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도톰한 입술처럼 검붉은 장미꽃

이소리 장편소설 '칠년의 사랑'<1>그리움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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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찬(lsr)등록 2002.06.12 18:37
꾹꾸꾹 꾹꾹꾸 꾹꾸꾹
핏발 선 눈동자를 부비는 신새벽, 발목 잘린 비둘기떼가 푸더덕 날아 오른다. 안과 밖의 경비를 서고 있는 철조망을 박차며.
꾸꾸꾸꾸꾸 꾸꾸꾸꾸꾸 꾸꾸꾸꾸꾸
하지만 비둘기떼는 그 어디에도 없다. 시퍼렇게 열리는 하늘에는 은빛 점들이 퍼덕이고 있을 뿐. 잠시 후 은빛 점들이 수십 개의 십자가로 다가오기 시작한다. 밖에서 안으로 햇살처럼 쏟아져 내리는 십자가떼··· 시인 김준태의 ‘아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 의 그 십자가가 되어 날아오는 비둘기떼. 날이 밝기가 무섭게 철창에 다가와 빵가루를 던져주기를 애타게 기다리는 비둘기들의 동그란 눈동자.
“이야, 꽃봐라 꽃. 빨간 저 꽃이 무슨 꽃이지?”
“어디어디?”
“저어기- 산등성이에 새빨갛게 피어난 뺄갱이꽃 좀 봐라.”
“우와, 세상이 온통 빨갛네, 빨개.”
“에이, 저건 장미잖아.”
“······”
꽃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쇠창살 밖에는 따가운 햇살만이 갇힌 자들의 마음처럼 아래로 아래로 추락하고 있을 뿐. 그랬다. 이들은 밖을 동경하고 있다. 철창 밖에 없는 장미가 이들의 마음 속에 빠알간 뺄갱이꽃으로 피어나듯이, 이들은 유린 당한 자유를 찾고 있다.
내가 널 만난 것은 1980년 유월 초순이었다. 검붉은 장미를 무더기로 꺾어 길거리에 시뻘겋게 흩뿌리듯이, 사람꽃을 꺾어 그 피와 살을 흩뿌린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이 마악 들어선 그때.
삼, 청.
석 삼(三) 맑을 청(淸). 이름 하나는 부처님 법어처럼 기막히게 잘 지었지. 하지만 이름에 걸맞지 않게 악명을 떨친 삼, 청. 소위 깡패집단을 일소한다는 명목의 삼, 청, 교, 육, 대. 그 악마의 이름 아래 무고한 시민과 이 땅의 민주화를 외치는 양심세력들이 시인 곽재구의 ‘사평역에서’ 란 시에 나오는 그 굴비처럼 줄줄이 묶여 전두환이 피워올린 봉화가 되어야 했지. 비릿한 피 내음을 풍기며. 그래. 지금도 코 끝에 그 살 타는 내음이 맴돈다. 우욱.

내가 5년이나 다녔던 동양식품주식회사는 국내에서 30대 안에 드는 재벌그룹이었다. 76년 2월, 졸업과 동시에 나는 동양식품 영등포 공장 프레스실에 소속되었지. 당시 나의 일은 베니어합판 같은 철판을 일정한 크기로 절단하는 일이었어. 야간대학 국문과에 갓 입학한 나로서는 참으로 고통스런 나날의 연속이었지. 계속되는 야근과 철야로 인해 나는 4년 동안 학교수업을 무척이나 많이 빼먹기도 했고. 하지만 다행히 80년 2월 무사히 졸업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나를 꽁꽁 묶은 고통의 사슬은 대학을 졸업한 이후에도 내게서 풀리지 않았어. 내가 이끌던 문학서클의 정기모임은 물론 일기 한 줄조차 제대로 쓸 수 없을 정도로 바쁜 나날의 연속이었지. 또한 내 주변에는 늘 안전사고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고. 요란한 기계소리와 숨 쉴 틈 없이 밀려드는 철판들을 처리하다 보면, 이 세상의 모든 시간이 철판 속에서만 머무는 것 같았지. 그러던 그해 중순, 마침내 나에게도 전두환처럼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고 말았어.

이지훈은 등단한 시인으로서 대학 학보 편집장을 맡았으며, 5년 동안 성실히 근무한 경력과 80년 2월 대학을 졸업한 학력을 인정해 1980년 6월 15일자로 본사 홍보실 사보팀장으로 발령함.

