길이 하루아침에 만들어졌을까? 한 돌 한 돌, 걷고 걸어 네 개의 산을 이어 없던 길을 옛날의 우리가 만들어 냈다.
알고 보니 참 귀한 한양도성 길, 아이들 손을 놓고 홀가분하게 뛰듯이 하루 일정으로 걷고 싶지만 헤아릴 수 없는 이들의 무수한 시간으로 쌓은 길이다. 아이와 함께 걷는 길은 더디지만 아이의 길에선 돌멩이 하나, 풀 한포기도 길벗이 된다.
오래 기다려온 미래가 늦어도 여름 전에는 올 듯 하니, 아이들 걸음에 맞춰 시간을 나누어 오래된 길을 천천히 걸어 봄 속으로 걸어가야겠다. 그림책 뒷 면지에 기어코 친구들을 불러 모아 할아버지의 성돌을 자랑하는 아이처럼 우리가 쟁취한 미래를 우리 스스로에게 자랑하는 마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