손가락 잘린 동료들의 누렇게 뜬 찬사를 받으며 본사 홍보실로 전출가는 그날, 프레스실 뜰에서는 검붉은 흑장미가 마악 탐스러운 꽃봉오리를 내밀다가 은빛 칩(쇳가루)을 마구 뒤집어 쓰고 있었어. 마악 피어나는 우리들의 사랑 앞에 던져진 은팔찌처럼 그렇게.

본사에 도착한 나는 홍보실장으로부터 홍보실에 대한 업무사항과 사보 ‘Green’ 에 대한 세부적인 창간 일정과 월간 일정을 전달 받았지. 그날, 내가 홍보실 업무사항과 사보추진계획서, 부서원들의 신상명세서를 들고 나온 시각은 정확하게 오후 5시. 자리에 돌아온 나는 맨 먼저 부서원들의 신상명세서를 훑어 보았어.
17.
나는 고개를 갸웃했어. 17? 가만 있자. 지금 시각이 17시가 아닌가. 그것 참 묘한 일이다. 17이라··· 여고 1년생? 그래. 어쩌면 나 역시 홍보실 업무에 대해서는 열일곱, 이 나이와 다를 것이 뭐가 있겠는가. 그날부터 나는 너가 처리하는 업무에 대해서 특별히 신경을 썼어. 업무에 약간의 하자가 있거나 외출이나 결근계를 제출할 때에도 너에게는 늘 관대하게 처리했지. 그 당시 나는 너의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 하나로 너를 아예 여고생으로 치부했다. 틈만 나면 너의 담임선생처럼 엄하게 가르치려 들었고.

밖과 안,
그래. 밖과 안은 애당초 별개로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인간의 잣대로 정해놓은 단어일 뿐. 저 벽도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다. 바로 저 벽이 있어 밖과 안의 구분이 생긴다. 그렇지만 그러한 구분도 벽을 가운데 두고 살아가는 사람의 눈높이에 대한 기준일 뿐이다. 하지만 너무나 답답하다. 마음 속으로 아무리 나를 끝없이 다잡아도 몸은 끝없이 밖으로 나가고 싶다는 생각뿐. 그래. 안이 마음이라면 밖은 몸일 것이다.

장미꽃잎이 너의 도톰한 입술처럼 검붉은 빛을 더해가는 유월 하순. 오랫만에 뭉게구름이 한두 점 두둥실 피어오른 푸르른 하늘에서 유난히 따가운 햇살이 칩처럼 쏟아져 내렸다.
동양식품 홍보실 사보팀으로 옮긴 나는 나날이 마음의 여유를 되찾고 있었다. 점심식사를 하고 난 나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책상 서랍을 열고 시상을 메모하는 노트를 꺼내려다가 잠시 주춤했다. 평소 가지런하게 정리해 둔 서랍 속의 노트가 엉뚱한 자리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닌가. 노트만이 아니었다.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그 광경까지 누군가가 훔쳐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일부러 태연한 척 고개를 끄덕이며 노트를 펼치고 머리 속에 메모해 둔 시상을 옮겨 적었다. 다음 날, 나는 노트를 뒤집어 넣은 뒤, 점심식사를 하고 돌아와 태연하게 서랍을 열었다. 아니나 다를까. 뒤집어 넣어둔 노트가 가지런하게 바로 놓여 있는 것이 아닌가. 역시, 누군가가 내 노트를 훔쳐보는 것이 분명해. 나는 시작노트에 짧은 메시지를 남겼다.
누군가 내 마음을 훔치고 있다. 내 마음을 싹쓸이하는 참머리 치렁치렁한 예쁜 도둑은 내 마음을 어디로 훔쳐가는 것일까. 오늘도 내 마음은 떠나고 없다. 내 마음은 열일곱 앳띤 소녀의 가슴 속 깊숙히 잠들어 있다. 오늘도 진종일 도둑 맞은 내 마음이 그립다.

늘 같은 해가 뜨고 늘 같은 해가 진다. 하지만 인간에게는 늘 다른 해가 떠올랐고 늘 다른 해가 졌다. 오늘도 하루를 마감하는 유월의 햇살이 쇠창살을 붉게 붉게 물들이고 있다. 마치 이 땅에서 학살 당한 원혼들이 억울해 억울해서··· 지는 해를 바라보며 하늘에 마구 뿌리는 피거품처럼. 그래. 작년 이맘 때도 그랬다. 도심 곳곳에 가진 자들의 자존심으로 우뚝우뚝 치솟은 빌딩에 천천히 피거품을 물들이던 저녁놀. 사보팀의 유리창마저 발갛게 물들이던 그 서러운 저녁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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